기정과 달래는 할망을 따라 숲으로 향했다. 아방은 할망의 기도처에 절대 가지 말라고 했지만 아방이 장에 가고 없을 때면 할망을 따라 숲을 드나들었다. 할망은 한 해가 다르게 걸음이 느려졌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속도가 빨라졌다. 할망의 걸음을 재촉하던 기정과 달래는 익숙한 산길을 타고 할머니의 기도처를 향해 앞서 걸었다. 명수를 닮은 아이는 그저 묵묵히 할망과 도지의 뒤를 바짝 따라 걸었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처럼 아무런 말도 없었다. 도지는 할망을 부축해 걸었지만 할망은 좀처럼 빨리 걷지 못했다. 평생 다녔을 이 길에서 삶의 마지막 힘을 짜내 걷는 것만 같았다.
"할망~ 이렇게 힘든 길을 왜 그렇게까지 다니시나요? 설문대할망을 집에서 모시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도지의 질문에 할망은 가느다랗게 웃으며 말했다.
"도착해서 얘기해 주마. 이젠 달래도 알 건 알아야지. 저 아이도 말이야."
"하지만 달래는……."
도지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박수의 누이, 명수가 환생한 것 같다던 아이가 달래를 대신해 주기를 바랐지만 입으로는 절대 꺼낼 수 없었다. 도지 자신의 어멍은 물론 어멍과 가깝게 지내던 신당 사람들은 할망의 영험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도지는 그저 말없이 걸었다.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
도지의 부축 덕분인지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할망의 굿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서 갔던 기정과 달래는 할망의 조그만 움막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할망의 기도처는 관음사 아래 움푹 안긴 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찾아올 수 없는 곳이다. 할망의 할망, 또 할망의 할망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로는 설문대할망을 모시는 무당과 그 집안사람들을 제외한 누구도 이곳을 찾은 적이 없다. 그런 원칙으로 따지자면 명수를 닮은 아이는 외부인으로서 처음인 것이다.
할망은 전날 올려 두었던 제상을 물리고 새로 가져온 젯상을 차렸다. 젯상이라고 해야 기껏 보리밥에 소주가 전부였다. 할망은 움막의 조그만 창고에서 생선을 꺼내 달라붙었던 벌레 몇 마리를 툭툭 털어낸 후 집에서 가져온 식은 보리밥과 나물로 아이들 밥상을 차렸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에 잠이 깼는지 움막 안에서 기정과 달래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할망은 간단하게 차린 밥상 주위에 둘러앉은 도지와 아이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기도가 할망의 마지막 기도가 될 것 같다. 오늘 할망이 알려주는 거 잘 새겨듣고 앞으로는 저 아이와 달래가 설문대할망을 모셔야 한다."
도지는 겨우 한 술 뜬 보리밥이 사래가 걸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할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는 제주는 설문대할망의 육신이 녹아내린 곳이다."
할망은 서서히 일어서더니 굽었던 허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마치 쓰러졌던 고목이 땅 위에 다시 서는 것만 같았다. 도지는 물론 기정과 달래의 눈에 할망의 굽었던 허리가 펴지는 게 신기하게 보였다. 할망은 하늘 높이 손을 뻗었다가 합장을 하며 뭔가를 읊기 시작했다. 마치 노래인 듯 아닌 듯한 신비한 은율이 있는 이야기였다. 누구도 할머니의 이런 기도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에 할머니의 모습이 마냥 신비로웠다.
나 이제 이 땅에 스며들련다.
이 섬의 흙은 내 살이요,
이 섬의 물은 내 피요,
이 섬의 돌은 내 뼈라.
할망은 세 번이나 반복해 노래를 부르더니 힘이 빠졌는지 섰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란 도지가 할망을 부축하려 했지만 할망은 도지의 손을 제지하며 신비로운 이야기를 읊었다.
설문대는 물장올 호수 속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거인의 몸이 점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자
안개가 피어올라 그 모습을 살포시 휘감아 감춰버렸다.
이때부터 한라산 아흔아홉 골짜기를 흘러내리던 물들은 모두
설문대를 따라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흐르게 되었다.
어머니를 잃은 오백장군은 통곡하며
한라산 곳곳을 헤매며 설문대의 모습을 찾아다니다
굳어져 바위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흘린 뜨거운 눈물 자국에서
해마다 봄이 되면
진달래, 철쭉이 무더기무더기 피어나
한라산을 붉게 물들인다.
할망은 노래 같은 읊조리기를 멈춘 후 명수와 닮은 아이를 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명수다. 넌 원래 명수였다. 명수의 영혼이 네게 닿아 너를 이곳으로 오게 했구나. 설문대할망이 명수를 선택했으니 내가 죽고 나면 명수가 대를 잇는다. 그리고 명수 뒤로는 달래가 잇게 될 거다."
"할망!"
도지가 짧게 소리쳤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망의 눈매가 평소와는 전혀 달리 보였던 것이다. 바다보다 깊은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한편 거친 파도처럼 사납고 무서운 위엄이 녹아 있었다. 도지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도지의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나 또한 명수와 같았고 달래와 같았고 도지 너와 같았다. 네 어멍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할망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설문대할망과 함께 했던 일만 팔천 신들의 현신이다. 앞으로 선문대할망의 오백 아들딸들이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너희들은 제주를 지켜야 하고 선문대할망의 자식들을 모두 지켜내야만 한다. 너희 후대에도 선문대할망을 모시는 후손들이 계승하게 될 것이다."
* 김순이 님 저서인 <제주신화> 의 '제주 창조의 여신 설문대할망'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