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은 설문대할망의 길고 긴 이야기를 쉬지 않고 토해 냈다. 도지는 곧 쓰러질 것 같았던 할망의 말라 비틀어진 노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쏟아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망이 박수의 죽은 누이 이름 '명수'를 말이 없는 아이에게 내려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이는 자기의 이름이 '명수'라는 걸 인정하는 듯했다. 할망의 말처럼 누이 명수의 영혼이 아이에게 내린 게 분명해 보였다. 명수가 된 아이는 할망의 설명을 알아듣고 있는지 할망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쩌면 할망의 대를 잇는 일종의 신내림 같은 의식 같았다. 할망은 삶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지의 눈엔 할망의 피부가 아주 빠르게 늙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명을 불꽃을 태우며 설문대할망을 모시는 무당의 계승작업으로 보였다. 도지가 느꼈던 건 단순히 그렇게 보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실제로 할망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고, 명수가 될 아이가 올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남은 삶을 모조리 당겨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달래 역시 할망의 이야기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물론 도지에게도 할망의 설명이 워낙 신비롭고 재밌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달래가 할망의 뜻에 따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다.
"때가 되면 물장올에 가게 될 일이 있을 게다. 설문대할망의 내림이 있을 것이니 놀라거나 하지 말거라.“
"할망! 물장올엔 어떻게 가나요?"
달래가 물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명수와 달래는 물장올에 녹아내린 선문대할망의 심장을 마시게 될 것이니라!"
방금 전까지 불타오르는 듯했던 할망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심지 끝에 간신히 불씨만 살아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할망은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도지가 달려가 할망을 부축해 안았다. 아이들도 달려와 할망의 팔과 다리를 붙들었다.
"나는 이제야 내 역할을 전부 수행한 모양이다. 잘 자라주어 고맙구나. 잘 키워줘서 고맙다. 도지야. 박수에게는 꿈에서나 보……."
눈가 주름 속에 푹 눌려 잘 보이지는 않았어도 맑고 신성했던 할망의 눈동자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깊은 어둠이 자리 잡았다. 할망은 삶의 자투리를 식구들에게 나눌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달래는 할망이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정도 얼마 버티지 못했고 이어 도지도 눈물을 쏟아냈다.
*
박수는 웃인다라 사람들이 고향집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는 걸 뒤로 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할망이 식구들을 데리고 굿당으로 떠났으니 도지와 아이들은 해가 지기 전에는 내려올 것이었다. 박수는 장사치에게 들었던 얘기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토대로 제주에 큰 사달이 났다고 판단했다. 장사치의 경고처럼 식구들과 몸을 피했다가 상황을 살핀 후 다시 내려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이번에 사다 놓은 식량이 많으니 산에서 식구들을 굶기거나 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박수는 불안함과 자신감이 섞인 마음으로 속도를 높였다.
수확을 한 달 정도 앞둔 보리밭이 봄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녹색 파도가 일렁이며 보릿대가 비벼대는 소리가 평소 같지 않게 느껴졌다. 정겹던 작물과 밭담이 왠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뒤를 돌아보며 걸을 일이 없었던 박수는 불길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뒤를 살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군다나 이맘 때면 농사짓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곳인데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황량함이 불안함을 가중시켰다.
"거기 섯!"
박수는 멀리 뒤쪽에서 들린 명령조의 고함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밭담의 밭담 너머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수는 자세를 낮추고 웃인다라 마을 쪽을 살폈다. 마을 사람들의 행렬 중 일부가 밭담 사이로 보였는데 그들 뒤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군인과 경찰이 섞인 무리였다.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죽창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관덕정에서 보았던 공포스러웠던 순간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도망가는 걸 포기하고 뒤돌아섰고 앞서 가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뛰는 속도를 높였다. 밭담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간헐적으로 보였는데 혼란스러운 그들이 심경이 느껴지는 듯했다. 박수는 가슴을 졸이며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토록 거부해 왔었던 설문대할망에게 그들의 잔혹함을 진정시켜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총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마을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고 군인과 경찰들이 마을 사람들을 잡아 쓰러뜨리고 있었다.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박수에게 빨리 피하라고 조언을 했던 장사치도 가슴팍에 죽창에 찔려 쓰러지는 게 보였다. 앞서 달리던 그의 아내가 뒤돌아 장사치에게 달려오는가 싶더니 군인의 발차기에 나동그라졌고 그녀 등 뒤에 죽창이 꽂히는 게 보였다.
박수는 그 처참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며 분노에 잠겼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찌……. 설문대할망……. 저들을 어떻게 좀 해 보시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