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벗어나자 박수의 눈에 삼의악오름이 보였다. 다시금 공포의 현장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살육의 행위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멀리서 본 현장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만 같았다. 오름 뒤쪽 먼발치에서 흰 연기가 오름 위를 가득 덮고 있었다. 가끔 큰 산불이 나곤 했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고사리장마가 아직이라 아침저녁으로 축축한 땅에 산불이라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게다가 이번 산불은 규모가 작지 않았다. 박수는 산으로 옮겨붙는 게 아닌가 싶어 심장이 벌렁거렸다.
다시 숲으로 들어서자 주변이 어두워졌다. 아침부터 날이 궂은가 싶었는데 이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집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인데 이른 아침 기온도 낮은 판에 몸까지 젖으니 한기가 뼈까지 닿는 듯했다. 비 덕분에 산불이 번지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안도감은 들었다. 박수는 한기를 잊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비가 오니 모닥불도 땔 수 없는 상황이다. 식구들이 움막 안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계속 비가 내리면 침구들을 챙겨 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가는 길에 죄다 젖을 게 분명했다.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던 박수는 집 근처에서 속도를 줄여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군인이나 경찰이 가까이 있을 수도 있고 자신보다 먼저 집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어디 가도 힘깨나 쓰는 편에 속하는 박수였지만 군인들의 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란 걸 알고 있었다. 박수는 집담 뒤에 붙어 올래 안쪽을 살핀 후 한 걸음 한 걸음 고팡(곡물창고, 광)을 향했다.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박수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쉰 후 지게를 세우고 식량을 바구니에 담아 꽁꽁 묶었다. 지슬, 감저, 육포, 얼마 되지 않는 쌀과 한 가마니의 보리, 한 되 정도 되는 조와 말린 생선들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또 내려오게 될 수도 있겠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올 필요는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두꺼운 옷가지와 침구를 챙겨서 지게 위에 올렸다. 예상보다 부피가 너무 컸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산길을 헤치고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그칠 줄 모르는 비도 문제였다. 박수는 고팡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그칠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비는 하늘의 뜻이긴 하나 신들께서 굽어살피시길……. 굽어살피시길……."
박수는 간절한 마음에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옷가지와 침구가 비에 젖지 않도록 최대한 짐을 다시 싸 보았지만 어떻게 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갈대로 엮은 비막이로 덮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더 이상의 고민보다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박수는 지게를 맸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거웠다. 지팡이가 없다면 걷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박수는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에 머리를 흔들었다. 지게를 지고 문이 작은 고팡을 빠져 나가려는데 멀리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박수는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군인이나 경찰이 왔다면 그야말로 죽음을 앞둔 상황이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경직된 박수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붕을 섥은 갈댓잎을 따라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사이로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비도 오는데 그냥 가세. 아까 보니 살림살이가 그대로인데 절대 도망가거나 한 건 아니야. 이 날씨에 지들이 가봐야 얼마나 가겠나. 내일 일찍 다시 와보자고."
"집 꼬락서니가 곧 돌아올 것 같은데 그냥 여기서 비도 피할 겸 해서 기다려보는 게 어떻겠어? 다시 서로 돌아가 봤자 잡일이나 시키겠지. 그냥 여기서 해 질 무렵까지 버티다 가자고. 아까 고팡에 보니까 먹을 것도 많던데."
박수의 기대와 달리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집을 향해오고 있었다.
"무당집이라 그런지 먹을 게 많은가 봐. 여기 무당 굿빨이 꽤 먹히는 모양이지. 인근 마을에서 이 집보다 곡식이 많은 집은 못 봤지 않나?"
"그러게 말일세. 괜히 이 집 무당 건드려가지고 우리 이상한 저주나 받고 그런 거 아닌지 모르겠네. 사실 그게 좀 걸려서……."
"자네가 먼저 말을 꺼내서 말인데, 솔직히 나도 겁이 좀 나는구먼. 괜히 신 내린 무당한테 걸려서 무슨 저주를 퍼부을지 낸들 아나? 정말 재수 옮붙어서 자네나 나나 집안 식구들이 급사하거나 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그러네."
"에이! 괜히 재수 없는 소릴랑 하지 말어. 자네가 그딴 소리 하니까 온몸에 닭살 돋지 않나? 그렇지 않아도 추워 죽겠는데 말일세."
"우리 그냥 돌아가세. 차라리 서에 가서 개 밥그릇이나 닦는 게 낫지. 괜히 여기서 이상한 걱정이나 하느니 말일세."
"그러세.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내일은 부 순사더러 오라고 하자고. 우린 다른 데 가자고. 여긴 재수 없어서……. 아무튼 여기가 무당집이라는 건 비밀로 하고 말이야."
"전전날 그 애기들이 이쪽으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누구 말인가?"
"삼의악오름 아래에서 사라진 애 둘 있었잖은가?"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이 무당집 애들일 수도 있겠구먼. 이 근처에 사람 사는 집이라곤 여기밖에 없으니. 그나저나 산구석에 이런 집이 있을 거라고 누가 알겠는가? 그 새끼가 죽기 전에 여길 알려줘서 망정이지."
"우리보다 군인 놈들이 먼저 여길 발견했으면 우리는 또 죽도록 맞아 터졌겠지. 아이고~ 상상만 해도 다행이네. 하하하!"
가까워지던 그들의 목소리는 다시 멀어져 갔다. 박수는 신들께 빌어 본 것이 효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할망이 설문대할망의 힘을 얻어 박수 자신과 식구들을 지켜주고 있는 거라고 믿어버렸다. 박수는 그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박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산새 소리도 잡음처럼 느껴졌다. 박수는 빌고 또 빌었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마음이 편했던 자신의 집이 이렇게까지 부담스럽고 두려운 공간이 될 줄은 몰랐다. 낮고 좁은 문을 간신히 빠져나온 박수는 텅텅 빔 고팡 안을 둘러보며 아쉬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