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댓글로 인한 자살과 살인사건이 이어지는 미스터리 소설 <차도살인>
이 소설의 제목은 <차도살인>입니다.
빌려온 칼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죠.
당신의 악성 댓글 한 줄로 영혼을 살해당한 누군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이 소설은 <촌철살인> 과 <차도살인>을 미스터리로 구성했습니다.
언젠가 출판되리라는 기대를... ㅎㅎ 안되면 POD라도 가야죠.
몇 출판사에 투고했는데 답변이 오려나 모르겠습니다.
<송유리>
이 사건은 결국 미제사건으로 갈무리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건 현황판으로 쓰고 있는 대형 글라스에는 지난 2년간 추적해왔던 사건의 전말이 담겨 있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끝이 보일 듯 말 듯했던 사건을 정리하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 들면서도 뭔가 놓치고 지나간 것이 있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답답하다. 방금 똑딱이 디카를 꺼내 현황판을 몇 장 찍어 두었다. 어떤 것은 확대해서 찍어 두기도 했다. 내가 이 직업을 가진 후 맡은 사건이 벌써 거의 백여 건은 되는 것 같다. 여태까지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머리를 아프게 만든 사건은 없었다. 내가 이 사건을 맡게 되자 선배들은 사건을 절대로 마무리 짓지 못할 것이라고들 했었고 역시 나는 선배들이 우려했던 대로 이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마무리하게 되었다. 프로파일러라는 경력에 있어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 있겠지만 내 판단으로는 여기서 끝내는 게 옳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건 단 한 마디의 말 때문이다.
『흉터는 누군가가 같은 상처를 입지 않게 하려는 흔적이다. 그 누군가는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고등학생 때 할아버지께서 해 주셨던 이 말이 갑자기 기억난 거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사랑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에 힘들어하던 나에게 할아버지가 해 주신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조언이었다. 당시에는 전혀 기억에 담아 두지 않았었는데 왜 지금에 와서야 이 말이 기억났는지 모르겠다. 남자 친구와의 이별로 생겼을 내 상처는 이미 아물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왜 그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랑에 눈을 떴고 아픔에 성숙해졌다. 흉터라는 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만들고 지나가야만 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흉터는 그다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일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지도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것은 내가 죽기보다 싫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도 이제는 잘 안다. 그래서 나는 흉터를 그냥 드러내고 살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내가 이 사건을 덮어버리는 이유다. 물론 어떤 것도 정답일 수는 없다. 모든 건 내 안의 틀 속에서 판단하는 극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종국엔 이 사건이 대중에게 회자되더라도 모두 그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나는 갑 티슈를 몇 장 북북 뽑아내 현황판에 기록된 사건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제 디카 속에 남겨 둔 사진을 지우느냐 마느냐 만이 내게 남은 마지막 선택이다.
오늘은 2015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다.
<1년 8개월 전, 2014년 6월 5일>
“야! 송유리! 또 터졌다!”
뜯어질 듯 문을 차고 들어온 사람은 정연중 선배다. 이번엔 또 뭘까? 정선배는 뭔가 꽂히면 다른 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집요한 성격의 남자다. 우리 프로파일러들의 세계에서는 해결사로 인정을 받는 프로 중의 프로라고 할 수 있다. 정선배는 성격이 유한 것 같지만 화라도 내는 상황이 되면 주변에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누구도 정선배의 성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선배의 그런 모습을 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저 소문이란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정선배가 이번에 꽂혀 있는 사건은 살인사건이다. 게다가 정선배는 연쇄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정선배는 그저 감이 온다면서 확증이나 물증도 없이 연쇄살인사건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야~ 이거 봐. 이거! 이거! 이것도~”
정선배는 벌써 내 어깨에 팔을 올려 두고 있다. 정선배의 담배냄새가 메스껍다.
“정선배! 이건 성희롱이에요! 담배냄새 정말 싫다니까요!”
나는 언제나처럼 짜증부터 냈다. 정선배는 나하고 띠동갑이 훨씬 넘는 나이차가 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대화가 제법 되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선배는 무슨 일만 있으면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 주는 편이다. 정선배는 들은 척도 않고 내 어깨에서 팔을 풀더니 서류들이 쌓여 있는 테이블 위의 자투리 공간에 사진들을 펼쳤다.
“유리야! 이거 봐~ 딱 봐도 연쇄살인이야. 확실해!”
정선배는 흐뭇하다는 표정이다.
“선배! 정말 이게 뭐예요. 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예요? 내가 봤을 땐 전혀 공통점이 없어요.”
나는 사진을 훑어보고는 흥미 없다는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해 주었다. 하지만 정선배는 그런 내 표정에는 관심도 없다.
“선배니~임~ 저 바쁘거든요! 제발 좀 살려 주세요!”
나는 정선배의 등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이번엔 정선배가 힘을 주고 버틴다. 어째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다. 정말일까? 나는 정선배의 예사롭지 않은 대응에 벌써 그의 주장을 믿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뭐예요~ 정말!”
나는 힘을 풀고 정선배가 가져온 사진을 살펴보았다. 열댓 장의 사진들 중 열 장은 이미 지난 두 사건에서 보았던 것이라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나는 처음 보는 다른 다섯 장의 사진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사진만으로는 도저히 연상되는 것이 없었다.
“알겠냐?”
정선배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희끗한 새치가 돋보인다.
“알긴 뭘 알아요? 내 눈엔 그냥 전부 다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 외에 공통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모르겠네요!”
나는 툴툴거리듯 말을 뱉어냈다. 그런데 정선배의 얼굴은 그저 즐겁기만 한 표정이다.
“네가 본 게 맞아.”
“뭐라고요? 제가 뭐라고 했길래요?”
방금 내가 했던 말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어떤 의미도 없었다. 정선배는 내 표정이 재미있는지 더 골려 먹을 심산인 것 같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징조를 알고 있다.
“이 사건. 네가 맡아라!”
설마 했지만 정선배는 또 내게 사건을 인계하려는 중이다. 물론 절차상 아직 인계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인계한 것이나 다름없다.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정선배의 말대로 이 사건은 연쇄살인사건이 확실한 거다. 정선배는 절대로 허튼소리를 하는 성향의 사람이 아니다.
“알았어요. 그럼~ 자세한 설명 좀 해줘 봐요!”
정선배는 이미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침을 튀기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 질 무렵의 길게 누운 햇살은 정선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침들을 아주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흡사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 같다.
“자~ 이거 봐! 여기 이 사람들은 피살된 거고, 이 쪽은 자살했어. 물론 너도 알 거야. 그게 공통점이야.”
그게 공통점이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정선배는 이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내 표정을 살핀다.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또 퀴즈를 내는 것처럼 슬슬 약을 올리려고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물론 나는 단호하게 관심 없는 척을 해야 했지만 정선배는 언제나 내 표정과 심리에 대해서는 귀신처럼 꿰뚫고 있다. 나는 정선배에게 있어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 뭐!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천상 정선배에게 술을 사야 하고 밤늦게까지 놀아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히든카드를 얻을 수 있다.
“세상에~ 그게 공통점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걸 보고 이 사람들이 자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 맞아! 그런데 말이야. 이 사진들도 좀 봐라.”
정선배는 다시 열 장의 사진을 테이블의 빈 공간에 한 장씩 펴 놓았다. 역시 또 다른 망자들의 사진이다. 내 눈에는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보인다. 단지,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 내려놓은 열 장의 사진에 있는 두 명의 시신은 공통점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긴 하다는 것이다. 나는 역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연기했다. 그래야만 정선배는 신이 나서 침을 튀길 것이니까.
“이게 말이지. 아직 뉴스에는 내보내지 않았는데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에게 당한 걸 수도 있어. 물론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그런데 앞의 세 사람과 지금 이 두 사람이 무슨 관계래요?”
내 생각에는 지금 내가 던진 질문의 답은 오늘 저녁 술자리에서나 나올 것 같다.
“관계? 그래~ 관계가 없지는 않지! 그게 뭘까?”
“어차피…… 알았어요. 또 한 잔 사면 되잖아요. 오늘은 또 뭘 드실 거예요?”
나는 이미 정선배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다. 뻔할 뻔자 노가리에 생맥주다. 통풍 때문에 무릎 관절이 쑤신다는 사람이 통풍에 그토록 치명적이라는 맥주를 끊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정선배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설파해왔다. 그까짓 통풍 때문에 먹는 즐거움을 버릴 수는 없다고 말이다.
“어쭈! 내가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너한테 술이나 얻어먹을 것 같아서 그러겠냐?”
정선배는 싱글벙글한 표정이다. 그렇다면 선배는 이번에 두 가지의 문제를 풀었다는 거다.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다’는 말처럼 정선배의 설명을 듣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겠지만 그는 분명 몇일일지 몇 주일지 모르는 긴 시간 동안 조사하고 고민하며 이 사건에 죽도록 매달려 있었을 거다.
“그래요! 그럼. 이건 제가 뭐하고 바꿔야 하는 거죠?”
“글쎄! 음~ 그건 이따가 고민하고~”
정선배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인심 썼다. 너한테 제일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건 하나만 넘겨!”
역시 정선배다운 대답이다. 정선배는 다른 선배들과는 좀 다른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 다른 것도 좀 다른 게 아니고 완전히 다르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모두들 실적을 쌓고 승진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정선배는 프로파일러라는 일 자체를 즐기는 것 같은 사람이다. 오죽하면 미제사건이란 미제사건은 대부분 정선배가 끌어안고 살고 있다. 지금 이 사건 역시 미제사건, 아니 거의 영구미제사건으로 분류될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미제사건이 아니다. 왜냐 하면 정선배가 해결책이 될지도 모르는 사건의 실마리를 찾은 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 사건을 인수해서 조금만 더 파헤치면 될 것이다.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거의 포기상태에 빠진 사건이 하나 있어요. 더 이상 의심이 가는 증거들이 나타나질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뭔지 말씀해 보세요.”
나는 테이블 위에 쌓인 서류 중 하나를 찾아 정선배에게 넘겨주었다. 벌써부터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다.
“그래! 고맙다. 우리 유리가 또 선배를 이렇게 고생시켜 주는구나.”
정선배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벌써 재미있는 사건 하나를 구한 것처럼 즐거워 보인다.
“거~ 참말로. 뜸 들이지 말고 말이나 해 봐요!”
나는 또 정선배를 닦달했다.
“그래. 쉽게 설명해 주지. 자~ 먼저 보여 준 피살자들을 날짜 순으로 알파벳 ⓐⓑⓒ라고 생각하자고. 그리고 나중에 보여준 두 명도 역시 날짜 순으로…… 아니지! 다른 순으로 ①②로 보자고. 나도 여태까지 이렇게 분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공통점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이렇게 분류를 해 놓고도 처음에는 ①②가 ⓐⓑⓒ사건과 연결고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와 ①, ⓑ와 ②는 관계가 있어. ⓒ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고 말이야. 그렇게 설정을 해 놓고 나니까 ③이라는 사건이 곧 발생할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됐어. 여기까지가 내가 밝혀 낸 사실이야.”
정선배의 자세한 설명을 들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역시 정선배는 미제사건으로 남을 것이 거의 확실했던 세 개의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두 사건을 엉뚱하게 연결해 낸 것이다. 정선배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사건들이 이상한 조합으로 연계되어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선배! 그런데 왜 또 실마리를 찾은 사건을 제게 준다는 건가요? 어차피 선배가 조금만 더 나서면 해결될 일을 저한테 가져다주는 이유가 뭐예요? 고맙긴 하지만 원래 선배 실적인데……”
물론 이건 내 진심이다. 선배는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다. 물론 대단한 사건들은 없었지만 말이다.
“글쎄. 음~”
정선배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듯 창 밖을 내다봤다. 물론 밖에는 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말이지. 그냥 유리 니가 진짜 후배 같아서 그래. 진짜 프로파일러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너는 외압에 견딜 수 있는 놈 같아서지. 뭐 별건 없어. 아무튼 인마! 줄 때 잘 받아먹어. 앞으로 내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더 버티겠냐? 그때까지 새싹을 키우는 게 내 목표니까. 신경 쓰지 마!”
정선배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나도 대충은 알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는 이 직업을 때려 칠 생각을 했었을 정도로 큰 충격이 있었던 것까지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내게 외압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이겠지. 아마도 정선배는 외압에 의해 정확한 수사를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선배! 그런데 왜 하필 ⓐ와 ①이고 ⓑ와 ②라는 거죠? ⓐ와 ②가 될 수도 있고 ⓑ와 ①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도 처음에는 이 사건들에서 어떤 정황이나 증거도 없고 살인 동기도 보이지 않았어. 너도 지난번에 봐서 알겠지만 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도 공통점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었거든. 그런데 ⓐ와 ①, ⓑ와 ②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인터넷을 통해서야. ⓐ는 ①과, ⓑ는 ②와 각각 같은 게시물에서 발견했어. 현재까지는 그게 유일한 공통점이야. 내가 그거 찾아내느라고 며칠 밤낮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이 나이에 인터넷이나 뒤지고 있으니까 우리 애들이 나를 신기하게 보더라고. 작은놈은 내가 야동이라도 찾는 줄 알고 어떻게 검색하는 건지 직접 가르쳐 주려고 하더라니까.”
“선배 아들은 꽤 기특하긴 하네요. 아빠에게 야동 검색하는 방법을 다 가르쳐 주려고 하다니~ 큭큭”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외골수에 골통 같은 부분에 있어 아빠를 꼭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그런데 말이야. 유리 너는 ⓐ와 ①, ⓑ와 ②가 인터넷에서 어떤 식으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겠냐?”
“글쎄요! 그게 이따 맥주값인가요?”
“아니! 그 정도 가지고 얻어먹을 수는 없고. 다른 게 있어. 엉뚱하긴 하지만 ⓐ와 ①은 스타워즈 때문에 싸우기 시작했고, ⓑ와 ②는 여자 문제로 싸우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는 모두 여자였잖아. ①과 ②는 모두 남자였어. 그런 것도 공통점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 게다가 아직까지는 없었지만 ③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역시 남자라면 이 가설은 설득력이 높아지는 거야. 아직 뭔지 알 순 없지만 이런 형태의 살인사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어. ①과 ②는 자살로 결론이 났는데 아무래도 ①은 ⓐ를 죽이고 자살했고, ②는 ⓑ를 죽인 후 자살한 것이지 싶어. 그렇다면 ⓒ는 이미 피살됐으니까 곧 ③이 자살한 채 발견이 되겠지. 그렇다면 이 사건들은 상당히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거야. ⓒ와 ③의 인터넷 속 논쟁만 찾아낸다면 이 사건들은 말이지…… 인터넷 댓글 싸움이 살인까지 이어졌다고 봐도 되는 거야.”
정말 정선배는 피살과 자살 사건을 아이러니하게 연결시켰고 입증 가능한 가설을 만들어 내었다. 정선배 말대로 ③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정선배의 논리는 설득력이 충분하다. 정선배와 나는 순식간에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다시 빠져나오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나의 역할만이 남은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선배는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고 정선배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때까지는 내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이 사건을 마무리하면 언제나처럼 이렇게 새로운 사건 하나를 들고 쳐들어 올 것이다.
“유리야. 이따 퇴근 후에 정문 앞에서 보자. 지갑 빵빵하게 채워서 나와~”
정선배는 행여라도 내가 붙잡을 것도 아닌데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는 또 다른 사건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다.
“쳇! 기껏해야 몇만 원치 밖에 못 마시면서 뭔 놈의 지갑 타령~”
나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잣말을 했다.
*
4시 10분. 이제 곧 퇴근이다. 나는 책상에 걸터앉아 작업 테이블 위를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없었던 서류 뭉치가 있다. 정선배가 놓고 간 것이 분명하다. 분명히 들어올 땐 보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일부러 숨겨서 가지고 들어온 것 같다. 그런데 정선배는 어떻게 ⓐⓑⓒ가 같은 류의 사건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미처 물어보지 못한 부분이다. 그래~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
느릿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시간 약속만큼은 칼 같은 정선배에게 농담으로라도 늦었단 소리를 듣기는 싫다. 신참 때 동기 녀석이 정선배에게 신랄한 언어폭력에 맞아서 죽을 뻔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런 문제로 정선배의 눈 밖에 날 필요는 없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는 게 건강에 좋다는 게 동기들이 내놓은 결론이었다. 후다닥 업무를 정리하고 정문에 나서니 역시나 정선배는 정문 앞에 비석처럼 서 있다. 손에는 우산 두 개가 들려있다. 웬 우산? 하늘을 보니 우중충하긴 하지만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다.
*
“선배! 우산까지 챙기셨네요?”
“내가 비 맞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거 모르냐?”
정선배는 오히려 내가 모르는 것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어디 가실 건가요? 거기?”
나는 정선배가 가는 술집들은 모두 꿰고 있다. 어차피 그곳들 중 하나일 건데 물어보는 내가 더 웃긴다.
“글쎄다. 따라와~”
정선배는 유연한 팔자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그저 선배니까 망정이지 남자로서는 그다지 매력이 없는 스타일이다. 제법 착한 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당기지 않는 남자다. 언니가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멋대로인 데다 잘 꾸미지도 않고 제 딴엔 재미있게 말하려는 것은 알지만 북극 추위도 정선배의 입담에는 대적할 수 없을 정도다. 말은 제법 서울 말씨를 쓰고 있지만 원체 뼛속까지 부산 사람이라 억양은 오리지널 경상도 사투리다. 그게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하긴 그래도 진정성 하나만큼은 인정해야겠지 싶다. 어? 그런데 벌써 선배가 다니던 후줄근한 동네 호프는 모두 지나쳐 버렸다. 새로운 명당을 하나 발견했나? 별일이다. 새로운 걸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선배. 혹시 다른 데 구해뒀어요?”
“왜? 나는 맨날 다니던 데만 가라는 법 있냐? 따라와! 짜샤~”
“그러죠. 뭐!”
괜히 불안해진다. 이번에는 정말 비싼 거 사달라는 건가? 아무래도 지갑을 두둑이 챙겨 오라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한정식? 정선배가 찾아 들어가는 곳은 얼마 전 새로 오픈한 고급 식당이다.
“선배!”
나도 모르게 꽥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선배는 뒤돌아 보며 씩 웃어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은 완전히 후배 등쳐 드실 작정이구나.
“예약석이요.”
정선배는 벌써부터 예약까지 해 두고 내게 거래를 한 거다.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아무튼 저 인간 머릿속에는 구렁이가 백 마리는 들어 있을 거다.
“어느 분 성함으로 예약되어 있나요?”
식당 프런트의 직원이 꽤나 고급지게 생겼다. 나는 언젠가부터 사람을 뜯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생전 팔자에도 없던 주역에 사주팔자까지 찾아볼 정도가 되었으니 이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은 배움에 끝이 없다.
“손용주로 예약되어 있을 겁니다.”
손용주? 처음 듣는 이름인데. 우리 회사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선배! 누구 있다는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이건 반칙인데~”
“야야~ 걱정하지 마. 내가 살게. 너는 약속대로 이따 맥주나 사. 인마! 쪼잔하게 이런 거 가지고 하늘 같은 선배 밥 한 끼 사주는 걸 걱정하고 그러냐?”
정선배는 농담으로 던지는 말이지만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다. 사실 난 스스로 정말 쪼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가끔씩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괜히 신경질이 나곤 했다. 직원의 안내대로 구석에 있는 룸에 들었다. 새로 인테리어 공사를 한 곳이라 그런지 목재며 벽지에서 화공약품 냄새가 진하게 난다. 예전엔 이런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이젠 직업병이 된 것 같다. 자잘한 것들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인간 자체가 자잘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쪼잔해진 걸 거다. 그나저나 손용주라는 사람은 또 뭔가. 정선배는 이런 식으로 기습적으로 누굴 소개한다던가 할 성격의 소유자는 아닌데.
“처음 뵙겠습니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리던 남자에게 인사했다. 민머리다. 그 때문인지 대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뭐야? 이 둘은 내가 동석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잖아?
“뭐야? 얼른 앉지 않고.”
정선배는 멀뚱하게 서 있는 나를 깨웠다. 아니! 잠시 자리를 떠나 있던 내 정신머리를 불러온 거다. 나는 정선배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이런 건 내 체질이 아닌데. 뭐야? 정선배! 갑자기 짜증이 나려고 하네. 그래도 매너는 지켜줘야지. 젠장~
“설마 했더니 연중이형님이 말씀을 안 하셨나 보네요. 저는 손용주라고 합니다. 표정을 보니 제가 불청객이 된 것 같습니다만, 저 역시 오늘 반 강제로 끌려온 겁니다. 탓하실 거라면 연중이형님에게 하십시오. 분위기를 보니 제가 혼이 나야 할 상황 같은데 그렇다면 저는 일 도와주고 뺨 맞는 격입니다.”
빡빡머리지만 목소리는 괜찮은 편이네. 대체 정체가 뭐야? 나이는 차이가…… 차이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정선배는 왜 말도 않고 저렇게 멀뚱멀뚱 앉아있는 거지? 보아하니 업무적인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괜히 엉뚱한 자리만 만들어 놓고서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성격상 뒤로 꿍한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정선배한테 화가 좀 나네요.”
