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4-웃인다라 피난행렬

by 루파고

박수는 다음날 아침 해가 밝자마자 근처 마을들을 살펴보러 떠났고, 할망은 도지와 아이들을 데리고 할망의 굿당으로 떠났다. 도지는 할망에게 며칠 쉬었다 가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할망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길을 재촉했다. 할망의 굿당까지는 아이들 걸음으로도 겨우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할망의 걸음은 세월이 좀 먹느냐는 식으로 느리기만 했다. 명수를 닮은 아이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아직까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망은 아이가 영혼을 상실한 상태라고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묵묵히 할망을 따랐다. 도지는 할망의 말처럼 설문대할망이 무당을 계승할 아이를 보낸 게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절대 거역할 수 없다던 달래의 운명을 아이를 통해 바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기도 했다.

도지 또한 박수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도지는 다른 무당의 딸인데 그녀의 어멍은 어느 날 대뜸 박수와 결혼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내쫓았다. 다행히 정 많은 박수와 사랑에 빠졌고 두 아이를 낳았다. 딸은 낳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도지 역시 무당의 딸로 태어나 무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막상 달래를 낳고 보니 아이가 커서 할망을 뒤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처참했다. 자신의 운명은 박수와의 결혼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달래의 삶도 평범하게 바꿀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마침 새로운 아이가 달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이다.

박수는 죽성큰가름 옆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이라 상황은 비슷할 거라고 짐작하곤 있었다. 죽성새장밧과 죽성새가름 마을은 어귀부터 죽성큰가름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을 입구부터 엉망진창이었다. 온갖 가재도구가 무너진 돌담과 엉켜 나뒹굴고 있었다. 역시 사람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죽성큰가름과 달리 여러 곳에서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처 세 마을이 모두 초토화된 것이다.

박수는 사람 냄새나던 마을이 며칠 사이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린 걸 보며 암담한 심경이었다. 다시 걸음을 옮겨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웃인다라 마을로 향했다. 웃인다라 마을엔 박수의 산야초 등을 구입해 주는 장사치가 한 명 살고 있었다. 아주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물건을 가지고 가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인근 주민들과 소통하며 지낸 편이 아니어서 그 사람 정도면 박수에겐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인지 웃인다라 마을 근처에 접어들자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웃인다라 마을에는 피해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소 급하고 두려움이 가득해 보였다. 속도를 올렸던 박수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게 변했다. 마을 진입로에 접한 밭담 뒤에 몸을 숨긴 박수는 마을 안쪽 동태를 살폈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매우 분주해 보였다. 부부끼리 다투는 소리도 들렸다.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부모들의 모습을 살피는 아이도 있었다. 박수는 자세를 낮추고 마을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와 알고 지내던 장사치의 집은 마을 첫 집이다. 박수는 바쁘게 움직이는 장사치를 확인하고 열린 올래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장사치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접니다. 무당집 박수!"

장사치는 박수를 보며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왜 그러시오? 대체 내 얼굴을 잊기라도 했소?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놀라고 그럽니까?"

사색이었던 장사치의 얼굴이 조금씩 혈색을 찾는 게 보였다.

"박수 자네는 아직 모르고 있나 보군. 죽성 마을 소식을 듣지 못했나?"

"그렇지 않아도 죽성 들렀다가 오는 길입니다. 어제도 갔었고 말입니다. 혹시 형님 마을에도 변고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 와 봤습니다."

박수는 관덕정에서부터 있었던 일련의 이야기들을 장사치에게 설명했다.

"그렇다면 자네도 빨리 짐 챙겨서 식구들하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게. 우리도 숲으로 떠날 참이네."

"대체 왜 그러신단 말입니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서 도망을 간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지금 군인과 경찰들이 산골에 사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있다고 하네. 산에 사는 사람들을 죄다 빨갱이라고 한다더구만. 들어본 적은 있는가? 저 아래쪽 마을은 벌써 흉흉한 소식이 들리고 있네. 어제는 장에 갔다가 돌아오던 양 씨가 아무 이유도 없이 군인들에게 잡혀 갔다네. 마냥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죽는 것보다 잠잠해질 때까지 한라산 근처 깊은 숲에 숨어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게 맞다 싶어서 다들 짐을 챙기는 중이네. 아무튼 군소리 말고 자네도 빨리 숨는 게 좋을 걸게. 특히나 자네처럼 따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고 들었네. 그리고 말이야. 양 씨와 같이 잡혀갈 뻔했다가 돌아온 부 씨가 그러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지 별도봉 근처 바닷가엔 시신이 둥둥 떠다닌다고 하네. 일본 놈들보다 더 악마 같은 놈들이야."

장사치의 말에 박수는 할망이 일본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올 거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대체 빨갱이가 뭐랍니까? 그리고 그놈들이 대체 누구랍니까?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사람들을 마구 죽인답니까?"

"잘 모르겠지만 부 씨 말로는 하얀 놈도 있고 까만 놈도 있고 한데 덩치가 멧돼지보다 크다고 하네. 육지것들도 있다고 하네. 그놈들 뒤엔 우리 경찰들이 총과 죽창을 들고 따라다닌다고 하더구먼. 아무튼 우리에게 그런 불행이 닥치기 전에 빨리 마을을 떠나는 게 상책 아니겠나. 아무튼 난 짐 챙겨야 하니 자네도 빨리 떠나게."

박수는 장사치가 바쁘다며 등을 떠미는 통에 마을을 떠났다. 마을을 떠나 밭담 몇 개를 지나 뒤돌아보니 벌써 흑소를 앞장 세우고 마을을 떠나는 행렬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고향과 집을 버리고 숲으로 도망을 가는 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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