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1-평화도 잠시뿐

by 루파고

박수는 덜컹 내려앉은 심장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심장에 커다란 쇳덩이가 자리 잡은 것처럼 경직이 왔다. 두려웠다. 잔혹했던 현장 한복판에 자신이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도지와 아이들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할망의 유지도 스쳤다. 아직 이불속에서 앉아 있던 할망의 눈빛은 심하게 떨렸고 심지어 두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여린 할망이 마을 사람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으니 공포의 무게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할망은 박수를 위협하려 손에 쥐었던 칼을 놓지 않았다. 박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얌전하게 있으라고 말한 뒤 할망의 칼을 자신의 손으로 옮겨 쥐었다. 얼마나 많은 군인과 경찰이 올 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빨리 집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었다. 박수는 아귀가 맞지 않은 문틈 사이로 바깥 상황을 살폈다. 키가 작고 마른 남자가 죽창 하나를 쥐고 돌담 뒤를 지키고 있었다. 집 뒤로는 약초 캐러 다니던 산길이 있지만 당장 그의 눈에 띄지 않고 집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박수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숨을 골라 쉬었다.

"에라!"

박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문을 박차고 나섰다. 커다란 박수의 체구를 보고 놀란 남자가 몇 걸음 뒤로 옮기는 게 보였다. 박수는 기선제압을 했다고 생각했다.

"당신 뭐야?"

박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는 작았어도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했다.

"이……. 이……. 빨갱이 새끼!"

박수는 그가 겁을 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를 향해 몇 걸음 옮기자 그는 계속 뒷걸음쳤다.

"난 빨갱이가 아니다. 왜 남의 집에서 행패인가?"

"시끄럽다! 내 동료들이 오면 넌 죽은 목숨이다. 어디 한번 까불어 봐라!"

박수는 그의 말대로 호각 소리를 듣고 군인과 경찰들이 온다면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거란 생각에 그에게 그저 위협 정도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박수는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깡마른 남자는 박수보다 잽싼 몸놀림을 부렸다. 그는 죽창으로 박수를 위협하며 박수를 피해 이리저리 피했다.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란 걸 박수는 알고 있었다. 박수는 집담 돌틈 사이에 쑤셔 넣었던 호미 두 개를 꺼낸 후 있는 힘껏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불발이었다. 두 번째 호미도 마저 던졌지만 그 역시 피하고 말았다. 박수는 집담을 발로 차서 무너뜨린 뒤 주먹 만한 돌을 주워 던졌다. 세 개째 던진 돌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고 배를 잡고 쓰러진 틈을 타 달려든 박수는 발로 그의 머리를 걷어찼다. 짧은 비명을 지른 그는 뒤로 나동그라졌고 기절을 했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박수는 왼손에 쥔 칼을 오른손으로 옮기며 무딘 칼날을 보았다. 그를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살려두면 후환이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수는 뒤로 자빠진 채 거품을 물고 있는 남자를 살피다 죽이기를 포기하고 할망과 아이들이 있는 밖거리를 보았다. 할망은 벌써 떠날 채비를 했는지 양손으로 아이들 손을 잡은 채 도망칠 자세였다.

"할망! 빨리 떠납시다. 따라 오시오."

박수는 마을로 이어진 오솔길 너머 인적을 살핀 후 할망에게 집을 나서라며 고갯짓을 했다. 할망은 주섬주섬 치맛단을 속곳에 쑤셔 넣은 뒤 아이들과 함께 올래를 나섰다. 박수는 기도처 움막 방향으로 들어섰고 할망도 그를 따랐다. 기껏 두어 발자국 걸었을까, 박수는 등 뒤에서 할망의 짧고 낮은 비명소리를 들었다. 쓰러졌던 남자가 할망의 등에 죽창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박수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달려가 목에 칼을 찔렀고 그 역시 피를 토하며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 역시 몇 초 버티지 못한 채 숨이 멎었다. 너무 놀란 아이들은 울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박수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놀랍고 두려웠다. 침착함을 되찾은 박수는 상황파악을 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을 향해 뛰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빨리 집을 벗어나야 했다. 조금만 달리면 절대 길이라고 볼 수 없는 정도로 수풀이 우거진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박수의 손에 딸려 뛰던 아이들은 숨을 몰아 쉬느라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었다.

*

좁아터진 움막엔 식구가 일곱이나 됐다. 할망을 잃은 두 아이들은 며칠이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얼마 전 할망을 잃은 아픔을 겪었던 기정과 달래가 두 아이들을 보듬었다. 박수와 도지의 눈엔 어린 자식들이 대견하게 보였다. 명수가 된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말을 잃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명수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의젓해 보이는가 싶었는데 박수를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도지는 이상하게 명수에게 질투가 느껴졌다. 남편 박수를 빼앗길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강박증이 생긴 것이다. 이를 눈치챈 박수는 누이 명수와 일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번이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젊은 날의 방랑의 시간들과 그 험난했던 모험적인 경험들 그리고 명수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지……. 도지는 명수가 된 아이에게 누이 명수의 혼령이 깃들어 남매간의 애정이 발현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명수의 눈길은 전과 달리 애잔하게 보였다.

아이가 둘 늘어나니 식량은 눈에 띄게 줄어갔다. 이대로라면 한 주 이상 버티기는 것도 어려웠다. 박수는 집에서 사람을 죽인 후로 꿈마다 사람을 죽였다. 비록 꿈이지만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관덕정에서 봤던 군인도 그의 손에 죽었다. 할망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전달된 날이 무딘 칼은 그의 호신용 칼이 되었다. 박수는 활을 만들고 화살을 깎았다. 당장은 산짐승을 잡을 생각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박수는 기정을 데리고 관음사 위쪽 계곡으로 향했다. 아무리 큰 비가 와도 물을 삼켜버리는 계곡이지만 군데군데 물이 솟는 샘이 있어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오는 짐승들이 있었다. 한라산 구석구석 먹을 수 있는 버섯도 제법 많은 편이다. 게다가 알뜨르(아래쪽 들판)에는 철이 지났지만 웃뜨르(위쪽 들판)엔 두릅도 이제 한창이었다. 오랜 세월 숲에서 지낸 박수는 숲에 의지하기로 했다.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몰라도 박수는 숲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런 상황이 겨울까지 지속되지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수가 놓은 덫에 노루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노루 한 마리면 며칠은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된다. 어차피 보관이 어려워서 일부는 육포를 만들고 빨리 해치워야 한다. 움막이 발각되는 게 걱정되어 마음 편히 불을 쓸 수 없었다. 밤이 되지 않으면 불을 쓸 수 없었다. 박수와 도지는 매사에 조심하고 조심했지만 세상은 그들은 편히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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