정선배에게 들으라며 말을 하긴 했지만 정선배는 그냥 웃어넘기고 만다. 대체 뭐지? 이 애매한 분위기는……
“이미 형님한테 유리씨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제가……”
손용주는 내게 뭔가 말을 하려는데 정선배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끊었다.
“내가 설명해 줄게.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건 미안하고, 내가 네 진짜 성격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렇게 무례한 자리를 만들었다. 내일부터 네가 하는 일에 도움을 주실 분이야. 알고 있겠지만 우리 능력으로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분류하는 게 쉽지는 않잖아. 이 친구는 내 후배인데 유리 널 도와줄 거야. 물론 여태까지 나온 자료 역시 이 친구가 도와줘서 해낸 거야. 이 친구 아니었으면 ⓐ와 ①, ⓑ와 ②, ⓒ와 ③의 개념이 나오지도 못했을 거라고.”
“그렇다면 이번 사건 해결하는데 이 분이 저를 돕는다는 건가요?”
“그렇지. 잘들 해봐. 이번 사건은 용주 도움 없이는 쉽지 않을 거야.”
정선배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탔다는 거다.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아깐 실례했습니다.”
빡빡머리에게 목례하여 사과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초장부터 신경질이나 부린 꼴이네. 진작 말이나 해 주지. 하여튼~
“음~ 그래. 그렇게 인사는 하고 용주에 대해 좀 설명해주지. 이 친구는 웹프로그래머 출신의 CEO야. 지금은 보안솔루션과 빅데이터 전문가로 있어. 그 바닥에서는 인맥도 제법 넓어. 이번 일은 이 친구 도움이 꼭 필요하지.”
뭐야? 생긴 것 같지 않게 꽤 인텔리네?
“그런데…… 왜 우리 일을 돕는 거죠?”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무리 선배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우리 일을 도울 이유가 무엇일까 싶다. 물론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CEO라면 자기 본업도 바쁠 텐데 말이다.
“글쎄요. 서로 상부상조한다고나 할까요? 제가 준비하는 논문을 선배가 도와주고 있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연중이형님과 이 일을 하게 된 건 아니고요. 다른 선배 통해서 연결이 된 겁니다. 연중이 형님이 제게 도움을 요청하신 거죠. 연중이형님이 제시한 대상은 생각보다 재미있을 것 같았고 제가 이 사건들을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데 있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요즘 빅데이터가 대세죠. 제 차기 주력사업이기도 합니다. 누적된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제대로 써먹자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 제가 쓸데없는 소릴 했네요. 죄송합니다. 직업병이라!”
손용주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 같다. 자기 일에 자부심도 강한 것 같고. 어쨌든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도와준다고 하니 정말 도움이 되긴 하겠구나. 정선배의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비가 새까맣게 온다.
<2014년 6월 11일>
환영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③의 사건이 발생했다. 정선배가 예견했던 대로 역시 자살사건이다. 게다가 남자다. 정선배의 가설이 얼추 들어맞는다고 봐야 한다. 물론 손용주씨에게 ③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와 ③에게서 정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공통점이 나온다면 추리와 가설은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재조사해야 한다. ⓐⓑⓒ, ①②③에 대해 모두 정리했다.
# 사건 ⓐ
성명 : 김종선
성별 : 여
연령 : 36
학력 : 대학원 (전공 : 경제학)
직업 : 가정주부 (전업주부)
경제 수준 : 상
거주지 :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출생지 : 서울
가족상황 : 1남 1녀
혈액형 : B
# 사건 ⓑ
성명 : 이영주
성별 : 여
연령 : 21
학력 : 대학교 2년
직업 : 학생, 커피숍 아르바이트
경제 수준 : 중
거주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출생지 : 용인
가족상황 : 부, 남동생 1
혈액형 : A
# 사건 ⓒ
성명 : 윤윤경
성별 : 여
연령 : 19
학력 : 고등학교 3학년
직업 : 학생 (모범생)
경제 수준 : 중
거주지 : 대구시 동구 지묘동
출생지 : 부산
가족상황 : 부, 모
혈액형 : O
# 사건 ①
성명 : 안용한
성별 : 남
연령 : 17
학력 : 고등학교 1학년
직업 : 학생
경제 수준 : 상
거주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출생지 : 서울
가족상황 : 모
혈액형 : A
# 사건 ②
성명 : 임현규
성별 : 남
연령 : 47
학력 : 대졸
직업 : 회사원 (대기업 중견 간부)
경제 수준 : 중
거주지 : 인천시 동구 송현동
출생지 : 수원
가족상황 : 처, 2남 1녀
혈액형 : AB
# 사건 ③
성명 : 정동규
성별 : 남
연령 : 51
학력 : 고졸
직업 : 자영업
경제 수준 : 상
거주지 : 경상북도 김천시 부곡중앙길(부곡동)
출생지 : 대구
가족상황 : 이혼
혈액형 : A
역시 정선배가 알려준 것을 제외하고 딱히 눈에 띄는 공통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정선배의 말에 의하면 인터넷 속 논쟁 때문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논쟁이 심했다고 할지라도 살인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질 수 있는 걸까? 지난번 정선배가 남겨 두었던 서류에 기록되어 있는 블로그를 열었다. 우선 ①이 게시한 『I AM YOUR FATHER』다. 안용한이라는 피해자이자 피의자는 스타워즈 광팬 같다. 벌써부터 개봉을 앞둔 7번째 스타워즈에 기대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안용한은 팬의 수준을 넘어 스타워즈 신봉자 수준이다. 스타워즈에 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듯, 그의 블로그에는 온갖 스타워즈 이야기와 스타워즈 캐릭터 그리고 각종 용품, 피규어, 사진 등으로 가득하다. 조지 루카스 감독에 있어서는 아버지 급으로 모시다시피 한 상태 같다. 하긴 제다이라는 동양적인 설정은 충분히 매력적이긴 하다. 안용한은 그저 스타워즈뿐만 아니라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배우들에게도 관심이 많다. 오비완의 스승 콰이곤 진을 연기했던 리암 니슨, 오비완 케노비를 연기했던 이완 맥그리거, 스타워즈의 최고 인기 캐릭터였던 한 솔로 역의 해리슨 포드, 최고위 제다이 마스터인 메이스 윈두 역을 맡았던 사무엘 잭슨 등 주요 인물부터 로봇인 R2D2 역을 맡았던 소인 배우 케니 베이커까지 블로그에는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배우들을 거의 빠짐없이 정리했다. 영화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반가운 이름들이긴 하다. 특히 안용한의 블로그에는 스타워즈라는 영화가 동양적인 사상에 기반에 만들어진 것이라며 더욱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공중부양은 기본이고 예지력과 염동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동양적인 멘트를 쏟아내는 콰이곤 진, 오비완, 스카이워커 등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사제관계 등에 대해 기술한 것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나는 안용한의 글을 보면서 마스터 요다는 누가 연기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의 블로그에는 마스터 요다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내 기억에 정말 이색적이고 멋진 스승의 캐릭터였는데 말이다.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 해리슨 포드나 사무엘 잭슨, 리암 니슨의 젊을 때 모습이 흥미롭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타워즈 피규어와 X-Wing, R2D2, millennium Falcon, C-3PO 프라모델은 나도 가지고 싶을 정도다. 특히 X-Wing은 레어 아이템이라며 자랑하듯 써 놓은 것을 보면 어지간한 마니아 수준은 넘어선 것 같다. 이 블로그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번에 개봉하는 스타워즈는 7번째 나오는 영화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것 같다. 내년에 개봉이라는데 벌써들 이렇게 난리구나 싶다. 안용한의 블로그는 방문자 수도 꽤 많다. 스타워즈 열풍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해리슨 포드가 맘에 드는데…… 어릴 때 보았던 R2D2의 ‘삐리리리~’ 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 같다.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해석하자면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같은 문구는 이제 전 세계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자막이지. 잉? 루카스필름이 디즈니로 넘어갔구나! 어차피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그것을 우려하는 사람이 꽤나 많은 것 같다. 아! 내가 추억에 빠져 일은 제쳐 두고 스타워즈 공부나 하고 있었구나. 와우~ 벌써 퇴근 시간이다!
<2014년 6월 12일>
오늘은 아침부터 스타워즈 공부다. 흥미로운 것도 있고 안용한에 대해 분석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절대 노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일이란 게 이렇게 재미있어 보기도 오랜만인 것 같다. 이러다 나도 스타워즈 박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정선배의 서류에서는 ①안용한과 ⓐ김종선의 논쟁이 담긴 게시물이 출력되어 있다. 아무래도 종이 뭉치를 뒤적이는 것보다 인터넷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더 편한 것 같다. 안용한의 게시물에서 마우스 휠을 쭈욱 긁어 내렸다. 게시물 만으로도 꽤 장문이기도 하지만 게시물에 달린 댓글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중간중간 삭제된 댓글이 많다. <원문 삭제>라고만 쓰여 있다. 댓글 수는 무려 539개. 이걸 다 읽는 데만 오늘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릴 것 같다. ⓐ김종선의 글만 솎아내 보는 것보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살인의 동기를 유추해내기 좋을 것 같다. 『I AM YOUR FATHER』는 스타워즈의 유명한 대사다. 패러디도 상당히 많았다. 내 기억에 『내가 니 애비다.』라는 웃지 못할 유행어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여기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안용한의 블로그 배경음악인 스타워즈 주제곡을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 다스베이더. 그의 진짜 모습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였다. 그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논쟁을 시작한 걸까?
한참을 뒤적여서야 그들이 스타워즈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냐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스베이더가 주인공이냐가 이들 논쟁의 주제였던 것이다. 누가 주인공이면 어떻나? 그까짓 문제로 살인까지 연결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될 것 같다. 음~ ⓐ김종선은 ①안용한에게 부모의 심정을 아느냐고 물었고 안용한은 김종선에게 자식의 입장을 알긴 하느냐는 게 그들 논쟁의 핵심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문제는 김종선과 안용한의 논쟁이 막말과 욕설에 가까운, 아니 그냥 욕설이다. 읽는 내가 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 당사자간에 어느 정도의 상황이었을지 아주 이해 못할 상황도 아니다. 그리고 나중에 삭제된 댓글들이 문제일 수 있다. 이미 삭제되었지만 그 내용의 수위는 도를 넘어섰을 것 같다. 댓글 중반부터는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의 댓글은 20% 수준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댓글들의 내용으로 보면 누구는 김종선의 편에 섰고 또 누구는 안용한의 편에 섰다. 갑론을박. 이런 문제는 결국 누가 잘했고 잘못했다는 수준은 넘어선 거다. 논쟁의 발단은 김종선의 세대적 우위를 무기로 안용한을 무시하는 데서부터였다. 이미 지워진 댓글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알 수는 없지만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후반부에 있는 댓글들은 이미 감정이 폭발할 수위를 충분히 넘기고 있다. 직접적인 욕설 같은 건 줄어들었지만 인격적으로 비방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상황은 꽤 거칠었을 것도 같다. 이런 것이 온라인의 병폐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 무서운 세상이다. 글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다니. 안용한의 자존심이 무너졌을 것 같기는 하다. 자신은 나름 스타워즈에 대해서는 자칭 타칭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김종선은 『너희 같은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어쭙잖은 지식으로 아는 척하지 말라!』며 깔아뭉개고 있다. 어쨌든 이 논쟁은 자존심 싸움으로 시작된 것만은 확실하다. 김종선은 고학력의 전업주부이고 1남 1녀를 둔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을 꾸려가는 여자다. 대신 안용한의 경우는 편모슬하에서 누군가 『I AM YOUR FATHER』라고 외치며 아빠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길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은 여기까지. 오늘도 결국 인터넷에서 씨름하다 하루가 다 지나버렸구나.
<2014년 6월 13일>
『혼전순결. 그 따위 것』 오늘의 주제다. 조금 어이없는 논쟁거리 아닌가? 21세기에도 아직 혼전순결을 두고 논쟁을 해야 한다니…… ⓑ는 21살의 이영주, ②는 42살의 임현규다. 이영주는 여대생이고 임현규는 대기업 중견간부다. 스타워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댓글이 많다. 방문자수나 게시물 조회수만 해도 장난이 아니다. 조회수가 3천이 넘었다. 이 정도면 파워블로거겠거니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에 대해 쓴 게시물들과 연예인, 맛집, 여행 같은 게시물들이 주류다. 유독 『혼전순결. 그 따위 것』의 조회수가 높은 것을 보면 당시 인터넷에서 이슈가 되었을 것도 같다. 댓글은 981개나 된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게시물의 내용은 제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요즘 젊은 애들은 성적인 생각이나 표현에 있어 상당히 자유로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땐 안 그랬었는데…… 요즘 애들은 너무 까진 것 같다. 임현규는 여학생들에게 심하게 공격받고 있었다. 그의 게시물 내용은 제목과는 달리 요즘 여자들이 혼전순결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성의식을 가진 것을 두고 문란하다는 표현을 섞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원조교제 등 성매매를 쉽게 생각하는 것을 대차게 꾸짖고 있다. 자신은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세상의 그런 의식이 두렵다고 했다.
하긴 내가 고등학생 때만 해도 같은 반에 원조교제하는 애들이 몇 있었다. 이미 학교 내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지만 누구도 그걸 탓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었다. 부모님들이 알면 경기를 하거나 목을 잡고 뒤로 쓰러질 이야기다. 지금에서 생각이지만 모두들 그게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뒤에서 손가락질을 할지언정 그것을 문제 삼고 바로잡아 주려고 발 벗고 나선 친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와서 그 친구에게 잘못을 했느니 하는 둥 손가락질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이미 그 당시 우리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친구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든 그것 마저도 우린 손가락질할 권리는 없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의무는 아니지만 인간적인 도의상, 윤리상 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귀찮다거나 피해를 볼 것이라는 이유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못 본 척 무시했던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그들의 사고와 범죄는 우리의 무신경함과 정의로부터의 도피 때문일 수도 있다. 나 역시 그 친구에게 단 한 번도 따듯한 말 한마디 꺼낸 적이 없었다. 그저 비뚤어진 비행청소년이라 생각하고 멀찍이 피해 다녔던 게 사실이니까. 갑자기 내가 웬 정의 타령인지 모르겠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도 아니고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정의 구현을 실현하는 스타일의 사람도 아니다. 젠장! 갑자기 나 스스로가 싫어지는 기분이 든다. 예전의 부끄러운 과거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다.
댓글은 살벌하다. 임현규는 아무리 무례한 댓글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댓글을 달아주고 있다. 그런데 점점 원 게시물의 내용과는 다르게 여자들의 싸움터가 되어버린 것 같다. 혼전순결에 관한 문제가 아닌 성에 대해 혼란스러운 여성들에게 충고를 하는 의미를 가진 게시물이었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완전히 변질되고 있다. 이젠 혼전순결이나 성에 관한 내용은 첫 경험이나 여자들의 성생활 기피 문제, 처음 섹스를 하는 여자에 대한 논쟁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댓글의 내용으로 보아 남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었다. 어떻게들 찾아 들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섹스 기피증을 가진 여자 친구, 섹스를 원치 않는 여자들의 논쟁터가 되어가고 있다. 나 같은 여자들이 보기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준의 이야기들이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임현규는 한동안 댓글이 없다가 거의 종반부 정도가 되어서야 다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임현규의 반응은 매우 살벌해졌다. 그는 전반적으로 여자들에게 성에 대한 잘못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자 남자들로 보이는 아이디들은 임현규를 험하게 공격했다. 나중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더 공격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왜 남자는 성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 여자들에게만 문제를 삼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다. 말로만 남녀평등을 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에 있어서도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섹스라는 것이 요즘 여자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닌 건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은 조선시대도 아니다. 단지 성매매나 미성년자의 성윤리 같은 것이 문제이지 성인이 된 이후의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를 하는 데 있어 문제 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게 뭐가 문제인 건가? 왜? 여자는 애를 낳기 때문에?
나도 흥분해서 정신이 나갔구나. 하물며 나도 이 문제에 이 지경인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이영주는 스물한 살의 첫 경험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현규와 직접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싸울 일도 아닌 것 같지만 모르겠다. 당사자 간에 무슨 문제일지는…… 혹시 이영주는 이 게시물과 댓글 속에 자신을 대입시켜버린 것은 아닐까? 임현규는 아마도 딸을 대하듯 한 것 같고 이영주는 그에 반발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 논쟁 속 어디서도 살인까지 할 정도의 논쟁은 보이지 않았다. 이 게시물 외에 다른 것도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정선배는 이영주와 임현규의 계정을 받아두었다. 하여튼 준비성 하나는 기가 막힌다.
*
점심식사는 또 건너뛰고 말았다. 정선배는 이미 그걸 아는지 부탁하지도 않은 마끼아또 한 잔을 배달해 주고 갔다. 내가 마끼아또 마니아라는 걸 아는 것만 봐도 참 자상한 스타일이긴 한데 하여튼 알 수 없는 스타일이다.
ⓑ이영주의 계정은 막혀있다. 블로그는 그대로 살아있지만 비밀번호가 맞지 않는다. 누군가 계정에 손을 댄 것 같다. 본인 외에 누가 손을 댈 수 있을까? ②임현규의 계정은 아직 정상이다. 무엇부터 뒤져봐야 할까? 이메일? 쪽지?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을 찾아봐야 하나? 임현규의 계정에 로그인했다. 헉! 그의 블로그는 아직 쌩쌩한 것 같다.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알람에는 327건의 신규 소식이 있다고 알리고 있다. 이메일은 125건, 쪽지는 77건, 물론 스팸도 제법 있겠지만 다 훑어보는 것도 문제구나. 오늘은 이걸 다 마무리해야 마음 편하게 황금 같은 주말을 신나게 보내 줄 텐데.
“야! 유리야!”
기절할 정도로 놀랬다. 정선배다.
“선배! 놀라서 죽는 줄 알았잖아요. 대체 언제 들어온 거예요?”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선배는 줄곧 내 옆에 서 있었던 거다.
“너~ 아직도 그거 들여다보고 있구나. 고생이 많네~ 그거 생각보다 재미있지?”
정선배는 옆에서 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상글벙글하다.
“그런데, 갑자기 또 왜요? 또 다른 거 가져오신 거라면 더는 못해요.”
“그럴 리가~ 널 좀 도와주려고 왔지. 나가자! 용주 만나기로 했다. 다른 자료가 또 나왔대. 그런데 그냥은 못 주겠단다. 한 잔 사야 된단다.”
“뭐요? 그리고 아직 퇴근 시간도 멀~”
스마트폰을 열어보았다. 뜨헉~ 벌써 퇴근시간이구나. 정선배는 그런 내가 우스운지 옆에 서서 웃고 있다. 일 중독자의 전형인 정선배가 지금 내 모습에 적잖이 만족해하는 것 같다.
“아! 그리고 지난번에 네가 맥주 사기로 했던 거 오늘은 꼭 사야 돼! 나는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정리하고 나와라~”
이 사건은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다. 잠시만 집중하면 시간이 후다닥 날아가 버리니……
*
“또 뵙습니다.”
손용주는 이번에도 먼저 나와 있었다. 나와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 약속 하나만큼은 칼 같은 사람인 것 같다. 정선배와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대체 무슨 자료를 가지고 온 걸까? 혹시 ⓒ와 ③에 대한 자료가 벌써 나온 건가?
“네. 또 뵙네요. 그런데 불금에 이렇게 귀한 시간 내셔도 되나요? 사모님하고 자제분들께 혼나시겠어요.”
역시 나는 예의 바른 여자다. 가족까지 신경 써 주는 괜찮은 여자지~
“저~ 아직 총각입니다. 왜 이러십니까? 그냥 말 한마디로 유부남을 만들어 버리시는군요.”
손용주는 얼굴이 벌게져 있다. 노총각인가 보다. 능력도 있는 남자가 왜 솔로람~ 하긴 대머리라 여자들이 싫어할 수도 있지.
“미안합니다. 저는 나이가 꽤 있는 분이시라서……”
“네? 제가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요? 연중이 형님! 대체 뭡니까? 이게?”
손용주와 정선배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모종의 계약이 있는 것 같다. 설마 저 노총각과 나를 엮어 줄 계획은 아니겠지? 그런데 왜 자꾸 그럴 것이라는 의심이 드는 걸까?
“어~ 어! 미안해! 내가 미처 그런 건 말 안 해줬다. 유리야! 이 친구 이제 34살이야. 보기에는 어떤지 몰라도 보기보다 젊고…… 음~ 패기 넘치는 30대야. 사실은 내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너를 소개해 주는 걸로 보답하기로 약속했지 뭐냐. 지난번에 나를 찾아왔다가 자료실에 들어가는 너를 보고…… 사실은 그래서 이 일도 맡아서 도와준 거고…… 음~”
저~ 더듬는 거 봐라. 그렇다면 지난번에 말했던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거로군. 정선배는 전례 없이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참 내~ 정작 본인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나를 두고 지들끼리 거래를 하다니. 그리고 저 인물이 어딜 봐서 34살이냐? 장난해?
