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에서의 생활은 의외로 금세 익숙해졌다. 우려했던 대로 불을 쓰는 게 문제였지만 굴 안쪽에도 외부와 연결된 곳이 있는지 연기가 잘 빠져나갔다. 박수는 중석과 함께 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땔감을 구했다. 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구덩이를 파서 오물을 붓고 흙과 나뭇잎을 넣었다.
그들이 용암굴로 이주한 후 며칠은 잠잠한가 싶더니 자주 눈이 내렸다. 눈발은 굵었고 굴 밖은 폭설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눈이 많이 오면 군인과 경찰이 활동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다.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간헐적으로 들렸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하늘 위로 날아가는 미군 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굴 속은 불을 때서 훈기가 돌았다. 그것도 밤에나 가능한 일이었기에 낮에는 추위에 떨어야 했다. 용암이 스치고 지나갔을 굴 벽은 불이 이글거리며 무시무시한 빛을 냈다. 식구들이 뿜은 숨이 벽에 달라붙어 물이 되어 흘렀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윗쪽 통로에선 눈이 녹아 흘러내렸다. 침구와 옷가지는 습기를 먹어 축축해했다. 눈이나 그쳐야 숲을 뚫고 들어오는 볕을 찾아 말리거나 하겠지만 그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눈 위로 발자국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굴 속엔 온갖 찌릉내, 나무 탄내 등 각종 냄새가 섞여 역겨웠다. 이젠 맘껏 사냥도 다닐 수 없어서 식량 걱정이 심했다. 하루가 다르게 식량이 줄어드는 게 보였다.
*
폭설이 내린 뒤 이틀째 강추위가 지속됐다. 아이들은 추위 외엔 딱히 걱정이 없어 보였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직접적인 충격을 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도 따랐고 본향당신의 도움일지도 모르는 까마귀 도움 덕분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박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굴 속 생활은 밤보다 낮이 더 고통스러웠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부는가 싶으면 온몸에 칼날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얼음칼이 뼈를 베고 지나가는 듯했다. 정오 무렵 해가 바짝 뜨자 동굴 속 온도 역시 조금은 높아졌다. 도지는 발가락 끝이 얼어 수시로 발가락을 문지르고 있었다. 감각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식량도 거의 바닥이 나고 있어서 양을 많이 줄였는데 앞으로 며칠 후면 아예 굶어야 할 상황이 됐다. 박수는 중석과 기정을 데리고 굴 밖으로 나섰다. 눈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지만 표면이 얼어 걷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여기저기 노루와 멧돼지 발자국이 보였다. 두 사람은 다리가 짧아 빨리 달릴 수 없는 멧돼지를 잡기 위해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 도중에도 다른 동물들의 많은 흔적을 봤지만 오로지 한 놈만 잡으려는 목표로 끝까지 추적했다. 맛있는 멧돼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너무 추적에 집중한 탓에 얼마나 멀리까지 이동했는지 전혀 의식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다니다 크게 꺼진 계곡 안쪽으로 접어들었고 눈이 허리 이상으로 빠졌다. 그리고 더 아래쪽으로 멧돼지로 보이는 동물이 보였다.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얼어 죽은 게 분명했다. 눈이 너무 깊어 기정을 위에 두고 박수와 중석이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멧돼지는 꽁꽁 얼어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덩치가 큰지 계곡 위로 옮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중석은 박수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중석은 박수의 생각을 읽었는지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두 사람은 칼을 꺼내 멧돼지 다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얼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가죽을 잘라내자 넓적다리 근육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칼질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눈 위로 떨어진 멧돼지의 빨간 피가 흥건했다. 왠지 무섭다는 느낌을 받은 두 사람은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박수는 여태까지 살아있는 산짐승을 잡으면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왠지 모를 위기가 예지된 것이다. 두 사람은 허벅지 위쪽까지 자른 멧돼지 다리 네 개를 지팡이 삼아 경사진 계곡을 올랐다. 멧돼지 사체와 그들이 기어올라온 계곡이 마치 학살터처럼 느껴졌다. 기정은 두 사람을 도와 멧돼지가 얼어 죽었던 계곡 위로 눈을 퍼서 던졌다.
"오늘 이 정도면 아이들이 오랜만에 포식을 하겠구먼.“
박수가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면 며칠은 굶어도 되겠는데요.“
"에이~ 농담도. 아무리 배가 불러도 굶는 건 좀 그렇네. 어쨌거나 멧돼지가 얼어죽은 덕에 우리가 살겠구먼.“
박수의 농담에 박수와 중석이 크게 웃었다.
