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6-본향당신과 까마귀

by 루파고

"할망이 본향당신을 내리셨다!"

박수와 도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실어증에 걸린 줄 알았던 명수가 처음으로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목소리가 아닌 듯했다. 역시 할망이 내린 신이 들린 게 확실했다.

"명수 네가 말을 하다니.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정말?"

하지만 명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일 뿐이었다. 다시 입을 다문 것이다. 그저 평소처럼 고갯짓으로 그렇다, 아니다 표현만 했다.

"본향당신이라면 설문대할망을 돕는 수호신 말이냐?"

박수의 질문에 명수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할망이 보내셨다고 그러시더냐?"

"우리 할망이 말이냐?"

"우리를 지켜주시겠다고 말이냐?"

명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박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본향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소? 무엇으로라도 변신할 수 있는 수호신 말이오."

"그럼요. 우리 어멍이 모시던 영등할망과 비교해도 절대 우위를 논할 수 없다는 신이시잖아요."

"대체 뭘 어떻게 하셨다는 건지……. 명수가 말을 한 것도 신기하지만 어떻게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닫을 수 있는 것인지……."

박수는 답답하기만 했다. 본향당은 제주 어느 마을에 가도 있지만 그들 움막엔 본향당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본향당신을 보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망은 그가 어릴 때 본향당신의 신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본향당신은 팽나무나 바위 같은 마을의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마을의 아주 사사로운 것까지 관여할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영험함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각 마을의 본향당에 그들만의 본향당신을 모신다고 했다. 박수는 차라리 한라산신을 내려주어 위험할 때 군인과 경찰들에게 안개를 뿜어주거나, 영등신을 내려 바람으로 날려버리거나, 북두칠성을 내려 뱀을 풀거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할망이 내린 본향당신이 누군지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군인이 경고했던 대로 대나무숲이 뚫린 하늘 위에 비행기가 몇 바퀴 돌더니 다음날 움막 옆에 둥지를 틀었던 까마귀들이 요란하게 울었다. 잠시 후 멀리 숲 입구에서부터 날아든 까마귀를 시작으로 하늘을 뒤엎을 듯이 모여들었다.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무리였다. 한라산에 사는 까마귀를 모두 모아놓은 것만 같았다. 박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군인 역시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박수는 군인에게 물었다.

"어쩌면 좋겠소?"

박수로서는 기댈 곳이 군인밖에 없었다.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지만 며칠간 그와의 여러 대화를 통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박수 식구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꼭 그렇게라도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할망이 보낸 본향당신 까마귀들이 돕는다고 하지만 대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제가 저들 몰래 숨었다가 일부러 몸을 보이고 동쪽으로 유인하겠습니다."

군인에게서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뛸 수 있겠소?"

"다리야 멀쩡하지 않습니까?"

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움막에서 도망친다고 한들 피신할 만한 마땅한 곳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군인과 경찰을 피해 도망친다고 해도 숲에서 얼마나 멀리 도망칠 것이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밤이 되면 추워서 아이들이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대책이 없소. 대책이……."

박수는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너무 답답했다. 죽음의 공포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밀려왔다. 군인이 제 몸을 희생하겠다고 했지만 그래봤자 시간을 조금 벌어두는 정도였다. 군인도 잡히면 총살을 당할 거란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다.

"해가 진 후엔 경찰들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박수는 군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소?"

"춥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라산의 밤이 얼마나 춥고 어두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군인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들이나 박수 가족들이나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몇 발의 총소리가 들리더니 곧 엄청나게 많은 총소리가 이어졌다. 까마귀는 총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했다. 정상적인 까마귀라면 총소리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날았을 것이다. 대나무숲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박수는 본향당신의 까마귀들이 군인과 경찰들을 공격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소리와 까마귀 우는 소리가 세상을 흔들었다.

한참을 이어지던 총소리가 조금씩 잠잠해지더니 긴 호각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곧 새까맣게 하늘을 덮었던 까마귀들이 숲 속으로 흩어져 숨었다. 움막 근처에 둥지를 텄던 까마귀들도 모두 돌아왔다.

"저 녀석들이 수호신이었구나……."

박수와 식구들은 까마귀에게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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