“됐고요. 그런 조건이라면 제가 도움까지 받으면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네요. 제가 알아서 조사하겠습니다.”
후후! 놀라는 모습을 보니 역시 예상 대로군. 나? 당연히 나가야지! 이 정도로 참아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꽤나 박력 있다.
“저기요! 유리씨!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제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이해하시고요. 화가 나신 건 알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손용주는 결단력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그냥 뒤돌아 나왔다. 그리고 그런 식의 거래는 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말이야~ 정선배도 그렇지. 내가 능력이 빠지는 것도 못난 것도 아닌데. 내가 시집을 못 가는 거라고 착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은근히 화가 나네! 솔직히 님을 봐야 뽕을 따지. 직업을 확 갈아 치울 수도 없고……
술자리를 박차고 나올 땐 에너지가 팍팍 넘쳐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왠지 온몸에 힘이 빠진다. 집엔 언제 가나~ 정선배는 잡을 생각도 안 했다 이거지?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중늙은이 같은 남자한테 나를 팔아먹어?
<2014년 6월 16일>
주말 내내 침대 위에서 뒹굴다가 황금 같은 주말을 몽땅 날려 버렸다. 내 불금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월요병 같지 않은 월요병에 벌써부터 일하기가 싫다. 그리고 쌓인 일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 짜증부터 난다. 대체 정선배는 어떻게 항상 즐겁게 일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임현규의 계정엔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숫자의 알람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해야만 한다. 한쪽 팔로 턱을 괴고 마우스를 스크롤했다. 많긴 많다. 댓글에 달린 댓글, 게시물에 달린 댓글, 이메일에 대한 답변, 블로그 방명록 신규 메시지 등등이다. 327건이 모두 그런 거다. 어휴~ 남의 사생활이나 기웃거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구나. 이렇게 하나씩 다 뒤지고 다녀야 하는 건가?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끝이 날 것 같지가 않다. 벌써 일거리에 대한 중압감에 일을 하기 싫어진다. 짜증이 날 것만 같다. 에라~ 그냥 로그아웃 해 버렸다. 오늘은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싫다. 이럴 땐 뭔가 새로운 것으로 활력을 찾아야 하는데~ 차라리 정선배 사무실에 놀러 가는 게 낫겠다. 버릇없이 군 것도 사과해야 하고 하니~
<2014년 6월 17일>
어제 정선배는 손용주에게서 받아왔다며 자료를 건네주었다. 어제 일은 끝내 사과받았다. 물론 정선배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지~ 나를 도매금으로 팔아버리려는 건 좀 그렇지~ 물론 자료 협조는 고맙다고 전했다. 오늘은 ⓒ윤윤경과 ③정동규에 대해 검토해야겠다. 어휴~ 벌써부터 머리 아프구나. 게시물이 한두 개가 아니네. 두 사람이 완전히 전쟁을 벌였나 보다. 벌써부터 걱정된다. 블로그 게시물은 목록보기로 훑어봤다. 생각 외로 댓글 수는 많지 않다. 여러 게시물들을 두고 문제가 된 것 같다. 음~ 좋은 글이 많네. 문제를 일으킬만한 여지가 없어 보이는데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빡빡머리가 보내 준 자료는 그다지 대단한 게 없다. 그저 출력물들…… 역시 정선배는 이미 ⓐ-①, ⓑ-②에 대해서는 검토를 마친 상태였던 것 같다. 제일 마지막에 남겨진 글엔 전혀 댓글이 없다. 자살 전에 쓴 글이다.
서울에 가 본 사람과 가본 적 없는 사람이 다투면
서울에 가 본 적 없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의 다툼엔 서울에 사는 사람이 가세한다.
이 서울 사람은 두 사람에게 다른 두 가지 상을 보여 주었다.
서울을 모르는 척하는 경우와 서울에 대해 잘 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경우다.
서울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시골사람 두 명의 인생을 움직일 수 있다.
고로
나설 필요도 없다.
아는 척할 필요도 없다.
그저 듣고만 있어도 모든 해법은 나온다.
단지,
나는 그것을 선하게 활용할지 아닐 지만 판단하면 된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린가? 뻔한 이야기 아닐까? 날짜상으로는 자살 추정 하루 전날 남긴 글인데. 그렇다면 정동규의 심경이 제일 잘 표현된 글이 아닐까? 이 글의 내용대로라면 서울 사람이라는 제삼자가 있다는 말 같다. 전혀 드러난 적이 없는 제삼자. 서울 사람이라고 비유한 사람에 의해 시골사람 두 명의 인생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결론에서 보면 제삼자인 서울 사람은 정동규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조종한 것도 아니며 모든 건 자의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들 6명에게는 공통된 부분이 있어야 한다. 서울 사람이라는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선하게 활용할지 아닐 지만 판단하면 된다』 이 부분이 제일 맘에 걸린다. 정동규는 결국 아닌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까지 파멸시켰다. 새로운 수확이다. 제삼자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이 글로 봐서는 중재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다툼에 간섭했을 가능성도 있다.
정동규의 블로그에는 제법 괜찮은 글들이 많다. 인격적으로 완성이랄 수는 없는 것이지만 선지자나 뭐 그런 것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라고 했고
누군가는 『하루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같은 문제를 두고 내 마음에 의해 시간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쉽지만 어려운 글이다. 흔히 들었던 이야긴데 그의 글대로 전혀 상반된 의미다. 시간은 고통스러울 수도 행복할 수도 있다. 정동규는 윤윤경과 만나기 전에 이미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어딘가 관련된 글이 있지 않을까? 김광석의 노래 두 곡이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먼지가 되어>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곡이다. 그런데 정동규는 게시물에 노래를 심지 않고 가사만 덩그러니 올려두고 그 밑에 자신의 생각을 짧게 끄적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있네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 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 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햇살이 눈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햇살이 웃고 있는 곳 그곳으로 가네
나뭇잎이 손짓하는 곳... 그곳으로 가네
휘파람 불며 걷다가 너를 생각해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먼지가 되어>
바하의 선율에 젖은 날에는
잊었던 기억들이 피어나네요
바람에 날려간 나의 노래도
휘파람 소리로 돌아오네요
내 조그만 공간 속에 추억만 쌓이고
까닭 모를 눈물 만이 아른거리네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지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보고 싶다. 왜 나를 버린 걸까?
김광석의 노래 가사들이 그녀를 그리게 한다.
먼지가 되고 싶다.
김광석도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에게 날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김광석이 노래하는 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혹시 나의 그곳과 다르지 않겠지?
윤윤경의 댓글이 보인다. 『병신! 니가 꼴값을 떠니까 간 거지. 분위기 잡지 마라. 병신아~』 윤윤경은 버릇이 없는 것 같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온라인 상에서는 이리도 무례한 학생이었던가? 대구와 김천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인터넷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김천에 사는 정동규가 대구에 사는 고등학생 윤윤경을 살해하기 위해 이동한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서울 사람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정동규가 윤윤경에게 살인까지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윤윤경의 댓글들은 모두 거의 비슷한 수준의 저급하고 그다지 의미도 없는 무분별한 독설이 전부다. 혹시 삭제된 게시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동규가 말하는 그곳은 이미 자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보고 싶다는 부분은 아마도 이혼한 전처를 말하는 것 같다. 정동규의 글들은 대부분 논어, 맹자, 공자 등과 시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다른 것들은 그다지 의심스럽지도 않다. 방문자도 댓글도 거의 없다. ⓐ-①, ⓑ-②의 경우처럼 인터넷 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된 블로그도 아니다. 혹시 이들은 블로그 외에 다른 게시물에서 논쟁을 벌인 것은 아닐까? 인터넷 속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다. 난감하다. 이 상황에 빡빡머리가 떠오르는 건 뭐지?
*
명함첩을 뒤져 손용주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친절하게 대할 것을 그랬구나. 이게 뭔 꼴이람. 다른 데는 부탁할만한 곳도 없다. 우리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내가 하겠다고 붙들고 있어 봤자 할머니 될 때까지 뒤지고 다녀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거다.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중이다. 난감하다. 정선배에게 부탁하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정선배에게 더 이상의 부탁을 하는 것도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성질이란 성질은 다 부리고 이제 와서 부탁하는 것도 쪽 팔리고…… ⓒ-③의 자료를 가지고 나올 때만 해도 거의 귀찮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정선배의 그지 같은 성격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내가 폭탄 맞는 수가 있겠지. 그냥 정석대로 가야겠다.
빡빡머리의 전화에서는 존 레넌의 『imagine(이매진)』이 흘러나온다. 꽤 좋은 음악인데~ 의미가 더 멋진 노래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나도 모르게 이매진을 흥얼거리고 있다. 뭐야? 음악을 더 듣고 싶었지만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어쭈? 전화를 끊어? 잠시 후 문자메시지 하나가 들어왔다. 『회의 중입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물론 업무 중이니 끊은 건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남자 제법 음악은 들을 줄 아네. 존 레넌의 이매진이라니~ 나는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이매진을 재생하고 눈을 감았다. 감미롭다~
*
“또 뵙습니다.”
빡빡머리가 눈웃음을 띄며 말했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조명 때문에 민머리의 반짝임이 신랄하다. 민머리들은 어떻게 관리를 하는 걸까? 매일 면도를 하는 걸까? 아니면 제모제를 바르는 걸까? 물어볼까? 크크~ 미친 짓이지.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네요. 그런데 꼭 이렇게 식사자리를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빡빡머리는 아까 문자를 보내고 두 시간 만에 전화를 해서는 자기 말만 하고 끊었다. 그리곤 이 곳 주소만 문자로 날리고 더 이상 없었다. 상당히 일방적이다. 선수 아니면 미친놈이 분명하다. 물론 나는 미친놈 쪽에 비중을 두었다. 작업이라니~ 저런 민머리 남자가? 호모 같아서 딱 질색이다. 괜한 편견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 윌 스미스 같은 남자들은 민머리가 멋지던데 이 남자는 자기가 민머리를 어울린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저 얼굴이 어딜 봐서 34살이라는 거야? 나보다 겨우 두 살 많다는 게 말이나 돼?”
“제가 워낙 공짜를 싫어하는 성격이라 주는 것도 그냥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유리씨와 금전적인 거래를 할 수도 없고 하니 이렇게 밥이라도 얻어먹어야겠습니다.”
손용주가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것 같다.
“너무 속 보이지 않나요? 정선배에게도 그렇고 의도적으로 제게 접근하신 것도 그렇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자리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네요.”
내가 너무 대 놓고 감정을 드러낸 건가 싶기도 하지만 서로 간에 선은 그어 놓고 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음~ 제가 잘못한 것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기분이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그럼~ 제가 어떤 식으로 다가서는 게 더 좋으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유리씨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군요.”
손용주는 생각보다 저돌적이다. 튼실한 기업을 경영하는 CEO는 주변에 널린 게 여자 일건대 왜 나 같은 여자에게까지 마수를 걸려는 거지? 이 자식 혹시 제비 같은 놈 아냐? 내가 너무 심한 의심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느낌은 그러니까. 그나저나 어떤 식으로 대답을 회피해야 되는 거지? 힘드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제가 알아서 하라는 걸로 판단하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무례하다고 생각하시면 언제라도 말씀하세요.”
아~ 능글능글한 게 징그럽기까지 하다.
“우리~ 업무 이야기하러 온 것이 아니던가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툭 쏘아붙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 그렇죠. 그럼 궁금하신 거 먼저 말씀하시죠. 단, 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규칙을 하나 만들죠. 제게 질문 하나 하시면 저도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그리고 답변은 성실하고 솔직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제 조건입니다.”
“네?”
이 남자가 이제 대 놓고 대시를 하는구나. 그래! 내가 싫은 건 대답을 회피하면 되고, 어차피 내가 물어볼 건 몇 개 되지도 않는데~
“그러시죠. 뭐. 그럼 제가 먼저 질문을 해야겠네요.”
솔직히 어떤 질문을 던질지 걱정이 된다. 그저 능글능글한 저 표정 자체가 부담스럽다. 저놈의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보내주신 자료는 얼추 검토해봤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동규와 윤윤경의 자료를 보고 나니 더 이상의 추측을 할 수가 없더군요. 지금 제가 필요한 건 정동규와 윤윤경이 인터넷 어딘가 그들 블로그 외에 다른 곳에서 논쟁을……”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손용주의 알 수 없는 표정 때문이다.
“뭐죠? 그 표정은?”
“혹시 정동규와 윤윤경의 다른 자료를 찾으시는 거라면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죠?”
“이미 준비해왔습니다. 일단은 출력을 해왔습니다. 그다지 자료가 많지 않아서 말이죠.”
손용주는 의자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서류 한 뭉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 이 사람 좀 봐라~ 그렇다면 이미 내가 검토한 데까지는, 아니 그 이상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저 남자는 이미 나의 얼빠진 표정을 읽었을 거다. 쪽 팔리게~
“이게 뭐죠?”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이걸 어떻게……”
“저도 호기심이 생겨서 정동규씨와 윤윤경씨의 자료를 뒤져 봤습니다. 아마 이 자료가 필요하실 겁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런 자료를 어떻게 구하시는 거죠?”
“유리씨는 벌써 저한테 세 번째 질문을 했군요. 이제 제가 세 번의 질문 기회가 있네요.”
손용주는 아까보다 더 능글거린다. 짜증이 나려고 한다.
“아! 네! 그러죠. 일단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나 해 주시죠.”
“저희는 정보를 추적하는 로봇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베타 버전이긴 하지만 상용화하지 못했을 뿐, 지금 이 정도는 금세 처리할 수 있죠. 원하시는 답변이 되셨나요?”
“그렇군요. 제 전공이 아니라 더 자세한 내용은 들어봐야 알아들을 수도 없을 거라는 뜻 같네요.”
“그럼~ 제대로 설명해드리길 원하시는 건가요? 얼마든지 해 드릴 수~”
나는 그의 말을 끊어야만 했다. 괜히 끊은 것 같긴 하지만.
“됐고요. 어쨌든 이런 도움을 주셨으니 감사인사는 드려야겠네요. 어차피 이 자리는 제가 사기로 했으니까 식사나 하시죠.”
나는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그러시죠. 이제 제가 질문할 차례네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손용주의 질문에 난 그저 미소로 대답했다.
“왜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으신 거죠?”
“뭐죠? 그런 질문은?”
“그건 네 번째 질문인가요?”
“네. 그렇다면 그쪽도 두 번째 질문을 하셨으니 어차피 피장파장이네요.”
손용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고 있다. 웃음소리가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네~ 알겠습니다. 제 질문에 답변이나 해 주시지요.”
손용주는 두 손을 깍지 끼우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내 말에 집중하겠다는 건가? 이 남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뻔뻔하고 저돌적이다.
“저는 남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그게 이유예요!”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까 말한 규칙에는 위배되었지만 알 게 뭔가. 하긴! 관심도 없다는 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뭐~
“최근에 남자를 사귄 게 언제였습니까?”
손용주 이 사람은 아주 작정하고 달려들자는 건가 본데~ 아저씨! 꿈 깨세요! 당신은 절대 내 스타일이 아니니까! 내가 남자를 굶고 평생 혼자 살지언정 내 스타일이 아닌 남자와는 사귈 생각이 없군요. 아~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데 솔직히 관심을 줘서 고맙긴 하지. 내가 남자를 사귄 게 언제였지? 취직하고 일 년도 안돼서 깨졌고 그 이후로는 솔로로 살아왔으니까 거의 3년이 다 되어가는 건가? 음~ 그러고 보니 꽤 됐구나.
“몇 달 됐네요!”
나는 또 거짓말을 했다. 그래! 알 게 뭐야!
“그럼 혼자라는 말이네요! 저는 어떠십니까?”
“그게 세 번째 질문이라면 제 대답은 실례지만 싫다고 양심적으로 대답해 드려야겠군요!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유리씨는 꽤 솔직한 여자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대답은 거짓말이지만요.”
“정선배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본 거죠?”
“그냥.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정보는 제가 알아낸 것이 아니라 말이죠. 연중이 형님이 비공식적으로 알려준 거니까요.”
뭐지? 이 남자 생각보다 괜찮은 구석도 있긴 하네. 이것도 이 남자의 작업 스타일인가? 하지만 나한테는 안 통하지~ 이 참에 내가 궁금한 거나 물어볼까? 설마 기분이 상하지는 않겠지? 매너 없는 질문일 수도 있고……
이 남자를 계속 만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저기요~ 이건 정말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지만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네요.”
“아뇨. 뭐든 괜찮습니다. 제 개인적인 게 궁금하시다면 뭐든 환영합니다.”
손용주는 눈빛을 반짝이며 내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손용주씨. 머리 있잖아요.”
“네~ 말씀하시죠.”
“혹시~ 아침마다 머리를 면도하시는 건지. 제모제를 쓰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기분 상하셨다면 미안해요.”
손용주는 또 껄껄거리며 웃어댔다. 다행이다. 그래도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닌 것 같네~
“면도합니다. 저도 처음엔 이 머리가 어색했지만 지금은 이게 편해서 이러고 다닙니다. 한 2년 정도는 된 것 같군요.”
손용주는 또 예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년이요?”
“네. 2년이 조금 넘은 것 같기도 하네요.”
“왜죠?”
“글쎄요. 어느 날 괴로워서 술 한잔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일어나 보니 머리가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그게~?”
이 남자! 몽유병이라도 있는 건가? 자고 일어났는데 삭발이라니.
“저는 제게 몽유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화장실 바닥에 제 머리카락이 잔뜩 널려 있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제가 다 밀어버린 거였어요. 혼자 사는 집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깎아줄 리는 없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엔 저 같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처음에는 이 머리가 쪽 팔리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이게 더 편합니다. 저 같은 민머리들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유리씨가 보시기에도 그렇죠? 그건 유리씨가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게 세상, 아니 한국 사회의 통념이에요.”
손용주의 설명을 듣고 보니 나 역시도 그가 말한 사회의 통념, 편견에서 비롯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미안하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재미있네요.”
“그럼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되지요?”
손용주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씨는 왜 남자 친구를 사귀지 않습니까? 이건 정말 진심을 다해 대답해 주시면 좋겠군요.”
글쎄다. 그건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 그 자식과 헤어진 이후로는 그냥, 남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가끔 외롭다고 느낄 때도 있고 아주 가끔 미치도록 섹스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남자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하지? 솔직하게라면~
“음~”
나는 시간을 끌었다.
“글쎄요~ 뭐랄까~ 필요한 것도 모르겠고. 왜 남자 친구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이게 대답이 될까요?”
그래! 나는 남자가 필요 없다. 시체나 만지고 있는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남자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그저 가끔은 섹스파트너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2014년 6월 18일>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아~ 정말 끔찍하다. 내가 왜 그렇게 된 거지? 내가 멍청하게 손용주에게 작업당한 걸까? 선수인가? 여자 킬러? 아니야! 정선배가 내게 그런 남자를 소개해 주려고 했을 리는 없어. 숙취는 없지만 머리가 아프다. 우우~ 돌아버리겠다. 손용주의 민머리를 내 두 가슴에 끌어안고 있던 것이 기억난다.
“가슴이 세 개 같아~”
내가 손용주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기억난다. 술김이었지만 나는 미친놈 짓을 하고야 말았다. 손용주. 그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왜 그렇게 마셔버린 거야. 손용주가 내 온몸을 애무하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머리를 끌어안고 내 가슴께를 내려다봤다. 흰색의 민머리는 그렇게 보였다. 내 가슴이 세 개로 보인 거다. 지금쯤 아직 자고 있겠지? 대체 내가 뭔 정신으로 이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 거냔 말이다. 오랜만의 섹스가 좋기는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손용주였다라는 것이 너무 끔찍하다. 그는 절대 내 이상형 비슷한 수준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어쩌다 그의 말발에 녹아버렸을까? 그나저나 정선배가 이걸 알게 된다면…… 아~ 쪽 팔려서 어떻게 살지?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지들끼리는 누구랑 잤다고 떠들고 다닐 텐데. 아~ 짜증 나!
*
병가! 생리통 말고는 첫 병가다. 통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랜만의 섹스는, 아니 거의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던 어젯밤의 미친 섹스는 정말 좋긴 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섹스라니……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삶이다. 내가 어젠 뭐에 꽂혔는지 섹스파트너를 원했던 것 같다. 엄마가 이런 사실을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집안에 정숙하지 못한 년이 태어났다고 집안이 뒤집어질 일이지. 배는 고프지만 아무 생각도 없다.
