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비에 젖어들기 시작한 침구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버리고 갈 상황도 아니고 가져간다고 해서 침구 본연의 역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날이 맑아지지 않으면 침구를 말릴 재간도 없다. 옷가지라도 안 젖으면 다행인데 이렇게 점점 늦어지면 옷가지도 보장할 수 없다. 박수의 마음은 비에 젖은 지게의 무게에 눌린 걸음보다 무거웠다. 움막에서 떨고 있을 식구들 생각에 힘을 내고 있었지만 전날 아침 이후로 먹은 것도 없고 비에 젖어 체온도 떨어져 기력도 없었다. 박수는 이를 악물고 움막을 향했다.
길은 점점 좁아졌다. 지게 위의 짐들을 꽁꽁 묶긴 했지만 지게 위 상황은 알 수 없었다. 좁은 산길에서 나뭇가지들을 피해 걷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수는 몇 번이나 나동그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지만 우거진 숲이라 빗방울은 줄어들었다. 집에서 한참을 벗어난 박수는 지게를 내리고 짐을 다시 꾸렸다. 식량은 두고 침구만 먼저 옮긴 후 다시 내려와 식량을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상당히 젖긴 했지만 옷가지는 그런대로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박수는 침구와 옷가지만 메고 기도처를 향했다. 짐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으니 속도는 두 배 이상 빨라져야 정상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점점 좁아지는 산길은 속도를 낼 수 없게 했다.
움막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으니 벌써 정오가 넘었다. 마치 할망의 속도만큼이나 더뎠다. 도지가 함께 내려가겠다곤 했지만 박수는 집까지 경찰들이 찾아왔던 걸 떠올리곤 극구 떼어내고 혼자 내려갔다. 박수는 빠른 걸음으로 식량을 내려놓은 곳을 향했다. 마침내 거세던 빗발은 조금씩 그 세를 줄여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후가 변하는 한라산의 변덕스러움이 오늘따라 더욱 까탈스럽게 굴었다. 급기야 비는 완전히 멎었지만 아직도 짙은 구름이 볕을 막았다.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는가 싶더니 박수의 주변은 온통 안개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짙은 안개는 기껏 한 팔 정도 보일까 말까 싶었다. 평생 그 산에서 살았던 박수였지만 손바닥처럼 훤한 길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급기야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물에 젖은 침구까지 메고 올라가던 것보다 느렸다. 발아래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박수는 좌절하고 말았다. 식량 위치를 알 수 없으니 더 이상 내려가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기온이 올라갔다곤 하지만 허기진 탓에 체온이 오르지 않았다. 젖어버린 옷가지는 더 이상 보온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민에 빠진 박수는 용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급격히 떨어진 체력은 복구되려 하지 않았다. 안개는 더욱 심해져 한 팔 거리도 보이지 않았다. 안갯속에 머금은 습기가 박수의 온몸 구석구석 털 한 오라기까지 장악했다. 박수는 시력을 잃는 느낌마저 들었다. 안개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인지 눈이 안 보이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한 말인지, 무슨 말을 했는지 헷갈렸다. 박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곧 온몸이 사시나무보다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목 위에 머리가 달리긴 한 건지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정신은 살아있는 것 같은데 몸은 자기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젠 앉은 건지 선 건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마치 구름 위에 앉은 건가 싶었다.
'신선이 된 것인가?'
박수는 어릴 때 할망이 해준 설문대할망의 제주도 창조 당시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까만 날개를 가진 새가 머릿속에서 빙빙 선회하고 있었다. 새는 까마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결코 까마귀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까마귀의 날갯짓과 다르고 활짝 편 까만 날개의 크기가 독수리보다 컸다. 윤이 나는 깃털은 멀리 솟아오르는 태양의 빛을 모조리 흡수한 것 마냥 강렬한 빛을 발했다.
*
박수야, 그 새 이름이 제주이니라. 훗날 한라산에 살고 있는 까마귀들은 제주의 아이들이고 오백장군의 병사들이다. 박수야. 너는 오백장군 중 하나이고 설문대할망을 지켜야 할 임무가 있다. 할망의 할망, 또 그 위의 할망의 할망들은 모두 오백장군의 비호를 받으며 제주도를 지켜왔단다. 네 누이 명수는 설문대할망을 모시게 될 것이고, 박수 너는 네 누이를 보살펴야 한다. 명심하거라. 네 임무를! 네 하르방도 널 도울 게다.
*
정신을 잃어가던 박수는 돌아가신 할망이 어릴 때부터 해주셨던 이야기를 기억하며 번뜩 정신이 들었다. 명수와 함께 도망치던 그날 이후로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박수는 조금씩 정신이 맑아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정신 문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안개 또한 빠른 속도고 개어가고 있었다. 죽을 정도로 오들 거리던 몸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얼음장 같던 몸에서 조금씩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할망이 말한 하르방을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하르방이 관덕정에서 본 하르방 아닐까 싶었다.
"아! 할망이 아직 내 안에 계시는구나. 할망 고마워요."
박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다시 몸을 폈다. 바닥조차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심하던 안개는 매서운 바람 한 번에 저만치, 다시 불어온 바람 한 번에 또 저만치, 세찬 바람 한 번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안개가 사라지자 박수의 눈에 아까 놓고 간 식량이 보였다. 바로 발치 아래 짐꾸러미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할망이 날 여기다 잡아 두셨구나."
박수는 돌아가신 할망의 신묘함에 다시 놀라고 있었다.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설문대할망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순간이었다.
안개와 함께 산중의 습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한두 시간 지난 후엔 절대 나타날 것 같지 않았던 햇빛이 움막 위를 내리쬐었다. 박수가 움막에 도착했을 땐 젖어버린 침구와 옷가지들이 그새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한라산의 변화무쌍한 기후를 모르지 않았던 그들조차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박수는 도지와 아이들이 걱정할 것이 우려되어 짐을 나르는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았다. 그보다 아까 보았던 경찰들이 움막까지 찾아오게 될까 걱정이었다. 거의 길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길이고 와봤다고 해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지만 세상모를 일이라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박수는 대책 없는 고민에 시름만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