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7-무섭고도 추운 밤

by 루파고

비록 먼발치에서 봤지만 웃인다라 마을 사람들의 아수라 같은 현장이 박수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가족을 데리고 숨어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군인이나 경찰의 눈에 띌 것이 걱정된 박수는 가급적 밭담 아래로 수그린 채로 뛰었다. 몸을 숨길 밭담도 없는 개활지에서는 죽기 살기로 빨리 뛰어 벗어났다. 숲으로 들어선 후에는 대나무 숲을 관통하고 가시덤불 사이를 기었다. 하지만 정작 집에 도착했지만 식구들이 보이지 않자 스멀스멀 불안함 더해졌다. 할망을 따라 기도처에 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선 별의별 상황을 다 그려내고 있었다. 박수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할망의 기도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할망의 기도처까지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대나무 숲을 빠져나온 박수는 할망 주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식구들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다리가 풀린 것이다.

"아~ 그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가시는 길을 못 뵀네요……. 할망!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박수는 할망을 기도처 옆 할망들의 묘 옆에 묻었다. 할망들의 묘에는 돌담이 없었다. 오래전의 할망들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할망도 모른다고 했었다. 대대로 그 많은 할망들이 설문대할망을 모셔왔다면 그녀들의 묘는 수십수백은 될 것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묘의 형태가 흐트러지면 흐트러진 대로 사라져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할망들의 묘는 그저 할망들이 묻힌 곳일 뿐, 누구도 할망을 모시지 않았다. 박수 역시 할망의 어멍의 묘가 무엇인지 몰랐고 묘를 관리하지도 모시지 않았으니 말이다.

박수는 할망을 땅에 묻고도 무릎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은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아 연신 훌쩍였다. 명수가 된 아이는 영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내 훌쩍였다.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두웠다. 빽뺵한 대나무 숲 안에 자리 잡은 기도처는 작은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잔바람에 대나무 잎이 비벼대는 소리가 스산했다. 주인이었던 할망이 사라진 굿당이 전에 알던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할망의 유언과 같은 설명에 따르자면 할망의 다음으로 명수가 굿당의 주인이지만 명수에게선 전혀 그런 기미를 느낄 수 없었다. 굿당은 낮과 밤의 모습이 너무 다른 곳이다. 신이 아니라 귀신이 나올 듯한 분위기다. 도지는 할망이 이런 무서운 공간에서 며칠씩 홀로 기도하며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울다 지친 아이들은 잠이 들었고, 도지는 할망이 쓰던 이불 하나로 세 아이를 덮었다. 도지는 벌써 몸에 한기가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일교차가 커서 해가 지면 꽤 추운 계절이라 이 상태로는 밤을 지새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고사리장마 기간이라 언제 비가 올지 예상할 수 없어 걱정이 됐다. 비가 한 번 시작되면 며칠씩 내리는 편이고 강수량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여보, 우리 집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아요?"

도지가 물었다. 박수는 겨를이 없어 미처 얘기하지 못했던 웃인다라 마을 상황을 도지에게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침울했던 도지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오늘은 추워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으니 부둥켜안고서라도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소.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집에 가서 침구와 먹을 것들을 챙겨서 오겠소. 그나저나 아이들이 잘 버텨줘야 할 텐데……. 할망도 돌아가셔서 아이들도 상심이 클 것인데……."

"그런데 정말 설문대할망이 계시기는 한 건가요? 일본 놈들을 내쫓은 게 얼마 됐다고 이런 지옥 같은 일이 또 생기냔 말이에요. 할망이 계신다면 부디 우리를 굽어 살펴 주세요. 제발~"

도지는 간신히 그쳤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그나저나 대체 왜 이런 사달이 난 것인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구려. 웃인다라 마을에 우리 약초 사주던 장사치 말로는 산에 사는 사람들을 빨갱이라며 무조건 잡아간다고 했소. 하지만 그냥 잡아가는 것도 아니고 다 죽이고 있으니……. 어쨌건 우리도 잠잠해질 때까지는 여기에 지내야 할 것 같소. 그놈들 눈에 띄는 날이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오. 설문대할망이고 자시고 간에 믿을 구석도 없고."

박수의 말에 도지가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긴 설문대할망을 모시는 신성한 기도처예요. 무슨 큰일을 당하려고 그런 험한 말을 해요?"

무당의 딸로 태어나 평생 신을 모시며 살아왔던 도지에겐 박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성함에 경배심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에게 박수의 발언은 신을 모독하는 천벌을 받을 소리였기 때문에 두려움이 배가됐다.

"그 현장을 못 봐서 그렇소. 정말 설문대할망이 있다면……. 아니! 제주도에 그 많은 일만 팔천의 신들 중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게 놔두지는 않았을 거요. 정말……. 일본 놈들보다 더 잔인한 놈들이었소."

박수는 자기도 모르게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그의 두려움은 증오로 변해가고 있었다.

*

무섭도록 길고 추운 밤이었다. 집에서 할망의 기도처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두세 시간 거리에 불과하지만 산중이라 그런지 더욱 추웠다. 아궁이가 없어 불을 땔 수 없는 할망의 움막은 모닥불을 피울 상황도 되지 않았다. 박수와 도지는 겨울에도 며칠씩 기도하던 할망의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할망은 딱히 많이 먹지도,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 매서운 추워를 대체 어떻게 버티며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새 얼마나 떨었던지 새벽녘에 대나무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것만으로도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산중이라 빛이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시간도 가늠할 수 없었다. 박수는 도지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고 집을 향했다. 무릎 관절이 뻑뻑했지만 너무 늦으면 군인과 경찰의 눈에 발각될 수도 있다는 걱정에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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