갑자기 『혼전순결, 그 따위 것』이 기억났다. 노트북을 열었다. 며칠 전 임현규의 글에 이영주가 남긴 댓글들이 기억났다. 혼전순결과 관련된 글로 시작된 것이지만 나중엔 여자들의 섹스 이야기들로 넘쳐나던 것이 있었다. 특히 첫 경험과 거의 첫 경험에 준하는 섹스 그리고 오랜만에 섹스를 하게 됐던 여자들의 이야기들이 왠지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남긴 댓글들이 더 궁금했다. 그런데 남자들의 생각이 문제다. 손용주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의 댓글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중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섹스를 학습시킨다』고? 이건 또 개 풀 뜯어먹는 헛소리냐? 『여자 친구가 섹스에 서툴지만 일부러 좋은 척을 해 준다』 요즘 애들은 섹스에 미친 것도 아니고 대체…… 헉! 『섹스를 가르쳐 주는데 쾌감을 느낀다』고? 뭐야? 그 반대로 『섹스를 못해서 쾌감이 떨어진다』는 미친놈도 있네. 돌겠네~ 섹스에 미친 돌아이들~
내가 손용주에게 원나잇 상대가 된 건 아니겠지? 거의 3년 가까이 멈추었던 내 성적인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을 한다는 건 확인했지만 기분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지금 손용주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냥 하던 대로 도도하고 뻣뻣한 여자 스타일로 밀고 나가야 하는 거지? 그나저나 내가 언제 갑자기 무엇을 계기로 무너진 거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몸을 내주다니. 내가 미친 것 아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어도 그렇지. 뭔가 있을 거야.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발라당 누워 버렸다. 아~ 정말 짜증 나……천장 벽지의 패턴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아직 술이 다 깨려면~ 아니 술이 깨면 어젯밤 기억이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아냐! 기억이 나야 해!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해!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손용주에게 투신할 리는 없잖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지만 파고드는 빛을 다 가릴 수는 없다. 이불이 암막은 아니니까.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머릿속만 빙글빙글 돌뿐 집중이 되지 않는다.
*
“으악!”
선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모든 게~ 전부 다 기억났다. 난 미친년이야! 분명히 미친 거야. 유리야! 유리야! 네가 아무리 남자를 굶었어도 그건 아니지. 미친 거야. 이건 정말 미친 거야.
뭐? 계약제로 사귀자고? 그것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이야? 손용주가 내 말을 듣고서 보인 표정이 기억났다. 가관이다. 미친년아. 넌 또라이야. 흑흑 이걸 어쩌면 좋아. 내가 먼저 시작한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게 아닐 거라는 나의 바람은 무참히 깨어졌다. 손용주의 문자메시지……
『오랜만에 아침이 더 상쾌하고 세상이 밝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2014년 6월 25일>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손용주에게 『나를 정리할 시간을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정말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좋은 쪽으로 정리하고 싶지만 좋은 쪽이 뭔지를 모르겠다. 손용주를 계속 만나는 게 좋은 것인지…… 나는 어지러웠다. 결국 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생각을 돌리는 데 있어서 일에 미쳐버리는 것 만한 것도 없다. 윤윤경과 정동규의 자료는 내가 모든 걸 잊고 빠져들게끔 하기에 충분했다. 상당히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윤윤경은 정동규와 같은 커뮤니티 카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시작은 그곳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기껏 맛집 관련 게시물에서 이들이 논쟁을 벌인 것은 유치하기 그지없다. 이런 것이 온라인의 병폐구나.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무례한 글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동규는 제법 오래 참은 것 같지만 후반에는 그 역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2014년 7월 16일>
이제 더 이상의 수사는 의미가 없다. 이 사건은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겨진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모두 죽어버린 사건이고 밝혀낼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두 달간 세 쌍의 사건을 조사했지만 피해자와 피의자가 죽은 것과 인터넷 댓글을 문제로 다툼이 생겨 살인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연관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는 드디어 손용주에게 문자 메시지로 결별 아닌 결별 통보를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데 그 일을 핑계로 계속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스 안에 모든 사건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넣고 봉인했다. 언젠가 이 사건이 꼭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다시 손용주와 연결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잊고 싶은 기억이다.
<4개월 전 :2015년 8월 12일>
현장이다. 살인사건 현장! 무더운 여름이라 시체의 부패 속도가 빨라 역한 냄새가 고통스럽다. 꼭두새벽부터 급한 사건이라고 해서 세종신도시까지 불려 나왔는데 아무래도 늦은 휴가를 반납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제발 그것만은! 어지간하면 새벽같이 튀어나올 일도 없지만 정선배에게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무언가가 있다. 정선배가 현장까지 직접 가서 조사를 하는 사건이라면 예사 사건은 아니다. 물론 만약 정선배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곳까지 왔을 리도 없었을 거다. 정선배는 모든 직원을 물리치고 혼자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
“선배! 저 왔어요!”
이미 현장에 푹 꽂혀 있는 정선배에게 내 말이 들릴 리가 없지만 그냥 한번 불러는 봤다. 후배 조재철이 뻔한 짓을 왜 하냐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 자식아! 나는 조재철의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정선배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짝다리를 짚었지만 연신 중심을 옮겨대기 바쁘다. 우리는 정선배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고수 혹은 무림지존이라 할 수 있는 정선배의 손길은 정말 노련하다. 아니 대단하다. 나도 십 년 정도 경력이 더 쌓이면 정선배 수준의 근처에는 미칠 수 있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정선배가 벌떡 일어나 허리에 두 손을 짚어 기지개를 켰다.
“으허허~”
괴성이다. 하여튼 하는 행동이 죄다 변태 같다.
“뭐예요? 새벽부터 불렀으면 아는 척이라도 좀 하시죠!”
나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정선배의 설명을 기다렸다.
“미안! 잘 왔다. 내가 일부러 길 안 막힐 시간에 불렀어. 잘했지?”
정선배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라고욧?”
내 말에 조재철이 더 놀란 표정이다. 역시 정선배에게 조금이라도 개기거나 쏘아붙일 수 있는 후배는 나 밖에 없을 거다. 정선배는 지난번 손용주 사건 이후로 내게 꼽이 잡혀서 찍 소리도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업무적인 부분에서야 나를 쥐 잡듯 복수하곤 하지만……
“급한 거라서 오라고 한 거야. 유리야! 다시 시작된 것 같다. 이 사건은 음~ ⓔ 사건이다. 곧 ⑤ 사건이 터지면 더 확실해지겠지.”
정선배가 다가왔다. ⓔ-⑤라면 지난 사건의 연장이란 말인데.
“선배! 그러면 ⓓ와 ④ 사건은 이미 벌어졌단 거로군요. 하지만 지금 사건이 ⓔ 사건이라는 것을 어떻게 벌써 알 수 있는 거죠?”
“ⓓ 사건에서는 알 수 없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가 있었어. 유서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아니지~ 살인자가 남긴 메시지야.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유리 니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정선배는 다시 알 수 없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퀴즈를 맞춰 보라는 예의 그 엉뚱한 표정이다. 또 장난이라니. 하여튼……
“몰라요!”
나는 또다시 쏘아붙였다. 자꾸 이런 식으로 개기다간 언젠가 한 번은 크게 혼이 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특이한 메시지야. 종이에 프린트했어. 『촌철살인에 대한 복수다.』라고 쓰여 있었지. 지금 이거 봐!”
정선배는 비닐 지퍼팩에 담긴 A4 용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나는 라텍스 장갑을 끼우고 A4 용지를 펼쳐 보았다. 『촌철살인은 가장 나쁜 죄악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건 좀 다르네요?”
“그렇지! 그리고 그건 지난 사건 때 나온 거야. 문구는 좀 차이가 있지만 같은 내용이라고 봐야지.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상황이 바뀌었어. 지난번에는 ⓐⓑⓒ가 여자고 ①②③이 남자였는데 이번에는 ⓓⓔ가 남자야. 물론 ④는 여자야.”
“그것 참 이상하네요. 그런데 왜 이번에는 메시지를 남기는 걸까요?”
“아마도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봐야겠지. 나 잡아봐라~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다시 시작하는 이유가 뭘까요?”
“유리야! 내가 프로파일러지 도사냐? 내가 그걸 알면 종로 가서 돗자리를 깐다.”
“선배, 어차피 알려줄 거 있으면 약 올리지 말고 얼른 풀어요!”
“정말 없어. 너 때문에 이제는 부탁할 사람도 없어. 난 그 부분은 손 뗄 거니까 네가 책임져. 이 새꺄!”
정선배는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말에는 분명 씨가 있었다. 이런 사건은 절대 관련 업체의 조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사건을 위해 정식으로 보고서를 꾸미는 날에는 언론에 노출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결론은, 아직 윗선에 보고해서는 안될 상황이라는 거다.
“정선배. 정말 이러기예요?”
“몰라. 이젠 네가 알아서 해. 난 여기서 정말 손 뗄 거니까 네가 책임져.”
“이게 왜 제 책임이에요. 원래 선배 사건이었잖아요.”
“이미 네가 인수했잖아. 그럼 네 사건이지. 난 몰라. 간다~”
정선배는 내가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불러낸 게 분명하다. 아~ 씨! 정말 손용주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건가? 쪽 팔리게~
<2015년 8월 14일>
사건은 연결되어 있는 게 확실하다. 범인이 우리를 조롱하는 것도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촌철살인』이라는 명제를 남겨둘 리도 없다. 촌철살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껏 조롱하고 자살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정선배는 ⓓ와 ④의 자료까지 완벽하게 조사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사라졌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대화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 사건들 모두 살인 방법이 다르다. 비슷한 방법도 없다. 결국 처음 정선배가 묶은 그룹에서 달라질 것이 없다. 모방범죄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분별하다. ①②③④는 서로 모르는 관계다. ⓐⓑⓒⓓⓔ 역시 마찬가지다. 연관성이란 찾으래야 찾을 수도 없다. ⓐ-①, ⓑ-②, ⓒ-③의 사건은 남자가 여자를 살해했고 ⓓ-④는 여자가 남자를 살해했다. ⑤가 추가된다면 ⓔ-⑤ 사건 역시 여자가 남자를 살해할 확률이 높다. 이 사건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미궁이다. 추리로만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사건들이 아니다. 결국 방대한 인터넷에서 특화된 데이터를 분석해 내야만 한다.
손용주. 손용주. 손용주!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미칠 것 같다. 정말 이건 아니다. 미친 짓이다. 정선배는 내가 이런 상태란 걸 모르는 걸까? 아~ 정말 짜증 난다. 손용주 말고 다른 사람부터 수소문해봐야겠다.
# 사건 ⓓ
성명 : 양상훈
성별 : 남
연령 : 18
학력 : 고등학교 2학년
직업 : 학생
경제 수준 : 상
거주지 :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출생지 : 서울
가족상황 : 2남 2녀
혈액형 : O
# 사건 ④
성명 : 이수영
성별 : 여
연령 : 32
학력 : 초대졸
직업 : 무직
경제 수준 : 중
거주지 : 부산시 문현동
출생지 : 부산
가족상황 : 없음
혈액형 : A
# 사건 ⓔ
성명 : 황찬욱
성별 : 남
연령 : 16
학력 : 중학교 2학년
직업 : 학생
경제 수준 : 중
거주지 :세종시 고운동
출생지 : 서울
가족상황 : 2남
혈액형 : O
<2015년 8월 17일>
역시 예상했던 대로 여름휴가는 반납하고야 말았다. 그동안 벼르고 있었던 유럽여행. 아름답고 시원한 스위스와 몽블랑은 다음 기회로 떠나보내고 무더운 여름 내내 이 진절머리 나는 사건과 씨름해야 할 판이다. 정선배는 월요일 아침부터 와서 한소리 하고 갔다. 내가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⑤가 변사체로 발견될 것이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벌써 주말도 반납하고 5일째 인터넷과 씨름하고 있다. 이번에는 정선배의 자료에도 인터넷의 어느 부분에서 살인을 야기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것은 없다. 물론 이미 피해자, 피의자가 모두 사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다만 ⓔ의 사건이 빨리 분석된다면 ⑤의 사고는 방지될 수 있다. ⓔ의 계정에 대한 자료는 이미 모두 받아 검토했지만 국내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새소식, 새 글 알림 서비스는 이미 모두 지워져 버린 상태였다. 블로그는 거의 사용치 않는 사람들이어서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타인의 블로그나 카페 등에서 생긴 문제이거나 일반 사설 사이트에서 벌어진 문제일 듯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황찬욱이 평소에 전혀 일기를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중학생이라 일기를 쓸 만도 한데 아쉽다. ⓓ 역시 고등학생이지만 ⓔ와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해 발생한 사건들이 PART-I이라고 친다면 이번 PART-II 사건들은 조금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 계정들에는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고 깨끗이 청소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메일도 모두 비워져 있다. 이것은 협박이나 해킹으로 삭제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긴 협박은 아닐 것 같다. 아! 결국 손용주에게 매달려야 한다는 건가? 전국이 빅데이터로 들썩이는데 이렇다 할 만한 전문가가 내 주변에는 이렇게도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왜 1년이나 지나서 다시 이 사건들이 이어지는 걸까? 그리고 피의자는 왜 항상 자살로 끝이 나는 걸까?
나는 벌써 스마트폰으로 손용주 명함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그래! 이건 정의를 구현하고 더 이상의 살인과 자살을 막기 위함이야. 절대로 네가 걱정하는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 지금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걱정하지 말자. 벌써 1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아무렴~ 1년이 넘었는데…… 이미 나는 잊었을 거야. 어휴~ 나는 지금 내가 지껄이고 있는 말이 모두 헛소리라는 걸 안다. 그래! 쪽 팔린 건 잠깐 참으면 되는 거야. 눈 한번 감지 뭐. 신호가 간다. 꽤 센서티브 한 척하네! 빡빡머리 주제에 음악은 고상한 걸 깔아 두셨어~
“안녕하셨어요? 유리씨~ 내 언젠가 꼭 전화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손용주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너무 반가운 척하니까 반짝이던 민머리가 더 웃긴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젠장~
“잘 지내셨죠? 업무적으로 부탁을 드릴 게 있어서 전화드렸는데 혹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내가 생각해도 정말 공손한 말투다. 정선배한테 이런 식으로 하면 평생 사랑받고 살 텐데. 앞으로 정선배에게 좀 더 다소곳하게 대해주어야겠다.
“아~ 네! 제가 지금은 회의 들어가야 하고요. 이따 보시죠. 제가 문자로 장소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만~”
“저기~ 저기요~”
뭐야? 벌써 전화를 끊어 버렸다. 매너가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도통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이거 완전히 작업 아니야? 문어대가리 같으니라고~ 어휴! 그나저나 내가 너무 과격해지는 것 같다. 워워~ 감정을 눌러 내려야지~
*
높은 천정에다 초록빛 잔디마당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선팅 처리된 창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테이블 위에서 조금씩 누워가고 있다. 저녁시간이라 사람들이 조금 많은 편인데 이런 식당은 학생 때 친구들과 맛집 탐방이다 뭐다 해서 찾아다니며 똥폼 잡던 시절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물 잔의 모서리들이 길어지는 햇빛을 요란하게 투과시키며 그림자를 길게 눕히고 있다. 제법 여유 있게 배치된 테이블에 자리 잡은 연인들이 소곤대는 대화가 내 귀에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쏙쏙 박혀 든다.
좋을 때다~ 사실 부럽긴 하지! 나도 다시 20대로 돌아가 사랑이란 걸 하고 싶다. 왜 지금은 그때의 순수함이 없는 걸까? 좋아하기만 하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쟁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이렇게 까다로워진 걸까?
그나저나 이 인간. 예전엔 시간 약속을 칼 같이 지키더니 이제는 갑질을 하려고 드네? 7시에 보자던 인간이 여태 코빼기도 안 보인다. 7시 20분이다. 너무 하는 거 아니야? 1년 전만 해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더니~ 참 내! 어이없다. 식당 끝까지 다시 한번 더 둘러보았지만 역시 없다. 빡빡이 자식~
종업원이 다가온다. 주문하지 않으면 나가 달라는 거겠지? 하긴 벌써 40분째 물만 마시고 있으니……
“진은 어떤 종류가 있나요?”
내가 먼저 선수 쳤다.
“손님. 주문하시려고요”?”
“네!”
“눈치 드리려고 온 게 아니고요. 뒷자리의 손님께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신다고 전해 달라고 하시는데요.”
종업원은 내 뒤편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뭐야? 손용주가 벌써 와 있었던 건가? 빡빡이는 없었는데. 내가 싫어하는 걸 눈치채고 가발이라도 쓰고 왔나? 내가 그렇게도 맘에 들었나?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손용주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지가 올 것이지. 매너 하고는~
손용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당겨준다. 어쭈? 갑자기 웬 매너질? 헉! 손용주가 아닌 것 같다. 원래 이런 미남이었나? 가발이 제법 잘 어울리는데…… 카리스마도 있어. 어쩜~ 1년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확 달라질 수 있는 거지? 손용주의 머리칼은 투블럭으로 자연스럽게 염색되어 있다. 손용주는 자연스럽게 내게 미소 지어 보였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를 바라보는 손용주의 눈빛이 예사 작업성의 눈빛이 아니다. 오늘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온 게 분명하다.
“유리씨! 진 좋아하시죠? 저도 진 마니아예요. 이 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진을 보유하고 있어요.”
손용주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남자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었던가? 처음 만나는 남자 같다. 그럼~ 난 계속 도도한 스타일을 유지해야겠지?
“전 독한 걸 좋아해요. 진은 역시 영국 아닌가요? 저는 스타 오브 봄베이를 즐기는 편인데 여기엔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 난 진을 좋아한다. 아는 건 개뿔도 없지만. 스타 오브 봄베이는 술에 취하고 싶은 날에 주로 마시는 진이다.
“독한 것 좋아하시면 미국산 주니페로 한번 마셔보시겠습니까? 48.3도예요. 스타 오브 봄베이는 47.5도니까 주니페로가 좀 더 센 편이죠. 진토닉으로 드시지는 않으시겠죠? 마니아시니까.”
손용주는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벌써 종업원에게 주니페로 두 잔을 주문했다.
“우리 오늘 한 번 달려 볼까요?”
“월요일인데……”
난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말도 더듬고 있다. 뭐냐? 대체 왜 이러는 거니. 유리야!
“뭐 어때요? 또 병가 내시면 되죠!”
“지금 제게 대 놓고 시비 거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리씨 팬입니다.”
손용주의 말이 농담 같지는 않다. 그런데 지금 내가 손용주에게 끌리고 있는 거 맞나? 이상하네. 가슴이 떨리는 게……
“사실. 저는 유리씨가 진을 좋아한다고 해서 진에 대해 공부를 좀 했었습니다. 그동안 진을 많이 마셔봤죠. 누가 그러더군요. 진을 위해 토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토닉을 위해 진이 있다. 그래서 진토닉이 탄생했다고요. 하하~ 사실은 잡지에서 본 겁니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진의 70퍼센트는 진토닉으로 소비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토닉워터는 말라리아 치료에 효과 있는 키니네라는 성분을 섭취하기 위해 개발된 건데 우리는 술을 타 먹는데 쓰고 있죠.”
“그럼 진토닉을 많이 마시면 말라리아에는 안 걸리겠네요.”
“사실 진이라는 술은 18세기에만 해도 싸구려 술이었대요. 지금은 값비싼 술이 되어 버렸지만 말입니다. 영국인들에게 진은 우리의 소주 같은 술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프랑스, 덴마크, 미국 등에서도 생산을 하고 있죠.”
“그동안 공부 많이 하셨네요. 그 지식으로 여자들 많이 꼬시고 다니셨겠어요.”
나도 모르게 손용주를 긁고 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다 유리씨 덕분이죠.”
손용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뭐야? 한 마디도 지는 일이 없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는 그저 제 입맛에 맞기 때문에 진을 좋아하는 거지 자세한 것은 잘 몰라요. 그런 것까지 연구하시는 걸 보면 대단하십니다.”
“제 성격 탓입니다. 궁금하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한 번 잡으면 놓치는 법도 없지요.”
<2015년 8월 18일>
어제. 또다시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손용주.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만나보기로 했다. 손용주는 내게 이 사건을 도와주는 동안만큼이라도 기회를 달라고 했다. 여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그리고 지금은 ⑤의 자살 현장이다. 정선배의 예견대로 빨리 움직이지 못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것은 모두 나의 무능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다. 이미 사건의 패턴은 확인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패턴만 확인된 것이지 그 외에 알아낸 것은 전혀 없다. 이 사건은 피동적인 사건 수사만 가능하다. 앞으로 ⓕ 사건이 벌어진다면 ⑥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이유가 뭘까? 알 수가 없다. ⓐ부터 ⓔ까지 피해자들이 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이유는 비슷하다. 인터넷 상에서 모욕을 느끼게 했다는 것! 그뿐이다. 그러나 그 문제로 인해 살인까지 이어진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납득하기 어렵다. 모두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들이 모두 중고등학생이라는 것이 좀 더 의아하다. 한창 어린아이들이 인터넷 댓글로 인해 살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⑤는 역시 예상했던 대로 여자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①②③④⑤가 공통적으로 접촉한 자가 범인일 가능성은 100퍼센트 확실하다. 그렇다면 ⓕ의 사건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⑥의 사건만큼은 예측해 볼 수 있다. 결국 손용주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거다.
