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막을 둘러싼 대나무숲에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언뜻 봐도 열 마리는 충분히 넘었다. 가끔 한두 마리가 날아든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까마귀들이 온 건 처음이다. 적어도 박수와 가족들이 움막에 살기 시작한 후로는 그랬다. 박수는 사냥을 공치고 돌아와 활과 화살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까마귀라도 잡아야 하나 싶었다. 할망은 까마귀를 설문대할망의 새의 후손들이라며 신성시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라 까마귀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막상 할망이 해줬던 이야기들이 머리를 스치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할망은 까마귀를 길조라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기분 나쁜 눈빛을 가진 까만 깃털의 까마귀는 딱히 정이 가지 않았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까마귀를 재수 없는 새로 취급했다. 박수가 일본을 유랑하던 시절, 일본인들도 까마귀를 길조라 하기에 할망과 비슷한 신을 모시나 싶었었다. 기정과 달래는 까마귀를 좋아했다. 박수는 할망 탓이려니 생각했다. 해가 저물었지만 까마귀들은 오래도록 움막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움막 근처에 먹을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까마귀는 움막 주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까마귀는 식구가 더 불어났고 여기저기 둥지를 짓느라 수시로 드나들었다. 까마귀가 둥지를 트는 모습이 신기한지 아이들은 까마귀 주변에서 맴돌았다. 까마귀는 아이들을 겁내지 않았다. 녀석들은 아이들을 무시하고 묵묵히 둥지 트는 일에 열중이었다. 박수가 사냥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까마귀는 아예 정착을 한 걸 알 수 있었다. 여차하면 알도 품을 기세로 보였다.
다음 날엔 운이 좋아 큰 숫노루 한 마리를 잡았는데 노루의 내장과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부위는 몽땅 까마귀들 차지가 됐다. 원치 않았지만 이상한 공생 관계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까마귀들과 어렵지 않게 친해졌고 며칠 사이에 오래 알았던 관계처럼 지냈다. 박수나 도지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
음력으로 날짜가 어떻게 되었는지 박수는 기억하지 못했다. 약초를 하러 다닐 땐 계절과 절기에 따라 나는 약초가 달라서 날을 셈하며 살았었다. 이제는 더우면 여름이고 쌀쌀하니 가을이고 곧 추워지면 겨울이겠거니 하며 살았다. 게다가 숲은 집터보다 기온이 더 낮아 날짜를 가늠하기가 더 어려웠다. 박수는 곧 겨울이 닥치면 여느 겨울보다 더 춥고 배고픈 겨울이 될 거라는 생각에 다시 숲을 나왔다.
숲을 벗어나자 날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을 하늘이 높다는 생각도 오랜만에 해볼 수 있었다. 박수는 경찰에게 잡힐 게 두려웠지만 웃인다라 마을의 하르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래도 말을 섞은 적이 있으니 처음 보는 사람보다는 맘이 편했다. 그런데 마을 주변 상황이 또 돌변해 있었다. 지슬밭은 잡초가 함께 마구 자랐고 수확할 시기가 지났지만 땅을 건드린 흔적조차 없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박수는 또 밭담에 붙어 몸을 낮춰 걸었다. 웃인다라 마을로 들어가니 다행히 하르방의 집에 인기척이 있었다. 박수는 집담 구석에 몸을 숨긴 채 하르방이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르방, 안녕하셨습니까?"
한참이 지나서야 안거리에서 나오는 하르방을 발견한 박수가 낮게 인사했다.
"무당집 아들. 또 왔는가? 빨리 이리 들어오게."
전과 달리 놀란 표정을 지은 하르방은 박수를 안거리 문 안으로 들였다. 하르방은 주변을 살핀 후 문을 닫았다.
"자네, 소식 못 들었나? 어쩌자고 나온 건가?"
"하르방,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번엔 이제 별일 없다고 하셔서……."
"상황이 변했네.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 같은 산간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네. 우리 마을 사람들도 전부 짐을 싸서 아래쪽 마을로 내려갔어."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박수를 보며 하르방이 설명을 붙였다.
"산에 사는 사람들을 폭도라고 하더군. 저번엔 빨갱이라고 하더니 말이야. 저쪽 마을 얘기를 들었는데 빨갱이랑 붙어먹었다면서 마을 사람들을 죄다 죽였다고 하더군."
놀라운 소식이긴 한데 박수는 이제 그런 일이 무섭지도 않았다.
"하르방은 왜 안 내려가시고요."
"난 포기했네. 죽으라면 죽어야지. 내가 앞으로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집 떠나서 사는 게 사람 사는 건가? 밑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거기서 뭘 해서 먹고살 수나 있겠나."
"그래도 친척이나 친구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박수의 말에 하르방의 눈에 습기가 차는 게 보였다.
"다 죽었어. 전부 다. 내 아들 내외하고 손주까지 전부 죽었어. 내 아들을 폭도라고 하더군. 아들이 폭도라서 식구들도 폭도라며 모두 죽였다더군. 친척들은 우리 가족들과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다네. 어울리기만 해도 폭도로 몰아서 죽여버린다고 하는데 내가 어딜 가겠나. 그냥 여기서 총에 맞든 죽창에 맞든 죽어야 끝나지."
"그러면, 하르방……. 차라리 저와 함께 숲으로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하르방은 박수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됐네. 나 같은 늙은이는 짐이나 되고 밥이나 축내지. 차라리 죽는 게 속이 편할 것 같네. 내가 용기가 없어서 혼자 못 죽는 것일 뿐이야. 자식과 손주까지 전부 죽었는데 앞으로 내가 무슨 희망으로 산단 말인가? 아무튼 자네는 빨리 숲으로 돌아가게."
하르방은 박수를 고팡으로 데려가 지슬(감자), 감저(고구마), 옥수수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보리와 콩을 자루에 담아 지게까지 내어 주었다. 하르방은 자신이 겨울을 날 양식을 박수에 준 것이다. 하르방은 이미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빨리 가게. 괜히 그놈들 눈에 띄면 쓸데없이 목숨만 날아가네. 자네 식구들 잘 챙기고 꼭 이 위기를 버텨내야지. 세상이 바뀔 때가 오겠지."
하르방은 눈물을 훔치며 박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는 젊지 않은가? 아직 살 날이 더 많으니 꼭 용기 잃지 말게."
고마운 마음에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박수를 보며 하르방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박수의 등을 밀었다. 박수는 웃인다라 마을을 떠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르방은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