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2-목숨과 바꾼 아이들

by 루파고

취나물을 뜯던 기정은 숲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도 기정을 본 것이다. 박수와 기정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숲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녀서 일대 지리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위협이 없어서 긴장이 풀린 기정은 박수와 멀리 떨어진 곳까지 벗어나 있었다. 기정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군인인지 경찰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들과 기정은 이상한 대치 관계에 놓였다.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아방의 설명으로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 처했는데 막상 아방이 보이지 않으니 두려움이 일었다.

사람들 중 두 명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무와 조릿대 사이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곤 있지만 수풀을 헤치는 소리는 적막했던 숲 속 분위기를 깼다. 그들도 느꼈는지 행동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기정의 심장은 콩닥콩닥 죽을 맛이었다. 부디 아방이 자기를 데리러 와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아방은 오지 않았다. 한창 어떤 산짐승과 대치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풀 속에 몸을 감췄던 사람들이 기정 반대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기정은 그들이 군인이나 경찰은 아니라고 단정을 지었다. 그들이 기정에게 겁을 먹을 리가 없을 테니까. 잠시 후 그 사람들 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고 뭔가 다투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굵은 나무기둥 사이로 박수의 모습이 보였다. 놀란 기정은 아방을 구하겠다며 사람들 무리를 향해 달렸다. 곶(가시덤불)이 많아 피부가 쓸리고 곶에 찔리기도 했지만 기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방을 잃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사람들 무리에 가까워지자 기정의 걱정이 사라졌다. 아방이 사람들을 모두 제압한 상황이었다. 무리의 사람들은 기정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피난을 온 행색이었다. 더군다나 짐보따리도 하나 없이 모두들 빈손이었다. 어른 다섯에 아이가 여섯이나 됐다. 어른들 중 남자는 겨우 두 명밖에 없었다. 나이는 많지 않지만 대체로 피곤함에 절어 보였다.

"기정아, 이리 오려무나."

박수가 기정을 곁으로 불렀다.

"저도 같은 입장입니다. 우리 가족도 군인과 경찰을 피해 숲으로 숨어 살고 있습니다."

박수의 말에 경계심을 풀었는지 그에게 제압되었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행색으로 봐도 군인이나 경찰일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어떻게 이 깊은 산중까지 오셨는지……. 대단하십니다. 보아 하니 짐도 없는 것 같은데 아무리 날이 풀렸다고 해도 여긴 해가 지면 겨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박수가 사람들을 앉혀 놓고 물었다.

"사실 우리는 관음사에 숨어 있다가 도망쳐 나온 상황입니다.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마을에서 가져온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관음사에서 이불 보따리 하나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던 남자가 말했다.

"그럼 대체 앞으로 어쩌려고……."

박수는 말을 하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부터 가끔씩 들려오던 비행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게 보일 정도라 얼마나 낮게 비행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한동안 마음이 편해졌는데 돌연 불안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관음사로 피난을 왔는데 스님들은 대수롭지 않게 우리를 받아주더이다. 스님들에게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몰라도 우리처럼 산에 사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일명 '소탕하라'는 명령이 돌고 있다며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관음사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경찰이 들이닥쳤고 스님들은 우리를 지켜주려 목숨까지……."

그는 말을 하다 흐느끼기 시작했다.

"스님 세 분이 경찰의 죽창에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스님은 우리를 관음사 뒤로 난 샛길로 피할 수 있게 했고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그의 표정은 간에 병이 든 사람보다 어두웠다.

"우리를 좀 살려주시구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 모두 손을 모으며 박수에게 매달렸다. 그들의 모습을 본 박수의 마음이 동요했지만 좁은 움막은 이미 누워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사람이 많아지면 군인이나 경찰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질 게 분명해 그들을 도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더불어 없던 고민도 생겼다. 자꾸 사람들이 산으로 모여들면 당연히 군인과 경찰이 몰려들 것이고, 아무리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식구들의 목숨을 위태로울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방금 하늘 위로 날아간 비행기만 해도 위협적이었다. 아무리 우거진 대나무숲 안에 있다 하더라도 하늘 위에서 낮게 날면 볼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도 살아야 하니 그건 도와드릴 수 없소."

박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박수의 표정을 살피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우린 이제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처사께 부탁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만이라도 살 수 있게,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관음사로 돌아가 자수하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해도 상관없습니다."

박수는 불교도인 듯한 말투를 쓰는 사람의 말을 듣곤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받아들여 줄 수도 없지만 그들이 자처하여 목숨을 내놓겠다 하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잡혀야 아이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들인 지금도 우리를 찾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더 많은 스님이 죽임을 당했거나 고초를 겪고 있을 것 같아서 우리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부디 저희 아이들 만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보아하니 처사님 가족은 숲에서 먹고사는 건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니 저희도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저희 목숨을 바쳐서라도 처사님의 존재를 감추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 모두 합장하며 박수에게 머리를 숙였다. 박수는 미칠 노릇이었다. 솔직히 산중 생활에서 먹고사는 데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곡식도 떨어진 지 오래라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은 부탁한다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합장하던 이들 중 두 명이 박수의 바짓단을 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박수가 잔혹한 만행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부탁을 뿌리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총을 쏘고 죽창을 찔러 죽이던 살육의 현장이 머릿속에 가득하니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 같이 살 길을 찾아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산이 좁은 것도 아니고……."

박수는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다. 움막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그들이 숨어 살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우리가 도망쳐 나올 때 경찰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 둘에 여자 셋이 숨었다고 했으니 아이들 존재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만 잡혀주면 아이들은 무사할 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스님들을 죽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과 표정은 단호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아이들은 떼를 쓰거나 울며 불며 부모를 붙들고 늘어졌다. 참담하고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박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식의 목숨을 보전하려는 마음과 깊은 불심이 그들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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