어제 손용주가 한 마디 한 것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다. 『제 때의 한 바늘이 나중의 아홉 바늘을 던다』는 서양의 속담이다. 나는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라고 해야겠지…… 우리는 제 때의 한 바늘이 필요할 때다. 앞으로 있을 살인과 자살은 모두 내 책임이다. 만약 이 사건을 조작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이미 10명의 피해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긴 두 가지가 더 달라졌다. 피의자가 남긴 『촌철살인』메시지와 피해자, 피의자의 데이터가 지워졌다는 것. 그것은 해킹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자발적으로 지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의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라면 더욱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손용주의 협조가 가장 큰 기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사건을 조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사건 ⑤
성명 : 박혜연
성별 : 여
연령 : 19
학력 : 고등학교 3학년
직업 : 학생
경제 수준 : 중
거주지 :
출생지 :
가족상황 :
혈액형 : A
<신채은>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댓글 9단』의 블로그에 불이 켜지지 않고 있다. 내가 댓글 9단을 알게 된 지 벌써 3년은 된 것 같다. 연중무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새 글을 알리는 아이콘이 사라진 적이 없던 댓글9단의 블로그에 불이 꺼진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답답한 마음에 쪽지를 남겨 두었지만 역시 답변이 없다. 수신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명절에도 쉬지 않고 꼬박꼬박 새 글을 올리던 댓글9단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활동을 멈출 리는 없다.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댓글9단 덕분에 잡지사에서 밥값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지난 3년 동안은 그랬다.
댓글9단의 글들은 항상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각이다. 나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의 글을 보면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올해 있었던 사건들에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특히 두각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니 그녀인지 그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튼 자신의 생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덕분에 내가 댓글9단의 글을 제법 인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도둑질이란 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가 갖지 못한, 아니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게 그는 언어의 마술사나 마찬가지다. 훔쳐다 써도 티가 나지 않는 재야에 묻혀 글을 쓰는 언어의 마술사다. 무협소설 같은 데서는 은둔 고수라는 표현을 한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댓글9단의 블로그에 길들여져 새로운 기사를 쓰는 데 있어 그다지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는 이 짓도 끝이 날 거라는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막상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찾아온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에는 특히 그의 글이 꽤 난폭해지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내 기사 역시 꽤 주가가 높아졌다. 최근엔 그의 블로그에 방문자가 제법 많아져서 글을 퍼다 쓰는데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다행히 난폭한 분위기의 글 속에서 워낙 풍부한 표현들이 튀어나와 오히려 나를 더 즐겁게 해 준 것 같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관 피습사건, 성완종 리스트 파문 그리고 최근 메르스 사태에 관련해서는 편집장이 내 글을 높이 평가해 주었고 덕분에 내 글은 세간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실 내 글도 아니지만 그 때문에 너무 피곤한 상황이다. 더 괜찮은 기사를 써내야만 한다는 강박증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저께부터는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지만 어떤 식으로 글을 써 내려가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내 전공이 국문학이었는지 자체가 의심스럽다. 다시 옛 기억이 난다. 도움을 좀 받고 싶기도 하지만 다시 또다시 그 짓을 한다면 헤어 나오는 데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건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고 나는 더 이상 후회할 짓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댓글9단의 표현력이 점점 더 부러워지는 건 사실이다.
<김한일>
오늘도 파이팅이다. 이 우라질 약쟁이 새끼가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영길아! 철수하자. 아무래도 이 새끼가 냄새 맡은 것 같다. 아니라면 이 시간까지 안 올 리가 없잖아.”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영길이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뭐요?”
이 자식은 자느라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기합이 다 빠져가지고 이것들을~ 그냥~ 가자고 이색꺄!”
“네~ 가시죠!”
영길이는 아예 팔짱을 끼며 작정하고 자려는지 자세를 잡았다. 어이없다.
“모두 철수한다. 허탕이다!”
무전을 날리고 시동을 걸었다. 밤새 차 안으로 날아들어온 모기들이 왱왱거리며 귓가를 귀찮게 한다. 모기를 쫓아내려 창문을 모두 열고 룸미러를 통해 영길이를 보았다. 아주 세상모르고 잔다. 누가 고참인지 모르겠다. 팀원들을 해산시키고 근처 사우나로 향했다. 역시 다른 팀원 두 명이 사우나 안에서 중요 부위에 바가지만 엎어 놓은 채 잠들어 있다. 저 놈들 꼬락서니를 보니 이 짓도 정말 못 해먹을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40도라고 표시된 열탕 안에 발가락 끝부터 조심스럽게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분명히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또 놓치고 말았다. 여태까지 이런 놈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체 자체가 파악되지 않는다. 이름도, 직업도, 아니 사실 성별도, 목소리도, 지문도, 그 무엇도 파악된 것이 없다. 그저 그놈에게 물건을 받았다는 놈에게서 2차적으로 수집한 자료만 가지고 추적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긴 하다. 그러나 매번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 아래 잠복을 하지만 막상 그 장소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소스를 얻을 수 있는 루트도 메말라가고 있다. 아니 다시 소스를 발굴하는 것 자체가 행운일 것 같다. 이번에 검거를 했다면 대한민국 마약범 체포 역사상 가장 큰 건이라고 했다. 하긴 이 정도 신출귀몰하고 냄새를 맡는 능력이 있으니 여태껏 잡히지 않은 것이겠지. 마약을 유통하는 놈들은 대체로 점조직이다. 간혹 수입업자가 체포되고는 하지만 거의 다 바지나 마찬가지다. 실상 체포해 놓고 보면 허탕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마약쟁이들을 잡아 족쳐봐야 기껏 한두 단계 위까지 알아내는 게 한계다. 어찌 된 일인지 마약 유통에 있어서는 그 어떤 범죄조직보다 체계적이고 정보가 빠르다. 가끔은 우리를 따돌리기 위해 가짜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마약을 유통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기껏 체포된 놈들은 대부분 피라미들이다. 게다가 거의 다 초범들이다. 재범들은 대부분 자수를 하거나 다른 마약쟁이들이 형량을 줄이기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일명 코걸이에 당해서 잡히는 경우다. 우리는 문어 대가리를 잡으려 하지만 사실 문어다리 열 개 중에 기껏 하나를 잡는다. 그것도 기껏 다리 끝에서 헤매고 있다. 문어가 흔들어대는 다리에 우리는 그저 흐느적거릴 뿐이다. 그뿐 아니다. 우리가 문어의 다리 길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아니, 문어 다리는 길이가 변하는 것 같다. 거의 다 올라왔다고 생각해도 언제나 문어 다리 끝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제법 그럴듯한 정보를 얻었다. 잘하면 문어 머리 근처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문어가 뿜어낸 거친 먹물 안갯속으로 던져진 것 같다. 막막하다. 이번에 나온 정보는 순수하게 제보에 의해서였다. 사실 이 제보자에게서 얻은 자료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무려 17건이다. 그중 우리는 5건을 놓쳤다. 그중 한 건이 오늘이었다. 한동안 우리는 제보자의 정체가 궁금했고 제보자를 체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를 체포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실적을 채워주는 자를 잡아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자를 추적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것에 비하면 에너지 낭비라는 게 결론이었다. 꼬리조차 밟을 수 없는 그를 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제 그가 새로운 정보를 던져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까? 팀장은 전례 없는 실적에 오히려 제보자에게 고마워하고 있지만 요즘 들어 나는 그 자를 잡고 싶어 졌다.
*
“제보가 들어왔답니다. 한남동이에요.”
영길이 소리쳤다.
“뭔데?”
나는 조수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피로가 풀리지 않아 이동 중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던 거다.
“그 새끼. 어제 우리 쪽으로 온 게 아니고 한남동, 이태원에 있었던 모양이에요. 어떻게 할까요?”
영길이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뭘 어떻게 해? 잡아야지! 가자!”
나는 팀원들에게 무전을 날리고 한남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피곤했던 머리가 이제야 맑게 개인 것 같다. 제보된 위치는 이태원 주택가였다. 골목이 잘 발달된 곳이라 여차하면 또 놓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번 제보 역시 같은 놈에게서다. 대체 그놈은 뭘 하는 놈일까? 서로 적대적인 경쟁관계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아래서부터 단계도 거치지 않고 윗선을 덥석 물기가 쉽지 않다. 약쟁이들은 의리가 없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마약을 유통하는 구조에 있어서는 윗선에 줄을 대기란 만만치가 않다. 약 2년 전 우리 팀을 이끌었던 전임 팀장조차도 마약 유통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었을 정도로 마약 유통조직은 비밀스러운 집단이다. 대체로 우리 경찰력으로 중심을 파고들지 못한 채 항상 잔털만 뽑고 있는 격이다. 만약 제보자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제대로 큰 건을 하나 해결하는 셈이 된다.
“영길아. 이번에는 꼭 체포해야 된다. 신경 바짝 챙겨라. 이 참에 우리도 진급 좀 해 봐야지~”
나는 다른 팀원들보다 진급이 계속 누락된 사고뭉치 영길이 진급이 항상 신경 쓰였다. 항상 잘 가다가도 중간에 한 번씩 사고를 치는 바람에 고과에서 누락되어 버린 녀석이다.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천성이 착해서, 사실 형사로서는 하면 안 되는 짓을 하는 거다. 사실 징계까지 가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태블릿으로 현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2층 건물에 골목 모퉁이에 있는 건물이다. 단독주택이다. 영길이도 자세한 내용은 하달받지 못했기에 나는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다. 이미 근처에 거의 도착하는 중이다. 팀장의 차량이 전방에 보인다. 팀장은 정차한 채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나는 팀장이 설마, 혹시나 하는 의심까지 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전임 팀장의 일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설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팀장이 전화를 끊는 것이 보인다. 나는 차에서 내려 팀장의 차로 옮겨 탔다.
“팀장님.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갑자기~”
팀장의 표정이 의외로 밝다.
“방금 이 집주인이 누군지 들었다. 이 자식 신분위장 한번 제대로 했더라고. 저 집주인이 마약상이야. IT 기업가란다. IT 기업가는 아마 위장일 것 같지? 이 자식 무슨 쌍끌이를 이런 식으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합법적으로도 제법 큰돈을 벌고 있는데 마약 유통까지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야. 어떤 게 먼저 시작한 사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특한 케이스라는 것만은 사실이지. 어쨌거나 불법이든 합법이든 간에 돈을 버는 감각 하나만큼은 타고났어. 너도 알다시피 큰 자금이 없으면 마약 유통 역시 푼돈이나 만지는 수준 일건대, 이 자식은 막대한 자본을 돌리고 있어. 마약 유통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해 봐야겠지만 제대로 큰 건 잡은 것 같다.”
팀장의 표정이 밝은 이유가 있었구나. 그는 이미 성공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증거도 없는 데다 그저 확실치도 않은 제보 하나에 무작정 달려든다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내가 물었다.
“잡아들여야지!”
팀장은 무슨 대책이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아니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우린 제보자의 신원 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 아닙니까? 현재 아무런 증거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괜히 문제만 만들지 말고 오늘은 일단 빠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극구 말리려 했다. 아니 말려야만 한다.
“아냐! 제보자는 그를 체포하면 모든 게 밝혀질 거라고 했어!”
팀장은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제보자 말입니다. 누군지 혹시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알긴~ 전혀 몰라.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준 정보 중에 틀린 것이 없잖아. 어제 말고는. 그리고 어제 우리가 잘못 쑤신 것도 이렇게 해결됐고.”
“대체 뭐가 해결됐단 말입니까? 해결이 아니고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팀장은 성과에 눈이 멀어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팀장을 몰아붙이는 거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그냥 돌아가? 포기해? 모른 척 해?”
팀장은 밀어붙이려는가 싶다.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물러났다가 증거가 확보되면 덮치자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저 집주인이 누군지 정도는 확인했지 않습니까?”
“아니!”
팀장은 또다시 이상한 말을 한다.
“또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나는 그저 저 집주인이 IT 기업가라고 했지. 지금 저 집 안에 누가 있는지는 말한 적이 없어. 내 생각이 맞는다면 집주인과 누군가가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당신이 IT 기업가야. 그런데 마약 유통을 해. 그럼 자네는 직접 마약 유통을 하겠어?”
“아뇨. 누군가 하수인을 두어야겠죠. 아니면…… 음~ 그는 자금만 대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로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생각하기에는 제보자는 집주인 외에 실제 마약 유통을 맡고 있는 자가 집안에 있다는 걸 알려준 게 아닐까 하는데.”
팀장의 표정은 다시 밝아져 있다. 내 생각은 너무 단편적이었던 것 같다. 젠장. 팀장은 괜히 팀장이 아니군.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설명을 듣고 보니 말씀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다시 차를 옮겨 탔고 우리는 세 대의 차량으로 골목길 탈주로를 확보했다. 문제는 영장도 없고 증거도 없는 상황인데 팀장은 대체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을 뿐이다. 혹시 마약 유통을 맡은 자가 수배자라면 모를까?”
<신채은>
편집장에게 한 소리 듣고 나왔다. 설마 했다. 아니 사실 각오를 했던 일이긴 하다. 새벽까지 노트북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을 투영시켜 보았을 뿐, 결국 나는 열 줄 정도 써 내렸던 글 마저 모두 지워 버렸다. 백 스페이스키를 그다지 오래 누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임팩트 있는 제목조차도 떠오르지 않는다. 댓글9단에게 무슨 일인가 생긴 듯하다. 아무래도 그를 만나봐야겠다. 직접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원고를 부탁해야 할 것 같다. 이번 호에는 다행히 욕 한번 먹고 건너뛸 수 있었지만 다음 호까지 앞으로 기껏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댓글9단을 찾아야겠다. 불법인 걸 알지만 포털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선배를 통해 댓글9단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대로 받아보았다. 하지만 기껏 받은 거라고는 본명과 주소뿐이다. 주소를 알게 된 것만 해도 엄청나게 운이 좋은 거라고 한다. 대체 심부름센터 같은 데서는 개인정보를 어떻게들 알아내는 건지 궁금하다. 직접 해 보니 그들의 능력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 걸 기사로 써도 괜찮을 것 같다. 한 번 해봐?
그나저나 부산이라~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찾아가야 한다니 갑갑하다. 나는 오랜만에 KTX에 몸을 실었다. 차를 가지고 가기에는 장거리 운전이라 부담스럽다. 다행히 정방향 좌석이 있었다. 일반석이지만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다. 부산 어딘가에 산다는 희영이는 유명 기자님께서 오신다니 영광이라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부산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오늘은 희영이네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할 판이다. 잘 생기고 남자다운 부산 사나이라며 신나게 자랑을 하고 시집간 희영이는 은행 직원인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이제 난 친구들 중 처음으로 희영의 행복한 집에 시찰을 가는 거다.
부산역의 복잡한 출구를 통해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희영이 역시도 나를 쉽게 찾아냈다. 무려 3년 만이지만 우리는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다. 서로들 금세 알아보게 된 것만 봐도 그렇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희영이는 하늘하늘한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내 스타일이 더 아줌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서로를 매만졌다. 아직 아이가 없어서인지 몸매는 처녀나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관리가 더 잘 된 것 같다. 그것만 봐도 안정적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증거가 된다. 어쨌거나 희영이는 지금도 처녀로 보인다. 남편은 희영이를 집에 두고 마음 편히 출근이나 할 수 있겠나 싶다. 우리는 저녁식사 겸 해서 맥주나 한 잔 하기로 했다. 희영이네 행복한 부부를 만나는 건 물 건너간 것 같다. 남편에게 자유시간을 주었다는 거다. 나를 핑계로 자기도 신나게 놀아보겠다는 거라 오히려 내가 희영이의 희생양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은 아직 여름이 한창이다. 서울은 그늘에만 있어도 꽤 선선해져 가는데 부산은 이제 막 여름에 돌입한 것처럼 숨이 확 막힌다. 다만, 서울 같은 텁텁함이 없어서 좋다. 휴가철이 벌써 지났지만 부산은 막바지 여름을 즐기려는 인파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내가 KTX 열차를 정방향 좌석에 앉아서 온 것은 운이 좋았던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됐다. 우리는 태종대며 해운대며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녔다. 비록 옆구리에 반갑지 않은 어색한 살덩어리가 한 움큼이나 잡히는 누추한 몸매를 노출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바닷물에 몸을 담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물놀이를 할 생각이 없어서 아무런 준비 없이 내려온지라 미련을 접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대신 우리는 부산의 명물이라는 장어구이를 술안주 삼아 알코올에 흠뻑 젖어 보는 것으로 의기투합했다. 희영이는 이미 완전히 부산사람이 된 양 나를 이끌었다. 전혀 고민 없이 즉흥적으로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을 보니 결혼 전의 희영이보다 결혼 후의 희영이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에는 없었던 아줌마들만의 자신감이 생겼다 할까? 희영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는 오히려 나보다 더 타지 사람 같다. 오히려 나는 보험회사 직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직장생활로 인해 캐주얼 패션을 잊고 산 지 오래된 거다. 희영이는 장어 꼬리를 먹일 남자가 없어서 아쉽다며 내게 전부 밀어줬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결국 장어 꼬리는 모두 희영이 차지가 됐다. 우리는 새벽시간까지 자리를 옮기지도 않은 채로 수다를 털어냈다. 어디서 그 많은 이야기들이 샘솟듯 기어 나오는 것인지 신기했다. 우리는 부산에서의 끈적한 술자리 때문에 대학시절보다 더 친숙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줌마 같은 처녀와 처녀 같은 아줌마의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가진 다른 생각을 공유한 것이다.
*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때문에 오전 느지막이 눈을 떴다. 용감한 미씨 희영이는 벌써부터 일어나 해장국을 끓이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래! 희영이는 용감했다. 지난밤 남자 취객 두 명을 상대로 전혀 두려워하거나 굴하지 않았다. 희영이는 취객의 난동에 부담스러워하던 장어집주인 아주머니를 대신해 용감하게 나섰고 취객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우리는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지구대에서 출동한 경찰에게 이끌려 조서를 꾸몄다. 나는 직업상 가끔 겪는 일인지라 익숙한 일이었지만 희영이는 처음 겪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식당 주인아주머니의 증언 덕분에 무사히 풀려난 뒤 우린 정말 약속했던 대로 근처 호프에서 맥주 한잔 더 마시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즐거운 사고였던 것 같다. 매일 코딱지만 한 노트북과 실랑이를 벌이던 내게 있어 신선한 경험이었다. 희영이는 그때 부산 남자들과 부산 사투리로 싸웠던 것 같다. 정말 멋졌다. 부산 여자가 된 서희영이라~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젠가부터 현장감을 잃은 것 같다. 나는 댓글9단의 노예가 되어 버렸던 것 같다는 생각에 미쳤고, 내 자신에게 솔직하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댓글9단의 노예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일에 있어 쉽고 편한 길을 선택했고 스스로 자존심도 잊고 양심마저 저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서울에서 대각선 끝까지 찾아 내려온 부산에서 희영이의 모습을 보고서야 나를 깨우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것 같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희영이에게서 내가 무엇을 보고 배운단 말인가 하고 반문했다. 그러나 나는 희영이의 삶에서 그것을 본 것이 아니다. 난 싸움을 피하려고만 들었고 내 일이 아니면 관심조차 두려 하지 않았다. 때로는 불의를 보고서도 못 본 척 지나쳤고 내 속에 남아 있던 조그만 양심의 불꽃을 스스럼없이 짓밟아 버렸었다.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해결할 거야.’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불의를 목격한다고 해도 나는 그런 건 사회부 기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며 못 본 척 해왔던 게 사실이다. 오히려 희영이와 내가 위치를 바꾸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비겁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희영이는 해장국이 준비되었다며 나를 부른다. 희영의 해장국은 아내의 사랑스러운 정성 그 자체다. 순간 나는 희영의 남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어 보았다.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예쁜 얼굴, 날씬한 몸, 용감한 정신, 밝은 마음. 모두 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다.
“희영아. 왜 난 네가 가진 것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걸까?”
나는 생뚱맞게 물었다. 그러자 희영은 1초도 머뭇거림 없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아니라고는 말 못 하지. 하지만 너는 내가 아무리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는 게 있잖아.”
희영이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나는 영문을 몰라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멍청해 보였을 거다.
“너. 왜 그래? 알면서 놀리는 거야?”
“대체 뭘?”
“너는 내가 왜 일찍 결혼했는지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희영의 질문에 잠시 고민 속으로 빠졌다. 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다.
“너희들이 공모전 나가서 들어보지도 못한 상을 받아올 때 나는…… 그때. 빨리 시집가는 게 성공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었어. 난 너희들. 아니 특히 채은이 너한테 만큼은 특히 부러웠어.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상이라는 걸 구경해 본 적도 없어. 난 이 쪽으로 자질이 없다는 걸 빨리 알아챈 거야. 네 글에서 보여주었던 디테일과 얕거나 깊거나 날카롭거나 무디거나 하는 것들이 내게는 없었거든. 내 글은 그저 국어책 같았어. 노력을 안 해본 것도 아니야.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그랬어! 그래서 내 인생의 목표가 바뀐 거야. 현모양처로 말이지. 그런데 그거 아니? 결혼을 해서야 알았지만 나는 현모양처도 되지 못하는 새끈 한 아줌마가 내 체질이더라고~”
희영은 예상외로 속에 묵혀 두었던 이야기가 제법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희영의 그런 고민을 눈치챈 적이 없었다. 나는 주변에 대한 배려 자체가 없었던가보다.