돌아가는 길은 자신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되었다. 눈을 퍼서 발자국을 없애려 해도 노력에 비해 잘 감춰지지 않았다. 갈 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어 시간 정도 걸려서야 익숙한 지형지물이 눈에 띄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동굴이다. 안도감이 느껴진 박수가 가는 한숨을 내쉬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들렸다. 도지였다. 까마귀 몇 마리가 총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저번처럼 까마귀 떼가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천지를 흔들었고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세 사람은 멧돼지 다리를 던지고 그들이 머물던 굴 쪽으로 달렸다. 불안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도지의 비명소리로 봐선 군인에게 죽임을 당했을 거란 원치 않는 결론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필 남자들이 없을 때 사달이 난 것이다. 박수와 중석이 맨 앞을 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체력이 바닥났던 기정은 두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져 갔다.
굴 입구에는 무장한 군인과 경찰들이 열 명 넘게 포진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뒤에서 달려오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 호각을 불고 소리쳤다.
"저기도 있다!"
경찰은 박수와 중석의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호각소리에 놀란 군인과 경찰들이 총부리를 박수와 중석에게 겨누었다. 그들은 경고 한 번 없이 마구 총질을 해댔다. 산 속에 있는 민간인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이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이마 정중앙에 총알이 박힌 중석은 뛰어가던 속도 그대로 눈 위에 나동그라졌다. 박수는 팔이 뚫려 나갔고 복부에도 총알이 두어 발 박혀 쓰러졌다. 비명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죽었다. 군인 한 명이 쓰러진 박수에게 달려들어 머리에 총을 쐈다. 이미 목숨을 잃은 박수의 뇌에서 하얀 뇌수를 터져 나왔다. 뒤따라 달려오던 기정은 놀라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공포스러웠다. 그저 아방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한동안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딸꾹질이 시작됐다. 기정은 주변의 눈덩이를 집어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어쩐지 남자가 왜 안 보이나 했네. 굴 속을 샅샅이 뒤져! "
"넵!"
부대장인 듯한 군인 장교의 명령에 젊은 경찰 두 명이 좁은 굴 속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 동굴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굴 속으로 들어갔던 경찰이 여자 아이 셋을 끌고 나왔다. 아이들은 물론 두 경찰 모두 창백한 표정이었다. 달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성인 여자 하나, 여자 아이 하나, 남자 아이 다섯 모두 즉사했습니다."
"뭐야? 남자는 더 없어?"
"네. 구석구석 찾아봤는데 성인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럼 근처 어딘가 있겠네. 이 깊은 산중에 남자 두 명이 저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챙겨? 말도 안 되지."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두 경찰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살육의 현장에 직접 가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절대 자의가 아니었다. 그들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뭘 어떻게 해? 다 죽여!“
"그래도 그건!"
"빨갱이 죽이는 데 사정을 두지 말라는 지시 못 받았어?"
"아이들이 무슨 죄입니까?"
경찰의 대꾸에 군인이 권총을 꺼내 경찰의 이마에 밀어 넣었다.
"안 그러면 네가 죽어. 쏴? 어떻게 할래? 내가 쏠까?"
경찰은 하체를 벌벌 떨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경찰이 나섰다.
"그래! 똑바로들 해.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수고들 해!"
장교는 대수롭지 않은 듯 명령한 뒤 굴 입구를 벗어났다. 주변엔 경찰 몇 명이 굴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살아서 굴 밖으로 나온 여자아이 셋은 벌벌 떨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이 죽을 거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두 경찰이 머뭇거리는 걸 보던 군인 중 한 명이 고개를 흔들더니 아이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경찰들은 아이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색이 되어 이를 갈고 있었다.
"병신 같은 것들! 그 핏덩이 하나 처리를 못해?"
아이들은 겁에 질린 표정 그대로 즉사했다. 아이들이 흘린 뜨거운 선홍의 피는 깊게 쌓였던 하얀 눈을 녹이며 한라산 대지까지 닿았다. 심장은 멎었지만 피는 계속 흘러 나왔다. 가끔 꿈틀거림을 보이던 아이의 시신도 금세 멈추고 말았다.
기정은 젊은 경찰들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그들 말대로라면 여자 아이 한 명이 부족했다. 기정은 부디 달래가 살아있기를 바랐다. 다른 아이들의 죽음도 괴롭지만 달래가 우선이었다. 기정이 그렇게 바란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될 수는 없겠지만 기정은 할망에게 부탁하고 설문대할망과 한라산신과 자신이 아는 모든 신께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