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이 눈을 감기 직전에 당신을 꿈에서 보자고 하시더니 정말 그렇게 하셨네요."
도지는 박수가 잠깐 조는 사이 할망이 나타났다고 돌려 말하는 것을 듣곤 할망의 임종 때 다 마치지 못했던 유언을 전달했다. 박수는 할망이 끝까지 자신을 지켜줬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오백장군의 임무를 다하라던 말은 결국 할망의 유언이었던 것이다. 박수는 누이 명수의 화신이 되어 돌아온 아이를 지켜 설문대할망을 모시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오후에 바짝 해가 들어 뜨거운 햇볕을 내리더니 해가 진 후론 다시 비가 시작됐다. 고사리장마의 비는 매년 비슷하게 고집을 부렸다. 밤이 깊어지며 봄자락 끝에 달랑거리는 매서운 추위가 움막을 공격했다. 오후내 바짝 말린 덕에 보송보송해진 침구는 모두를 곤히 잠들게 했다. 고단했던 박수는 눈을 감나 싶더니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꿈은 다시 이어졌다.
*
거대한 구름이 세상을 뒤덮었지만 그 위로는 역시 파란 하늘이 밝았다. 악마조차도 점령하지 못할 높이였다. 구름 위로는 아까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제주라는 새가 날았다. 새는 백발의 설문대할망을 태운 채 유유히 활공하고 있었다.
"제주야! 네가 원한대로 네가 살 섬을 만들었구나! 어때? 맘에 드느냐?"
설문대할망은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한 달만 기다리자꾸나. 섬이 식으려면 아직 멀었느니라. 원하는 걸 가지려면 기다리는 법도 배워야 하느니라. 조급하게 굴면 네 상상 속의 섬이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할망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들려줬다. 꿈속에서 박수는 생각했다. 그렇게 잊으려 했던 설문대할망에 대한 것들을 왜 잊으려 했었는지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할망이 말했다.
박수야! 제주는 사람이다. 사람이 없는 제주는 제주가 아니다. 설문대할망이 만든 이 섬은 사람이 사는 섬이다. 그분은 이 섬에 악마가 발을 딛지 못하게 하셨다. 어떤 역경이 있어도 버텨내야 한다. 너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오백장군인 네가 설문대할망의 유지를 받아 제주를 구해야 한다. 제주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고랑 없는 밭이 없고 계곡 없는 산이 없다. 기복 없는 인생 없고 파도 없는 바다 없다. 이 땅은 그런 역사를 품고 있다. 네 조상들은 이 땅에 어떤 변고가 발생해도 어떻게든 지켜냈다. 박수 너도 이제 네 임무를 수행할 때가 왔느니라. 내 말을 명심하고 선문대할망과 제주를 지켜야 한다.
*
박수는 할망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움막 안은 자기 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하고 한겨울의 밤처럼 싸늘했다. 거센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원래 살던 세상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식구들이 안전하다는 건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평화로웠다. 박수는 할망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 할망은 유언대로 그의 꿈을 찾아온 것이다.
산중 움막 생활이 일주일 정도 지나자 두려움으로 긴장되었던 마음은 점차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할망의 죽음으로 인한 빈 공간도 이젠 거의 익숙해져 버렸다. 밤마다 할망을 찾아 흥얼거리던 달래도 명수와 시간을 보내며 안정을 찾았다. 고사리장마도 끝나가는지 이젠 비도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커서 안개가 심하긴 했지만 움막을 가둔 대나무숲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길을 잃거나 할 걱정할 일은 없었다. 긴장감이 풀어지자 좁아터진 기도처는 식구들을 갑갑하게 했다. 비록 산중이지만 해는 조금씩 길어지는 걸 알 수 있었고 날씨는 평온했다. 박수도 살던 집이 그리워졌다.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딱히 하는 일도 없어 무료하기만 했다. 게다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드는 식량을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박수는 도지와 상의 끝에 집을 다녀오기로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챙겨 나오지 못했던 식량들과 부족한 가재도구를 가져와야 했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 해도 주변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점검할 필요도 있었다. 박수는 빈 지게를 지고 좁은 산길을 헤치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온 지 얼마 되었다고 길을 더욱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 사이 내린 비 때문인지 숲 속의 나무와 풀들이 길게 자라 길은 더욱 길 같지 않았다. 이십 년 이상 수없이 오간 박수가 아니라면 그게 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누군가의 눈엔 그저 멧돼지나 노루 같은 들짐승들이 오가는 통로 정도이다. 명수는 외부인의 침입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거란 생각에 안도했다.
수풀 사이에서 노루, 고라니, 까마귀, 까치, 산비둘기 등 동물들이 낸 소리에 깜짝 놀라기를 여러 번. 한 시간이 조금 넘어 드디어 그의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한참을 주변의 동태를 살핀 박수는 긴장을 풀고 올래를 통과해 곧장 안거리를 향했다. 할망과 아이들이 쓰던 밖거리를 지나던 박수는 할망에 대한 그리움이 마구 솟구쳐오르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할망이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안거리 안으로 들어간 박수는 움막 생활에 필요하다 싶은 것들과 도지가 부탁한 물건을 챙겨 나와 밖거리 문을 열었다.
"헉!"
박수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할망의 침구 위에 웬 할망이 두 아이를 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박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방 안을 살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의 할망은 아니었다. 두 아이들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할망 옆에 누운 채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박수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했다. 아이 하나가 몸을 뒤치락거렸다. 모두 살아있었다. 바닥을 만져보니 온기가 없었다. 아궁이에 불도 지피지 못한 상태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가 조금씩 다가서는 걸 느꼈는지 죽은 듯 자던 할망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고 박수에게 뾰족한 걸 들이밀었다. 날이 무딘 칼이었다. 칼을 예상하진 않았지만 경계심을 풀지 않았던 박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누구시오!"
할망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그쳤다.
"여긴 제 집이오만, 할망이야말로 누구시오?"
"그럼 당신은 여기 무당의 손자 맞소?"
할망은 박수를 알아보는 듯햇다. 박수는 자신을 알아보는 할망에게 의문이 생겼다. 근처 마을 사람들과도 거의 왕래가 없던 자신을 알아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할망은 나를 아시오?"
"아는 건 아니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우리 어릴 적에 무당집에 몇 번 왔었소. 이 집은 아직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할망의 말에 박수는 새로운 걱정이 밀려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망도 이곳을 안다면 군인과 경찰이 또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게다가 일주일 전이긴 했어도 그날 왔던 자들이 또 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대체 내 집엔 어쩐 일로 왔소? 혹시 군인들 피해서 온 것이오?"
"우리는 어우눌에서 왔소. 그놈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갔소. 난 아이들과 나물 캐러 들에 나간 덕에 간신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는데 이 녀석들 아방과 어멍도 모두 죽고 말았소. 삼춘은 그 지옥 같은 모습을 못 봤겠지만 지금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있소."
할망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박수가 그 잔인한 현장을 보지 못했다면 할망이 설명하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두 아이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 눈을 비볐다. 아직 어려서 이런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껏 잘해야 달래 정도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었다.
"나도 잔인한 현장을 목격해서 잘 알고 있소. 그런데 할망은 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들진 않았소?"
박수의 질문에 할망은 목이 메었는지 콜록거리다 입을 열었다.
"군인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해가 진 후에만 움직였는데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여기까지 이틀이나 걸렸소. 배가 고파 고팡에 있는 걸 좀 꺼내 먹었으니 이해해 주시오. 그리고 말인데."
그때였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어떤 자가 소리쳤다.
"여기 빨갱이 쥐새끼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