“미안해. 희영아. 너에게 그런 고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아니. 뭘~ 나는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는 성격이야. 그런 성격 덕에 남편도 자유롭게 잘 살고 있지 뭐.”
의외로 희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맘대로 될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꽉 잡겠다는 생각을 미리 접었어. 방목하니까 사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아. 우린 서로 통제하려 들지 않거든~”
나는 희영의 말을 듣고서야 희영의 부부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희영의 결혼생활은 적당한 방목이 가져다준 자유로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희영의 차로 댓글9단의 집주소를 찾아 나섰다. 희영은 댓글9단의 이야기를 듣고 꽤나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결국 나는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댓글9단을 찾아오게 만든 이유를 말이다. 희영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며 갸웃거렸다. 내 화려한 글발을 두고 어찌 남의 글을 훔쳐다 쓸 수가 있냐는 거다. 댓글9단의 집은 오래된 13층짜리 아파트다. 통로식이다. 입구에는 노년에 접어들었을 법한 아저씨가 경비 복장을 한 채 지키고 있다. 사실 지킨다기보다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통로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라고 보는 게 맞다. 희영이는 나보다 앞서 움직였다. 마치 제 일인 양 나서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희영은 경비 아저씨를 붙들고 댓글9단에 대해 물어보고 있다. 고민이라는 건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것 같다.
“1002호라고요?”
경비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네! 아저씨. “
희영이가 강하게 긍정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경비아저씨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설마 했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신가 보구먼. 얼마 전에 자살했다지. 아마~ 나도 직접 본 건 아니고 들은 이야기야~”
경비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라뇨?”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음~ 그렇게 밝은 사람이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한 1년쯤 됐을까?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한동안 힘들게 지냈던 것 같아. 그러다 다시 예전 모습으로 잘 살더니 갑자기 자살을 했더라고. 누구는 노처녀가 외로워서 자살했을 거라고 하더라고. 상냥하고 밝은 처자였는데 말이야. 그러다 죽기 한 일주일 전부터는 다시 예전의 그 모습이 보였어. 난 잘 알지. 워낙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었거든. 인생살이가 항상 행복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아무리 힘들다고 자살까지 하게 될 줄이야~”
경비아저씨는 댓글9단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희영과 나는 그녀의 자살 소식에 아쉬웠다. 나는 부산에서 댓글9단을 직접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지만 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되어 난감했다.
“어쩌지?”
나는 허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누구에게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 스스로에게 난감한 상황을 토로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가씨들은 누군데 그 친구를 찾아오셨대? 말투를 보니까 여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경비아저씨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 아니다. 희영을 살피는 눈이 확실하다. 남자는 늙으나 어리나 예쁜 것들만 좋아하니까. 희영인 그런 시선에 익숙한 친구다.
“저는 아니고요. 이 친구가 댓글9단 아니~ 이수영씨를 꼭 만나야만 한댔거든요. 일부러 서울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 아쉬운 소식만 들었네요. 안타깝네요.”
희영은 내가 할 말까지 대신 해 버렸다.
“댓글9단이라~ 그러고 보니 그걸 물어본 사람이 있긴 했는데……”
경비아저씨가 말했다.
“네? 누군데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내 동물적인 반사신경이 움직인 것이다.
“연예인이었어. 유명한 여잔데. 아마 댁들하고 나이도 비슷할 것 같구먼. 음~ 아니지. 아가씨들 나이를 가늠하기는 힘든데…… 아니~ 아니지! 수영씨가 나이가 좀 들어 보이기는 편이긴 한데. 아~ 맞다! 그 연예인은 수영씨하고 친구라고 했어. 윤채아라고 혹시 알아?”
“네에?”
경비아저씨의 말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유명한 연예인이 댓글9단의 친구였다고?
“그런데, 윤채아씨가 수영씨의 댓글9단 아이디를 물어봤다고요?”
내가 물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순간 내 심장이 심하게 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대박 기사감이다.
“아이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처음 왔을 때 1002호가 댓글9단 이수영씨가 사는 집이죠? 이렇게 물어봤어.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지. 그 뭐더라. 그래~ 맞다! 주부9단이라는 소시지 있잖아. 그거 때문에 기억하는 건데……”
“윤채아씨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아~ 정말이라니까.”
그렇다면 윤채아는 이수영의 아이디까지 아는 절친한 사이라는 것인데…… 난 여기서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은 것 같다.
“아저씨. 혹시 그분은 어떻게 자살했어요?”
희영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보지는 못했는데 소문에 들으니까 목을 매서 죽었다고 하더라고. 유서도 안 쓰고 죽었다나. 대신 일기장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건 무슨 내용이래요?”
“그거야. 나 같은 사람이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별 문제 있을 게 있겠어? 음~ 뉴스에도 나온 게 없으니까. 아무튼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 설명을 해줄 텐데. 내가 아는 게 그 정도밖에 없네~”
<김한일>
나는 한순간이나마 팀장이 범인과 유착관계가 있다고 의심했던 마음을 풀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멍청한 인간이다. 분명히 지적한 부분 이건만 대체 왜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파고드느냔 말이다. 조상환을 현장 체포하겠다던 그의 포부까지는 그런대로 인정하겠다. 빨리 큰 건 하나 해결해서 승진하겠다는 의지도 인정하겠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영장 역시 없는 상황에서 자기보다 훨씬 경험치 많은 우리들의 조언을 무시한 결과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디서 나온 정보인지 알 수는 없지만 팀장은 자잘한 건으로 그래도 꽤 좋은 성과를 보였고 그대로만 진행이 됐어도 시간이 지나면 승진이야 따 놓은 당상이었는데…… 뭐! 어쨌든 내 예상대로라면 징계가 확실하다. 조상환이야 어쩔 수 없지만. 최동철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최동철과 조상환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긴 하다. 그들은 정말 마약 조직의 일원인가?
<송유리>
머리가 지끈거린다. 사건은 풀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사건파일을 몽땅 정리해서 다시 정선배에게 돌려주고 싶다. 아무리 봐도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아서다. 손용주씨가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미궁이다. 피해자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피의자는 자살해 버리는 같은 패턴이다. 달라진 것이 있긴 하다. 지난 세 쌍의 사건과 최근의 사건을 다른 그룹으로 분류하자면 피의자가 남자에서 여자로 바뀐 것뿐이다. 물론 댓글로 인한 감정싸움이 살인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졌다. 하지만 이 사건들에 있어 더 이상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연결고리 없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란 말인가? 정선배가 처음 분석해 준 대로 그룹핑은 확실해 보인다. 내가. 아니! 우리가 놓치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그냥 정식으로 보고하고 언론에 노출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우리는 너를 지켜보고 있다』라고 겁을 주는 거다. 아니다! 사실상 따지자면 우리는 이 전염병 같은 사건에 있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건들을 조작하고 있다면? 아니다! 말도 안 된다. 분명히 자살 해 버린 피의자에 의한 살인이었다. 이런 일은 타인에게 사주를 받고 살인을 할 수 있는 성격의 사건이 아니다. 이미 외국의 유사사례를 검색했지만 지금과 같은 사건은 보고된 바가 없다.
*
손용주씨는 부탁했던 자료를 조사하고 있을 테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힘들구나. 좀 더 가까워질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내가 손용주씨를 업무적인 것으로 엮을 생각을 하는 걸까? 나 스스로도 무엇이 솔직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연애도 하던 사람이 하는 건가 보다! 대체 어떻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껏 또 연락해서 일 이야기를 하기에도 우습다. 나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 겁이 많은 걸까?
그날 결국, 나는 그와 사귀기로 했지만 그는 내가 또다시『계약제로 사귀죠』라고 말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좀 더 솔직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미 손용주씨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를 만나면 방어본능이 살아난다. 이미 살도 섞어 본 사인데 더 이상 뭐가 두렵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미친 게 아니라면…… 그나저나 나는 왜 그에게 계약제로 사귀자는 말을 한 걸까? 당시에 아무리 당황했다지만 대체 내 머릿속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황당하기만 하다. 그리고 내가 말했던 그 계약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 진보적이면서도 진부한 생각은……
①②③④⑤가 공통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누굴까? 사실 그것은 손용주씨가 빅데이터를 분석해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CCTV 영상에서 그들의 데이터를 분류하고 자동으로 대상을 검색하고 추리해 줄 수 있는 장비나 소프트웨어가 있다면 훨씬 수월할 텐데. 어디 그런 건 없는 걸까? ⓐⓑⓒⓓⓔ는 공통점이 없을까? 아~ 진짜 머리 아프다.
<정연중>
자살로 위장했지만 절대 자살일 수는 없지. 최동철을 살해한 자는 살인 경험이 없는 자다. 하지만 살인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결국 범인은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복성 살인도 아니다. 계획은 치밀했으며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것으로 봐서는 지인의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 사업을 하다 보면 부득이하게 적을 만들 수도 있긴 하겠지만 치밀한 계획 하에 죽임을 당할 정도의 원인이 있다면 찾아내기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띵동~ 또 어떤 놈이야? 문자메시지다. 김한일? 이 자식이 웬일이지? 그 녀석은 제법 두려운 존재다. 너무 저돌적이어서 가끔 엉뚱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징계도 적잖게 먹은 걸로 아는데…… 이번에는 또 뭘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제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도 채 울리기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형님. 잘 계십니까?”
초반부터 반가운 척 들이대는 걸 보니 뭔가 시킬 일이 있는 것 같다. 이 자식은 내게 부탁을 해도 시원찮을 주제인 것도 모르고 항상 당연한 듯 일을 시킨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거다. 이 호기심 많은 나를 들었다 놓는 재주가 있다.
“잘 지낼 일이 있겠냐? 매일 일에 파묻혀 사는 거지! 넌 또 왜?”
나는 대 놓고 내 심정을 표현했다.
“아니~ 형님은 무슨~ 넌 또 왜라뇨? 우리가 어디 그런 사이였습니까?”
능글맞다. 무섭다. 또 뭔 이상한 일을 시키려는지 걱정이 앞선다.
“넌 이 자식아~ 아무튼…… 왜?”
“거기 최동철 건 조사 잘하고 있습니까?”
어? 이 자식이 최동철을 어떻게? 얘들 사건이 아니었는데?
“뭐야? 너 최동철 사건을 왜? 자리 옮긴 거냐?”
“아뇨! 그건 아니고요. 저희 사건하고 연결이 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겹쳤어요. 뭔가가~”
“너네 마약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 친구 원한관계에서 피살된 것 같던데.”
나는 순간 최동철이 마약에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약 테스트도 해 봐야 할 상황인 것 같다.
“그 최동철은 분명히 마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형님이 어찌 그런 걸 놓칠 수가 있는 거죠?”
이 자식은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걸리는 걸 긁어댄다.
“그럼 네가 지금 최동철 사건을 맡았다는 거야?”
“그건 아니고. 최근에 우리 제보자에 의해 추적하던 중에……아무튼 좀 복잡한 게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최동철이 그 당시 우리를 고소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은 것을 보고 뭔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런데 이렇게 당해 버렸네요. 형님 생각에도 자살은 아니죠?”
“그래? 아무래도 네가 제대로 추리를 한 모양이다. 네 말대로 타살인 것 같다. 다만~”
“다만 뭐요?”
“일단은 자살로 보고돼서 들어온 사건이야. 그리고 아직은 나도 그저 추측일 뿐이고. 소견서 정도는 쓸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결정적인 타살의 정황이나 흔적은 없거든. 현장 자료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형님! 시간 괜찮으시면 제가 넘어갈까 하는데요.”
“나 같은 월급쟁이가 근무 시간에 어디 갈 데나 있겠냐? 일단 넘어와라.”
*
불과 두 계절이 지나고 만난 사이건만 새까매진 김한일의 얼굴이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녀석은 올여름 내내 용의자를 추적한답시고 현장에서 굴렀다고 했다. 김한일은 최동철에 대해 조사한 내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녀석은 조상환이라는 자를 피의자로 보고 있었다. 어떻게 구한 것인지는 알 필요도 없지만 DNA 조사에 필요한 머리카락을 가져왔다. 최동철에게서는 마약류 양성반응이 나왔다. 필로폰이었다. 상당 기간 동안 마약을 투여한 것이 분명했다. 주사로 투여한 적은 없어 보였다. 아니! 주사 자국은 없었다. 그들 세계에서 말하는 물뽕이라는 것을 했을 것이다. 비용적인 부분에 있어 부담이 없었을 테니 구태여 주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한일의 말대로라면 조상환이라는 자가 최동철을 살해했다는 것인데 타살의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로 자살은 아니다. 내가 뭔가 놓치고 가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송유리>
그래~ 사랑이 뭐! 다 그런 거지.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도 있고 불씨가 옮겨 서서히 불이 붙는 사랑도 있는 거야. 물론 나는 후자의 경우지. 그렇고 말고~ 아무래도 오늘은 폭탄선언을 해볼까? 『우리~ 이왕 계약제로 사귀는 거, 제대로 계약조건을 거는 건 어때요?』 이러는 거지! 계약조건은 내가 사랑에 빠지는 조건이지. 암~ 손용주씨가 예전보다 멋져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내 마음을 빼앗은 건 아니니까. 저기 오는구나~ 스마트폰의 시계는 정확하게 6시 47분을 표시하고 있다. 약속시간은 아직 13분이나 남았다. 일단은 합격이다. 약속시간은 기본 매너지~ 나를 보았는지 뛰어오고 있다. 이 기분은 또 뭐지? 저 모습이 귀엽게 보이는구나. 미친 거 아냐?
“유리씨! 오래 기다리셨죠?”
손용주씨가 물었다.
“오래 기다리긴요. 저도 방금 왔어요. 어차피 약속시간도 많이 남았는걸요. 그런데 차는요?”
“대중교통으로 왔습니다. 퇴근시간대에 차 가지고 나오면 시간 약속도 그렇고요. 오늘은 왠지 유리씨하고 좀 걷고 싶어서요. 요즘 저녁이 되면 제법 선선해요. 청계천 어떠세요? 그래서 일부러 종각에서 보자고 한 겁니다.”
이 남자는 뭐가 그리 당당한 걸까?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있어 언제나 당당한 모습과 말투는 변하지를 않네!
“여기서 보자고 해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동네에서라면 뻔한 레퍼토리 아니겠어요?”
사실 난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이 남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셨군요. 그럼 다른 데 갈까요? 요즘 이 동네가 많이 변하고 있어요. 걷기 좋은 곳이 제법 많습니다. 오랜만에 대학로에 가도 될 것 같고요.”
손용주는 내 옆에 다가오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변해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 버렸다. 아~ 이러려는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건 순전히 내 본능일 뿐이었다. 노처녀의 본능이랄까? 경험이 부족한 노처녀. 손용주씨의 표정이 곤란해하는 것 같아 보인다.
“미안해요!”
내가 먼저 사과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손용주씨의 팔에 내 팔을 끼어 주었다. 벌써 좋아하는 저 표정 봐라~ 생각보다 단순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구나.
“제가 무례했나요?”
그가 물었다. 시선은 다른 데 있다. 우리는 일단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꽤 근사한 향이 난다. 몇 년 동안 내 화장품 냄새와 동료들의 싸구려 스킨 화장품 냄새만 맡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고급스러운 향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왜 손용주씨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는 걸까? 팔뚝이 생각보다 단단하다. IT기업의 CEO라고 해서 뼈에 살만 붙어 있는 허약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날 밤의 기억이 몽땅 지워진 것일까?
“우리는 사귀는 사이니까 이런 건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가 말했다. 무슨 뜻인 줄은 알겠지만 대체 어쩌자는 거지?
“왜요? 부담스러우세요? 왜 스스로 세뇌를 하고 계시죠?”
그의 팔에 살짝 가슴이 닿았다. 아니! 사실은 내가 일부러 문질러 본 거다. 반응을 좀 보고 싶어서다. 오늘도 내가 이상하리만큼 도발적인가?
“아뇨. 너무 좋아서 그럽니다. 저는 목표를 이루면 항상 자아도취에 빠지곤 하죠.”
“아~ 그럼 목표를 곧 다른 여자로 설정하시겠네요?”
비꼬는 게 아니다. 진심이다.
“글쎄요. 저는 목표를 완전히 변경하기보다는 성취한 것을 기반으로 재설정하는 편입니다. 새로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익숙한 걸 더 좋아하죠. 제 직업 때문에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너무 빠르게 변해가는 게 두렵습니다. 제가 미처 대응하지 못하면 금세 도태되어 버리고 마니까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IT기업의 CEO 지 엔지니어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쭉 엔지니어로 살았어야만 했다면 차라리 농부를 선택했을 겁니다. 저는 그만큼 틀 안에서 사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처음 보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도 어릴 때는 성공 자체에만 관심이 있어서 주변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했죠. 그저 일이 좋았어요. 제 사업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성취감을 가져다줬습니다. 너무 성공만 했던 거예요. 물론 작은 실패는 했었지만 제 일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사실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봐야 해요.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제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 기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제가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은 많았지만 저와 함께 영혼을 나눈 사람은 없더군요. 가족도 마찬가지였고요. 저는 대화를 잃은 상태였던 거예요. 영혼 없는 대화만 해왔던 겁니다. 지금은 다시 그렇게 살라면 못할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방법을 모르겠다는 거죠. 아마도 일 중독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다행히 가족들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를 이해해주고받아 주었어요. 하지만 친구들이나 동기, 선후배들은 저를 이해하지 못했죠. 성공해서 거들먹거리려고 한다는 둥~ 그런데 연중이형님이 저를 이해해줬어요. 유리씨는 그걸 잘 안다고 하더군요. 제가 연중이형하고 제가 가까운 이유도 사실 둘 다 비슷한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에요. 일 중독! 그건 정말 가족들까지 힘들게 하죠. 영혼이 없는 사람을 만들어 버리니까요. 유리씨 앞에서 이런 말까지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요. 저는 여자를 사귄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름, 집, 출신 등등은 알고 있지만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제 영혼이 다시 생명을 얻은 후, 제일 처음 저와 영혼의 교감을 가지게 된 분이 바로 유리씨예요.”
그는 내게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일 중독이 하나의 병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선배가 일에 미쳐 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일에 미쳐 광인처럼 살았던 정선배는 업무적으로는 국내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프로파일러였지만 손용주씨의 경험에서처럼 가족들은 물론이고 직장동료들에게서마저 버림받았었다. 물론 지금은 그 스스로가 동료들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떻게 정선배와 교감했었을까? 내가 둔해서 그랬을까? 나는 그런 정선배가 멋져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그런 심각한 상태였는지 모를 때에는 말이다. 나중에 증상을 알고서는 연민에 가까운 나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지만, 어쨌든 정선배도 지금은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치고 일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건 아마도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지 싶다. 득도를 했다고 할까나.
“용주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용주씨는 언제 어떤 계기로 일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 거죠?”
우리는 청계천에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이 되어서야 한적한 식당을 찾아들었다. 우리는 영혼의 대화 덕분에 배고픔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음~ 글쎄요. 저도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긴 어려운데요.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참 외롭다’ 였어요. 주변에는 분명히 사람도 많았어요. 하지만 괜히 외롭다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가 말했다. 나는 대충~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아마도, 따지자면 사랑 중독증이었을 것 같다. 그가 나를 떠났을 땐 나도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꼈으니까. 물론, 내가 스스로 만든 환경이었지만 말이다.
“최근에 제 동창 중에 자살한 녀석이 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친구도 일 중독이 아닐까 싶네요. 모르는 사람들은 욕이나 해대겠지만 저는 그가 자살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자살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것이리라. 나는 직업적인 감각이 자동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꾸욱 눌러버렸다. 그런 걸로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이랄까? 왠지 그는 정선배와 매우 닮아있고 한편으로는 나와도 닮아 보였다.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닮아 있는 것이 아닐까? 일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섹스 중독 등등으로……
아무래도 나는 손용주씨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다. 계약 연예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나는 초딩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왜 사랑하는 마음을 잡아 가두고 나를 감추려고만 했을까?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일까?
*
월요일이다. 정선배에게 점심식사를 사야겠다. 아니 대접해야겠다. 정선배 사무실 문을 빼꼼 열어 보았다. 역시 일 중독을 겪기에 충분한 캐릭터다. 오전인데도 벌써 뭔가에 꽂혀 있다. 분위기나 확 깨 줄까? 그런데 생각 외로 상당히 집중한 상태다. 의외다. 내가 옆에 서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다니~ 설마 눈 뜨고 자는 건가? 나는 팔짱을 낀 채 정선배가 노려보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젠장! 정말 눈뜨고 자는 거 아냐?
“왜?”
헉! 정선배는 이미 내가 옆에 있는지 아는 거다.
“어이구~ 무서워서 죽겠네요! 저는 눈 뜨고 자는 줄 알았잖아요.”
정선배는 이제야 고개를 돌렸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다.
“그러니까. 왜?”
정선배가 다시 물었다.
“어~ 그게요! 뭐였지?”
“일 없으면 그만 가봐라~ 머리 아프다.”
“선배가 언제 머리 아프지 않은 날이 있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글쎄다. 풀리지 않는 숙제랄까? 어디서 본 듯 하기도 한 느낌인데 그런 건 없고. 아무튼 알쏭달쏭한 느낌?”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선배도 그렇게 삽질하는 게 있어요? 그거 참! 되게 궁금해지네~”
“네가 한번 해 볼래? 난 아무래도 내 명에 못 죽거나 이 사건을 미제로 넘길지도 모르겠다.”
“선배! 농담하지 말고. 저도 우리가 맘먹은 대로 미제가 된다면 선배가 준 사건부터 미제로 던져버리고 싶어요. 어휴~ 내가 어쩌다가 그런 사건을 넘겨받아가지고~ 아! 그러고 보니까 의심스럽네? 혹시 선배. 그거 머리 아파서 나한테 넘긴 거 아니에요?”
우리는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정선배가 이렇게 사건을 풀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보아하니 또 며칠에서 몇 주 동안 두문불출할 것 같다. 정선배는 그렇게 해서라도 답은 찾아낼 거다. 여태까지 정선배 손에 들어가서 맨 손으로 나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되려 너무 오래 걸리다 보니 피의자가 먼저 자수를 하는 바람에 정선배의 결과가 필요 없게 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가끔은 수사관들이 그런 식으로 피의자와 심리전을 벌이기도 한다. 곧 조사자료가 나온다. 그 뒤에는 형량이 세질 거다. 차라리 자백을 하면 정상참작을 해 주겠다. 뭐~ 그런 식이다.
“무슨 사건이에요? 들어나 보죠!”
나는 정선배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사실 돕는다기보다는 정선배가 사건에 대한 내용을 내게 보여주는 정도다. 그리고 만약에 운이 좋으면 남자 프로파일러들이 놓치는 부분을 여성의 섬세한 시각으로 봐서 안 보이던 부분도 보이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은 대체로 항상 같은 패턴을 간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 말은 결국 프로파일러 역시 자기가 무엇을 놓치고 가는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볼래?”
정선배는 예의 그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서류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최동철씨. IT 기업가? 자살이요?”
“응! 그래. 신고는 자살로 접수된 건데 아무리 봐도 자살이라고 하기엔 애매해. 그렇다고 해서 타살의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정황도 그렇고 내 느낌도 그렇고 절대 자살 같지가 않아.”
정선배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선배. 지난 주말에 용주씨 만났는데 용주씨 동창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제 생각에는 이 사람이 그 사람 아닐까 싶은데요. 용주씨는 일 중독 끝에 자살한 것 같다고 말했지만 마약 중독이나 일 중독이나 중독은 중독이니까!”
“어쭈! 네가 그러고도 프로파일러냐? 어떻게 일 중독하고 마약 중독이 그게 그거냐?”
“선배는 일 중독해봤잖아요. 정작 본인은 몰라도 제삼자가 보면 그놈이 그 놈이에요.”
정선배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용주씨하고 만난 날, 일 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해봤어요.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 중에 뭔가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정선배는 센티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중독이 되면 사람이 험한 생각을 할 수 있지. 일단 너는 일 중독자에게 매 좀 맞고 시작하자!”
정선배는 주먹을 쥐어 내 얼굴 앞에 보이며 말했다.
“매는 나중에 맞기로 하고요. 일단 밥이나 먹고 다시 해보죠. 어때요? 햄버거?”
“싫다. 해장해야 해!”
“으음~ 선배와 주말에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있었나 본데요? 별 일이네~”
“네가 아는 사람이야!”
“누군데요?”
“거~ 있잖아. 마약반 김한일이~”
“왜요? 주말에?”
“이 친구 때문이야. 이 친구 자살 건에 마약반이 붙었어.”
“뭐예요? 이미 죽었는데 마약 혐의고 뭐고 씌울 게 없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닌가 봐. 뭔가 큰 건이 엮여있는 것 같아.”
“IT 기업가가 웬 마약? 마약이야 그렇다 있다 치고, 뭐가 엮여 있다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한일이가 그러는데 마약 유통 조직에 자금을 대고 있었다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물론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고는 하는데 말이야. 이미 죽었는데 불명예스러운 범죄 꼬리표가 붙게 생겼지. 사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정선배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 생긴 거다. 죽어서도 딱지 표를 달고 가야 한다는 것. 죽어서도 닦아내지 못한다는 거다. 그래서 정선배는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용주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선배는 이미 흘깃거리며 내 스마트폰에 뜬 발신자명을 본 것이 분명했다. 정선배는 ‘받아!’라고 말하며 먼산 바라보는 포즈를 취했다. 쪽 팔린다. 하필~ 사실 나는 벌써 용주씨를 『자갸~』로 등록해 둔 상태였다. 정선배는 마침 바꾼 지 하루도 안 돼서 그걸 보게 된 것이다.
“편하게 통화해. 난 투명인간이다.”
정선배는 한 마디 더 거들며 놀려댄다.
“투명인간이 더 신경 쓰이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업무적인 통화를 할 겁니다.”
내가 쏘아붙였다.
“뭐? 자갸~ 하고 업무적인 통화를 하겠다고?”
정선배는 웃으며 앞서 가려다 내 손에 팔을 붙들렸다.
“잠깐만요. 정말 업무적인 거예요.”
정선배를 잡아두고 용주씨의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요. 정선배가 도망을 가려고 해서 잡아두느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를 하려던 참이에요.”
“뭐예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라면 언제라도~”
“정선배 하고 스피커폰으로 할게요. 잠시만요.”
나는 스피커폰으로 변경하고 다시 말했다.
“혹시 이번에 자살했다는 동창 이름이 최동철 맞아요?”
“네.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혹시 신문에서 본 거예요?”
용주씨의 놀란 목소리가 느껴진다.
“아뇨. 정선배가 그 사건을 맡았거든요. 그런데 사실……”
나는 정선배의 표정을 살폈다. 마약 건에 대해 말해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내 사건은 몰라도 이 사건은 용주씨가 개입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정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더러 계속 통화하라는 거다.
“친구분이 사실은 마약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마약이요?”
용주씨는 많이 놀랐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마약범죄에 깊게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이상한 낌새 같은 거 없었나요?”
“글쎄요. 동창이긴 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업무적으로도 제가 하는 일과는 연결되는 것도 없었고요. 제가 주변에 한 번 알아볼까요?”
용주씨가 적극적이다.
“정선배. 어떻게 해요? 좀 알아봐 달라고 해요?”
정선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직접 입을 열었다.
“용주야. 그건 됐고 우리 유리 일이나 잘 챙겨서 마무리해라. 내건 신경 쓰지 말고. 시간 남으면 소주나 한잔 사주던가. 너희들은 어차피 내게 빚진 거 알고 있지? 난 너희들에게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용주씨는 정선배의 협박에 못 이기는 척했다. 아마 용주씨는 주변 탐문을 시작하겠지. 정선배도 이미 그가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다.
<신채은>
부산에 다녀온 후 며칠 동안 정신을 놓고 살았다. 댓글9단에 대한 상실감이 가장 큰 충격이기도 했지만 자아성찰이라고나 할까? 이번 부산여행에서 꽤 큰 걸 하나 건진 것 같아서다. 하나를 놓치고 하나를 얻었다. 나는 분명히 현장에서 깨우친 게 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모든 글쓰기를 책상 위에서 해결하려 했단 말인가? 현장에는 생생한 정보, 살아있는 정보가 팔딱팔딱 뛰며 ‘날 좀 잡아가소~’하며 나를 부르는 정보들이 널려 있었다. 희영이가 보여준 미씨 파워도 간간한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살 좀 붙이면 재미있는 기사를 한 꼭지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댓글9단의 자살사건 때문에 어두운 이야기가 되기는 했지만 연예인 윤채아와 인연이 있는 부산의 노처녀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만 파 보면 재미있는 기사 한 꼭지를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제는 기가 막히는 꿈을 꿨다. 내가 이애수씨의 막내아들과 결혼을 하게 됐다. 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사지 멀쩡한 내가 장애인으로 나왔다. 내 꿈인데 왜 나를 장애인으로 만든 것일까? 내 꿈이 아닌 줄 알았다. 아무튼 엄마의 전화로 이애수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엉뚱한 상상이었는데 ‘대체 우리 엄마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애수씨의 막내아들과 말을 하지 못하는 막내딸-그건 나다-을 결혼시키자는 내용이었다. 나보다 우리 엄마가 더 좋아했다. 우리 엄마는 이애수씨 광팬이니까~ 그런데 엄마는 엉뚱하게도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나는 엄마의 지시에 따라 씻고 옷 입고 하는 중에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갔다. 그런데 오줌이 한도 끝도 없이 나왔다. 냄새도 나고 더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해몽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좋은 꿈인 걸로 안다. 똥, 오줌은 좋은 꿈이라던데~ 결과는…… 결국 나는 꿈에서조차 이애수씨를 만나지 못했고 어마어마한 양의 오줌만 봤다. 평생 눌 오줌을 다 본 것 같다.
아마도 이 길이 내 길이라는 생각이 든 거다. 현장 기자! 나는 이제 현장을 활보하는 현장형 기자가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일단 댓글9단의 마지막 글을 뒤져봐야 한다. 댓글9단과 윤채아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접촉을 하게 된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보다 선제해야 할 것이 있다. 윤채아의 아이디다. 사돈의 팔촌의 이모부까지 동원해서라도 그녀의 아이디를 알아내야만 한다. 그래야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첫 번째 열쇠가 생기는 거다. 카카오톡을 동원하고 윤채아 팬카페라는 팬카페는 모두 가입했다.
노력 끝에 일단은 대중에게 공개된 아이디를 찾긴 했다. 뭐? 『채아당3』채아당삼이라는 건 윤채아는 당근이삼이라는 뜻인가? 뭐지? 이 촌스러운 아이디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내가 만약 연예인이라면 공개된 아이디를 쓰지는 않을 거다.
*
머리를 식힐 겸 수영장에 다녀온 사이 희영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문자와 함께. 그저 『전화요망♡』이란다. 뒤에다 하트 붙인 꼴 하고는~ 참~ 아줌마답다.
“어~ 희영아. 어쩐 일이셔?”
나는 당연히 반갑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희영이에게서는 꽤나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은아. 채은아. 아까 내가 거기 갔다 왔어. 그때 너랑 다녀온 그 아파트~”
“어~ 그래? 근데 왜? 거긴 또 뭐 한다고 다녀왔대?”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희영이는 뭔가 새로운 정보를 하나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
“어쭈? 별로 반갑지 않은가 본데? 그냥 말 안 해줄까 보다.”
희영이가 벌써 눈치를 채고 협박이다.
“아냐! 미안~ 뭔데? 궁금해.”
“음. 그게 말이지. 오늘 그 동네 지나갈 일이 있어서 혹시나 해서 그냥 한번 들려봤어. 그 이상한 느낌 있잖아. 이상하게 발길을 끄는 그런 느낌 말이야.”
희영이가 신이 난 듯 말했다.
“그래서~”
나는 보채는 투의 느낌으로 말했다.
“아무튼. 거기서 내가 누굴 만났는지 알아?”
“글쎄. 너 혹시~ 혹시~ 잘 모르겠다. 그게 누군데?”
우리 동창이나 누군가를 떠올려 봤지만 희영이를 빼고는 부산에 연고가 있는 친구는 없었다.
“너~ 들으면 놀랠 거야.”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좀~”
별 거 아니기만 해 봐라. 콱~
“나 거기서 윤채아 만났어. 대박이지?”
기가 막혔다. 당연히 놀랬다.
“그래서 말을 걸었어?”
내 말투는 벌써 흥분되어 있다.
“당연하지~”
희영이는 꽤나 신이 난 듯했다.
“뭐라고 말했어?”
“그냥 상투적인 거야. 어머~ 윤채아씨 아니세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제가 윤채아씨 팬이에요. 이렇게 말했어. 그리고 싸인 두 개 받아왔어. 하나는 네 거야. 일단 카톡으로 사진 보내 줄게. 대박이지?”
“그래~ 대박이다. 희영아. 그런데 혹시 댓글9단에 대해서 이야기했어?”
희영이 괜한 문제를 들쑤실까 염려가 되어 물었다.
“아니! 내가 짱구니? 그건 절대 안 물어봤지. 그냥 우리 동네 와서 고마워요. 혹시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러 오신 거예요?라고 물었지!”
“그래서 뭐래?”
“친구 만나러 왔대. 그런데 그냥 간다고 하지 않고 만나고 간다고 하더라. 느낌에 말이야~ 아마 자살한 걸 알고서 마음이 아파서 온 것 같더라고~”
“그 여자. 그래도 의리는 있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정말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아.”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일단 한번 알아는 봐야지. 너도 한번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정보 공유하기! 오케이?”
희영이와 통화를 마치고 잠시 후 카톡으로 윤채아씨의 싸인이 담긴 사진이 전송되어왔다. 역시 여자 연예인이라 그런지 싸인이 상당히 근사하다. 예쁘다. 꽤 신경 써서 개발해낸 것이다. 윤채아가 연예계에 입문한 지가 벌써 14년 정도 되었으니까 꽤 오래되기는 했다. 나도 연예인스러운 싸인이나 하나 개발해봐?
벌써 몇 시간째 댓글9단의 블로그를 뒤지고 있다. 하지만 윤채아의 흔적을 알 수가 없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윤채아의 아이디가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문제다. 내일 다시 해야겠다. 분명히 이 안에서 윤채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래야 내 밥줄도 안전하다.
*
밤새 댓글에 관련된 꿈을 꿨다.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만큼 내가 이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거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노트북을 붙들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하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나 같은 사람이 이 정도면 하늘이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이지. 블로그 위젯에서 표시하고 있는 새로운 댓글을 수시로 점검한다. 예전 같으면 댓글이 워낙 많으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댓글9단의 게시물이 사라진 요즘은 댓글 달리는 게 가뭄에 콩 나듯 하다. 블로그는 그만큼 관리가 생명인 것 같다. 나처럼 일기조차도 쓰지 않는 게으름쟁이에게는 블로그란 것은 가당치도 않다. 어제 올라온 새로운 댓글은 달랑 4개다. 게다가 그마저도 그 글들은 댓글9단과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고 나머지 2개는 광고성 댓글이다. 광고성 댓글이라~ 눈에 뻔히 보이는 그런 글을 다는 것을 보니 어쩌면 광고매체가 넘쳐나는 요즘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제대로 된 광고효과를 볼 수 있는 매체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광고주 입장에서는 비용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밤새 두 개의 댓글이 더 있었다.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는다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댓글을 따라갔다. 역시 광고성 댓글이다. 대충이라도 읽을 가치가 없다. 『댓글 9단님~』으로 시작되는 공식적인 멘트다. 두 번째 댓글도 따라가 보았다. 역시 『댓글 9단님~』으로 시작된다. 희망을 잃은 느낌 그대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 드래그해서 화면을 올리려는 찰나 왠지 눈길을 끄는 단어가 띄었다. 『집에 다녀왔어요』가 보였다.
“얏~ 호!”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윤채아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그녀의 아이디를 알게 됐다는 것이 이 스토리를 풀어가는 데 있어 최고의 단서다. 나는 우선 화면을 캡처해 두었다. 혹시라도 윤채아가 지워버릴 수도 있으니까. 나 역시 가끔씩 전날 썼던 글을 다시 찾아가 댓글을 지운 적이 있다. 후회가 되어서였다. 그런데 댓글 치고는 꽤 긴 것 같다. 그만큼 댓글9단과 윤채아가 가까운 사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일까? 여기서? 윤채아는 서울 태생에, 서울 토박이인 데다, 서울을 벗어나서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어릴 때 연예계에 입문해서 일반인들과 교류하기가 수월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다만, 댓글9단이 어떤 인물인지 내가 알 수 없는 게 문제다. 인터넷에 나오는 개인적인 성향 같은 것은 더욱이나 신뢰할 수 없다. 이렇게 보니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모든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는 연예인이란 삶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온갖 스트레스에 눌려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연예인들은 해외로 이민을 가는가 보다. 후미진 곳에 높은 담벼락을 세운 집에 스스로를 가둬 두고 살거나, 휴대폰마저도 일반에 공개될까 전전긍긍하며 윤채아처럼 친구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다니지 못하는 것이 안쓰럽다. 나는 윤채아의 댓글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댓글9단님~ 아니! 언니! 이제는 더 이상 아이디도 언니 이름도 부를 수 없네요. 오늘 언니 집에 다녀왔어요. 아파트 아래서 불 꺼진 언니 집을 한동안 지켜봤지요. 다시 불이 켜질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끝내 어둠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지나간 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차 안에서 언니의 상처 받은 영혼을 위로했어요. 언니가 제 기도를 들어주었기를 바라요. 언니와 함께 했던 많은 날들, 하늘이 열리고 머리가 열리던 그날, 언니는 내 부탁들 들어주었지요. 너무 고마웠어요. 언니는 끝내 그것이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라면서 언니가 외로운 길을 가 버렸어요. 저 같은 녀석을 위한 배려. 저는 언니의 착한 마음이 더없이 고마웠어요. 언니의 상처를 내가 치유해 주지 못해 미안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만남이었지만 함께 했던 우리들의 시간이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고 영원히 간직되기를 빌어요. 언니~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해요.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 날. 다시 하늘이 열리고 모든 게 열리는 그 행복하고 환상적인 희열을 다시 함께 하길 기도할게요. 편히 쉬어요. – stolen dream』
stolen dream? 도둑맞은 꿈이라고? 아이디가 왠지 로맨틱해 보이는데? 이 아이디로 검색해보면 인터넷에서 뭐라도 나올 것 같다. 나는 블로그 내의 검색기에 아이디를 두드려 넣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방금 보았던 댓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검색이 되지 않게 설정해 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전부였다. 기대에 부풀었던 나는 순식간에 허무함에 잠식당하는 것을 느꼈다.
<송유리>
요즘 들어 정선배가 부쩍 나를 더 찾는다. 지난번 최동철 건 이후다. 용주씨 때문인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중독자들끼리 뭔가 더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오늘도 살며시 문을 열어 정선배의 동태를 살핀다. 어라? 이 아저씨가 사람 불러놓고 어디로 사라진 거지? 정선배는 방에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정선배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많이 낡았다. 그만큼 열심히 일을 한다고 봐야겠지. 일 중독자의 의자라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서류더미들. 나름 정리를 한다고 한 것이 저 모양인 걸 보면 정선배가 최동철 사건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또 뭔가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싶다. 여태 그렇게 살아온 양반이니 말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진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죄다 마약에 관련된 것들이다. 아무래도 정선배는 최동철의 죽음이 마약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결론으로 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타살일 가능성이 높다더니 이제는 노선이 바뀐 모양이다. 마약쟁이들은 하나의 중독자라고 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마약은 중독이 아니라고들 주장한다. 왜일까? 그렇다고 마약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없고~
정선배라면 시험 삼아서라도 해 보고 말 위인인데, 설마 진짜로 마약을 직접 자기 몸에다 생체실험을? 나는 속으로 설마~ 설마 하며 부인하고 있지만 자꾸만 생각의 결론은 정선배가 마약을 테스트해 봤을 거라는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정선배다운 짓이니까! 만약에 정선배가 마약을 직접 해봤다면 이건 그냥 징계 수준으로 넘어갈 문제는 아닐 거다. 나라도 못 본 척해줘야 하는 걸까? 나는 또 최악의 상황까지 정선배를 끌어가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마약쟁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모습의 정선배가 그려지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내가 가진 고질적인 병이다. 어찌 보면 여자란 동물은 과대망상증을 기본적으로 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서류를 뒤지고 있었는지 또 정선배가 와 있는 것도 몰랐다. 정선배는 한동안 말없이 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을 거다.
“미안해요. 선배. 심심해서~”
나는 정선배와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지만 남의 서류들을 뒤적거리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괜찮아. 어쩌면 이것들도 다 네 사건이 되는 수가 있어~”
정선배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양반이 지금 나한테 약쟁이들 사건까지 떠넘기려고 하는 거 아냐?
“선배!”
내 입에서는 뇌의 통제권에 없는 소리가 확성기에서 터져 나오듯 튀어나왔다. 정선배가 흠칫 놀라는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 자식아!”
오히려 정선배가 더 정색이다.
“이 약쟁이들 건을 저한테 떠넘기려고요?”
나는 이미 예상이나 하고 있었던 듯이 말했다. 그러나 말을 내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정선배의 표정 때문이다. 한심한 듯이 쳐다보는 눈빛이 내 간을 발라당 뒤집어 놓는 것 같았다. 내가 완전히 헛짚은 거였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냐?”
나는 대꾸할 말이, 아니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 생각이 어디까지 다녀온 건지 모르겠다.
“미안해요. 선배! 저는 행여나 선배가 마약 공부한답시고 마약까지 직접 하셨을까 봐서 겁이 덜컥 났었어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오~ 그래서 내가 너한테 마약 한번 해 보라고 하는 거라~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에요.”
나는 화들짝 놀라 극구 부인했다.
“이 자식아! 니 얼굴에 다 쓰여 있다. 넌 표정관리가 안돼!”
나는 금세 얼굴이 시뻘게지는 걸 느꼈다. 볼 언저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미안해요.”
“하긴 네가 그렇게 볼 만도 하지 뭐. 내가 한두 번 사고 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지? 유리야?”
정선배는 다그치듯 말했지만 이미 장난기 있는 톤의 목소리였다. 애초부터 화가 나거나 한 건 아니었단 거다.
“그나저나 내가 널 부른 게 말이다. 이 사건도 네가 맡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왜요? 어차피 선배가 거진 다 풀어놨을 거 아니에요?”
정선배는 또 내게 실적을 밀어주려는 게 분명하다.
“음~ 그저 내 선물? 그렇게 말하긴 좀 그렇고 동물적인 감각이랄까? 왠지 느낌이 그래. 왠지 냄새가 난다고 할까? 아무래도 이 사건이 지금 네가 맡고 있는 사건과 아주 동떨어진 사건 같지가 않아서야.”
정선배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왜요? 전혀 다른 류의 사건인데요. 대체 어떤 점에서 그런 생각을 하시게 만들었을까요?”
“아니. 그냥 촉이야. 오랜 시간 이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거지. 하나의 내공이라고나 할까? 내 생각이 정확하다면 이 두 그룹의 사건, 아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세 그룹이겠지. 세 그룹의 사건이 평행선을 달리다 합쳐지는 지점이 있을 거야. 너랑 용주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아니~ 또 잘 나가다가 왜 또 남의 사랑에 비유를 하고 그러세요?”
“오호~ 사랑이라? 너희들 벌써 그렇게까지 진전이 있었구나?”
나는 정선배에게 한마디 하려다 그래 봐야 말씨름만 깊어질 것 같았다. 정선배는 서류더미 중에 하나를 꺼내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다.
“유리야. 이것 좀 봐라. 한일이한테서 받은 자료에서 보고 따로 조사해 본 건데. 최동철은 꽤 오랜 기간 동안 마약을 해 온 게 아니었어. 확인해 봐야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아마 조상환은 최동철의 자금이 필요해서 접근했을 수도 있어. 한일이 얘기로는 조상환이라는 놈이 마약 유통업계에서 그다지 높은 밸류를 가진 자가 아니었대.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크게 부상했다는 거야. 그 말은 결국 누군가 자금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말이 되지. 최동철은 조상환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은 거야. 최동철이 경영하던 회사는 미래가 보장된 회사나 마찬가지였어. 물론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는 대단한 IT 기업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빵빵한 자금 덕분에 어떤 사업이라도 새롭게 시도해 볼만은 했을 거야. 아까운 사람이야. 마약 하나가 미래가 보장된 젊은 사람의 인생을 한 순간에 망가뜨렸으니까~”
정선배는 서류를 뒤적거리다 한 페이지를 찾아 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숫자로 가득한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회사 수익금에 대해 정리된 회계자료였다.
“이건 지난해 공개된 자료야. 빵빵하지. 앱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어. 나도 좋은 아이템 있으면 앱이나 하나 만들어서 편히 먹고살고 싶다.”
“퍽이나요~ 선배는 이 일 못하면 정신병 걸릴 것 같은데요.”
정선배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말했다.
“자~ 이것 봐라. 자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말이야. 코스모스 시스템이라고 보이지? 그거 유령회사야. 내 생각에는 그 회사가 마약에 자금을 대던 회사 같다. 사장은 바지사장이 분명하고. 바지사장은 회사가 어떤 업무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거야. 그냥 좋은 의자에 앉아 낮잠이나 자고 결재서류에 도장이나 찍어주다 퇴근하는 게 일이겠지. 벌써 한일이한테 알려줬는데, 아마 꼬리가 잡히는 대로 뭔가 나올 거야. 검찰에서 좋아서 난리가 나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한번 더 죽이는 꼴이지. 뭐~ 마약 건만 아니라면야 나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겠냐?”
“아~ 그래서 정선배는 나머지 악역을 저더러 하라는 거군요?”
정선배는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망울을 하며 내가 이 사건을 맡아주겠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알았어요. 이런 거야 뭐. 저는 양심상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선배는 또 일 다 해 놓고 저한테 넘겨도 되는 거예요?”
“아니!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어. 그건 네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신채은>
정보원! 그래. 나도 드디어 정보원이 생겼다. 현장에서의 생생한 정보를 끄집어내려면 정보원이 필요하다. 현장형 기자로서의 나의 첫 번째 정보원은 희영이다. 희영이의 활약은 이미 내게 큰 성과를 가져다준 셈이다. 대체 어디서 구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윤채아의 아이디를 이렇게 쉽게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만약에 희영이가 아파트에서 윤채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 댓글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을 테니까. 여기까지 온 건 어쨌거나 정보원 희영이 덕분이다. 나는 밤새 윤채아가 남긴 글을 두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대체 하늘이 열리고 머리가 열리고, 또 모든 게 열린다는 게 무슨 뜻일까? 혹시 이들은 이상한 종교집단 같은 데서 만나게 된 사이 아닐까? 댓글9단이 먼저 자살하게 돼서 윤채아는 마음이 아픈 것은 아닐까? 그런데 고맙다는 건 뭘까? 다시 만나자는 건 윤채아 자신도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자기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면 이상한 종교집단과 관계된 것이 확실해 보이긴 하다. 그래! 모든 게 열리는 그 행복하고 환상적인 희열 그리고 기도하겠다는 것만 봐도 윤채아는 종교적인 문제로 댓글9단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댓글9단의 게시물 중 어디에서도 종교에 관련된 내용은 본 적이 없다. 댓글9단의 글들은 아마 본인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종교집단에 관한 전문지식을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지? 일단 신문사에 근무하는 서재일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나 마나 부탁할 게 있으니까 전화한 거라고 욕이나 먹겠지. 신호음이 제법 길다. 바쁜가? 포기하고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하는 사이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어쭈! 방어적인데? 이번에는 또 뭐냐?”
서재일 선배는 당연한 듯 물었다. 하긴, 사실 미안하긴 하다. 선배랍시고 후배들 잘못 두는 바람에 허구 한날 심부름이나 해 주는 꼴이니 말이다. 나 같은 후배가 선배에게는 꽤 많다. 그야 뭐! 다~ 잘난 탓이다. 많이 아는 걸 서로 공유하는 게 미덕 아닌가? 이번에는 밥이라도 한 끼 사 먹이며 물어야겠다.
“형! 이번에는 밥이나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네가 무슨 일이냐? 중요한 건가 보네? 그렇다면 싼 거 먹으면 안 되겠는데?”
선배 역시 선수 치는 거다.
“형! 우선 이 질문을 듣고 답을 낼 수 있는지부터 파악하고 나서 결정할게요.”
“뭘 결정해?”
“비싼 걸 사주냐 마느냐 하는 거 말이에요.”
괜히 선배도 모르는 걸 묻겠다면 밥을 사줘 봐야 헛돈만 쓰는 거니까. 내가 너무 쪼잔한가?
“뭔데?”
“형은 혹시 사이비 종교 같은 거 잘 알아요?”
“야! 너는 기자생활이 대체 몇 년인데 그런 걸 묻고 그러냐? 기자라면 그 정도는 기본적인 소양이지. 네가 정치부 기자도 아니고, 경제부 기자도 아닌데 그런 걸 몰라? 아니지~ 걔들도 그 정도는 알겠다. 그리고 너네 회사에는 물어볼 사람 없어? 너 혹시 왕따야?”
선배는 학생 때 마냥 또 쏘아붙인다.
“어휴~ 그런 게 아니고요. 그럼 됐어요.”
난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미안해. 삐치는 건 어째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를 않는구나. 사이비 종교라면 나도 잘 알지. 뭔데 그래?”
“아녜요. 만나서 이야기해요. 형 편한 날짜, 시간 잡아서 연락 주세요.”
나는 선배의 문자를 기다리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에는 자잘한 업무들이 많다. 짧은 기사들. 즉, 서평이나 간단한 자투리 기사들을 후다닥 써버리고 나니 오후 시간이 다 지나버렸다. 그런데 아직까지 메시지가 없다. 뭐지? 털레털레 회사 문을 나서자 눈에 띄는 사람이 서 있다. 재일 선배다. 저런 대책 없는…… 학생 때나 지금이나 대책 없이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다.
“형! 뭐예요?”
나는 반가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을 갈무리했다.
“내가 몇 시에 나올 줄 알고~”
“네까짓 게 뭐 어디 갈 데나 있냐?”
“형!”
나는 소리를 꽥하고 질렀다. 재일 선배는 내가 1학년 때부터 내게 ‘네까짓 게’라며 항상 뭉개 왔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히려 제삼자가 더 기분 나쁠 소리지만 우리는 이미 그 정도는 극복한 사이다.
“야! 갈비찜 먹자. 매운 갈비찜으로~”
“메뉴부터 정한 건가요? 어차피 먹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됐다 싶어서 오셨군요.”
“딱 걸렸네! 싫어? 나 그냥 갈까?”
나는 선배가 억지를 쓰는 걸 안다.
“가욧!”
우리는 직장인들의 마음의 고향, 빌딩 숲 뒷골목의 먹자촌으로 기어들었다. 역시 시간이 시간인지라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식당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선배의 발걸음을 좇아 선배의 단골집으로 따라갔다. 이미 당연히 올 것이라는 걸 알고나 있었던 듯 선배는 예약석을 향했다. 헉! 룸 안에는 아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여기. 유명한 신채은 기자님 오셨습니다.”
선배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좌식으로 된 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전에 선배 소개로 만났던 선배의 동아리 사람들이었다.
“뭐예요!”
나는 선배의 정강이를 살짝 찼다. 그런데 선배는 오버액션을 하며 쓰러졌다. 비명과 함께……
“이 자식이 선배를 패네~”
나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내 눈에 띈 한 사람 때문에 열을 식히기로 했다. 잘 생겼다. 나는 예의범절을 녹여 내린 듯 모범적이고 가식적인 표정으로 인사했다.
“어머~ 오랜만이시네요. 저는 선배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냥 왔는데 제가 폐를 좀 끼쳐야겠어요. 죄송합니다.”
물론 내 눈은 잘 생긴 청년에게 꽂혀있다. 그는 벌써 내 시선에 부담을 느꼈는지 소주를 들이키며 살며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
“그래! 궁금하다는 게 대체 뭐야?”
동호인들과 한참을 마시다가 내게 돌아온 재일 선배가 말을 걸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잘생긴 청년의 옆자리가 빈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차지한 나에게 축복과 행복을 하사해 주실 잘생긴 청년을 쫓아내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멀리 있는 원래 내가 앉았던 자리로 말이다. 사실 선배가 그 친구를 도와준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 친구의 표정에서 안도의 빛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뭐야? 형, 정말 너무한 거 아냐? 기껏 작업 좀 걸어보려는데 이렇게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거예요?”
나는 선배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물론 표정은 아주 온화하게 지었다. 그러자 선배는 내 귀를 살며시 잡아 고개를 돌렸다. 아니 따지자면 선배가 내게 귓속말을 하기 편하게 내 얼굴의 방향을 돌렸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너. 여기서 작업 걸다간 우리 애들한테 맞아 죽어. 넌 이제 20대 애들하고 싸우면 힘으로도 못 이기잖아. 그냥 얌전히 있어라. 쟤를 노리는 애들이 한 백 명은 될 거야. 오래 살고 싶으면 처신 잘해. 괜히 나까지 곤란하게 하지 말고.”
선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의 목소리에서는 그야말로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모임의 여자들의 눈에서는 잘생긴 청년을 향해서 하트를 인정사정없이 뿅뿅뿅 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에 비하면 내가 날린 관심의 하트는 조족지혈 그 자체였다. 난 원래 포기가 빠른 여자다. 그리고 힘든 것, 어려운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바로 신경을 꺼버렸다. 나는 나의 이런 디지털적인 감정 신호체계가 맘에 든다. 온/오프가 확실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생각이 옮겨왔다.
“형! 아까 말한 것처럼 말이에요.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나는 선배에게 윤채아의 댓글 내용에 대해서 설명했다. 물론 윤채아에 대해서는 노출하지 않았다. 이건 다음 달 특집기사가 될지도 모르는 내 밥줄이니까. 선배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런데 나와 선배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거 사이비 종교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그의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배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거 완전히 변태 사이비 종교 맞는데~”
나는 또다시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자~ 잠깐만요.”
나는 테이블 모퉁이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 세 사람이 함께 이야기하기가 편할 것 같아서다.
“자~ 다시 말씀해보시죠. 한 분은 사이비 종교다. 한 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그런데 이 분은 누구죠?”
나는 선배의 얼굴을 보았다. 선배는 손 끝으로 옆 남자에게 펼쳐 보였다. 직접 소개하라는 거다. 나는 사실 이 남자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너무 평범해서 그랬나?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
“아까부터 앉아 있었는데 제게는 눈길 한번 안 주시더군요. 저는 반용이라고 합니다. 성이 반이고 이름이 용입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딴 데 정신이 나가 있었어요.”
내 같잖은 변명에 반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묘한 웃음을 지었다. 살짝 부끄러웠다. 희영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반응했을까? 나는 부산에서 용감한 미씨 파워를 보여준 희영이가 언젠가부터 멘토처럼 되어 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넘~ 넘~ 멋졌으니까~
“저는 신채은이라고 해요. 요 앞 조그만 잡지사에서 허접한 글을 쓰고 있고요.”
나는 일부러 나를 낮추어 말했다. 지덕체를 겸비한 나의 모습이란~
“저는 이미 채은씨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지난번 오셨을 때 자기소개하셨고요.”
“아~”
나는 그의 말에 그저 ‘아~’하는 소리밖에 할 게 없었다. 반용이라는 남자에 대한 존재감은 처음 알게 된 것이니까.
“그래요. 그런데 왜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고 하시는 거죠?”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전혀 이상할 것 없이 생각했는데 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선뜻 이야기를 하기가 꺼려지는데요. 제 생각엔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마약 같아요.”
나뿐만 아니었던 것 같다. 재일 선배 역시도 황당하다는 눈치다.
“왜죠?”
“그게 말이죠. 솔직히 이런 말을 해서 좀 이상한 눈으로 볼 것 같은데요. 제가 유럽에 공부하러 갔다가 저도 어쩔 수 없이 약에 손을 댔거든요.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이 제대로 표현된 건가 모르겠지만요~”
반용은 조심스럽게 말했고 선배나 나나 모두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자 반용은 반색을 했다.
“괜히 말했나 싶네요.”
그는 우리의 반응 때문에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아~ 죄송해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그만~”
나는 그의 입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재빨리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눈치다. 나는 선배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씰룩거려 보였다. 어떻게든 해 보라는 거다. 선배는 그제야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유럽여행 때 베네치아에서 경험 있어~ 하지만 용이 니가 하는 말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나는 선배의 말에 한번 더 놀랬다. 이런 게 경험의 차이인가?
“하긴. 형도 베네치아까지 가서 그냥 왔을 리가 없겠죠. 채은씨~ 만약에 지금 제가 하는 말을 편견 없이 들어주실 거라면 말씀해 드릴게요.”
그가 나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네. 편견 없이 들어볼게요. 죄송해요. 아직 저는 기자가 되려면 멀었나 봐요. 아직도 눈과 귀에 필터가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정말 솔직한 말이다. 무엇이든 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언제나 내 나름대로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니 뭐든 제대로 들을 수 없었을 거다. 『Good year』를 전라도 말이라고 생각하면 『구시여』라고 들리는 것과 같은 거다. 반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형보다 경험이 좀 많아서일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마약류가 불법이지만 이탈리아에는 당시 마약 카페가 있었어요. 요즘에는 모르겠네요. 하여튼 제가 있을 때는 자주 다녔어요. 그러다 거기서 제공하는 마약류에 만족을 못해서 더 센 걸 원하게 됐죠. 정부에서는 그걸 마약 중독이라고 말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중독이 아니에요. 의존증에 가깝다고 봐야 해요.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긴 합니다. 하긴 그것도 따지자면 마약을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기도 하지만요. 그들은 마약을 담배나 술보다 의존도가 낮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 저는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완전히 끊었어요. 저는 굳이 마약에 의존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술이나 담배처럼 어렵게 끊은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술, 담배 끊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네요. 그런데 마약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마약은 중독 자체가 문제가 아니에요. 마약은 삶을 망가뜨리죠.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일수록 마약을 하면 안 돼요. 완전히 의존을 하게 되거든요.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게 되죠.”
그는 잠시 말을 쉬더니 소주 한 잔을 입에다 털어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채은씨가 말한 걸 마약이라고 하냐 하면요. 하늘이 열리고 머리고 열리고 모든 것이 열린다고 하셨던 것 때문이에요. 한국에서는 마약 하는 사람들이 ‘열린다’는 표현을 한다더군요. 마약을 어느 정도 심하게 하다 보면 그 열린다는 의미를 알 수 있어요.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는 다시 말을 끊더니 선배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형. 이런 것도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그는 선배의 답을 원하는 듯했지만 내가 먼저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말씀해 주세요.”
아마 내 두 눈은 반짝거리고 있을 거다.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 이색적인 이야기다.
“그래! 해줘 봐. 나도 궁금하다. 그게 뭔지 말이야.”
선배도 꽤 호기심 어린 표정이다.
“그게 말이죠. 어떤 기분이라고 해야 하느냐면요. 하늘이 열린다. 머리가 열린다는 말처럼…… 그냥 열려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내 몸의 모든 감각이 최고조에 달해요. 오감을 뛰어넘어 육감까지도요. 예를 들어 창 밖의 귀뚜라미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것 같고, 저 멀리 나뭇가지 위에 있는 새가 눈 앞에서 날갯짓을 하는 것 같고, 입 안의 혀로 모든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늘로 날 수 있을 것도 같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도 다칠 것 같지 않아요. 그게 열린다는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마약에 대해 알고 있던 기본적인 상식에서 조금 더 업데이트된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열린다는 표현이 정확하게 어떤 건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게~ 그러니까. 뭐~ 엄청 기분이 좋다는 거네요?”
나는 뭐라고 물어봐야 할 지조차 모르겠다.
“그러니까 말이지. 술, 담배는 뭐랄까 뒤끝이 좀 있잖아. 술 마시면 처음 마실 때 기분은 좋은데 아침에 머리 아프고 하는……”
이번에는 선배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죠.”
나는 지난번 과음했을 때를 기억해보려 애쓰고 있다. 숙취에 머리 아프던, 과음에 속이 쓰리던~
“그런데 말이야. 마약은 뒤끝이 없어. 물론 본드, 가스 뭐 그런 것들은 뒤끝 작렬이라고 들었어.”
“선배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릴 때 껄렁껄렁 놀던 친구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거든.”
“그럼 그 친구들은…… 지금은 어때요?”
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마약을 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말씀하세요.”
“이런 건 좀 말씀드리기 그런데요. 아니~ 이건 넘어가죠. 모르시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알 필요는 없는 거니까요. 그렇죠? 재일이형!”
그는 재일 선배를 보았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호기심이 더 솟구쳤지만 남자들만의 말 못 할 것이 있는가 싶어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휴지가 모자라 똥을 대충 닦고 나온 것 마냥 찝찝했다.
<김한일>
몇 년 전에 영종도 인천공항 인근에 있는 국제업무단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지인에게서 들은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있다. 여름이었다고 들었다. 어느 날 긴 흰머리를 한 삐쩍 마른 남자가 가게 안을 기웃거리더라고 했다. 워낙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곳인 데다 그 남자의 풍채가 외국인 같아 보였단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 남자가 또 가게 안을 기웃대더라고 했다. 내 지인은 당연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변에 있는 호텔 손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그 남자가 다시 찾아왔다. 지인은 말을 걸어볼 요량으로 그에게 다가갔는데 그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곤 한 일주일 정도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은 공항에서 쓰는 카트 하나가 국제업무단지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길 건너편에서 카트를 밀고 있는 사람은 그 외국인이었더라고 했다. 지인은 가깝게 지내는 식당 주인에게 그 외국인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업무단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궁금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가깝게 지내는 식당 주인이 와서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남자. 외국인 노숙자래. 그 영화 있잖아 톰 행크스 나오는 영화 터미널인가에 서처럼 공항에서 먹고사는 사람. 오늘 그 남자가 식당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어서 경찰에 신고를 해서 잡았는데 그 남자가 일본어로 욕을 하면서 카트도 내버려 두고 도망치더래. 딱히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고 해서 체포할 수가 없어서 그냥 내버려 뒀다나 봐.”
그래서 식당 주인들은 그 남자를 불쌍히 여겨 그다음 날에도 나타난 그에게 밥도 주고 그랬다고 한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그 남자의 도의적으로 선의를 베풀어준 식당에서 주인이 다른 데 신경을 쓰는 사이에 돈을 훔쳐서 달아났다가 끝내 경찰에 잡힌 거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 노숙자였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고급 카트를 밀고 다니는 노숙자였을 거라고 했단다.
*
그런데 지금 내 손에 잡힌 한국인이 바로 그런 놈이다. 이 놈은 중국인 행세를 했다. 내게 잡히자마자 놈이 한마디 했다.
『니 스 쉐이~』
그래서 내가 말했다.
“새꺄! 난 대한민국 경찰이다. 중국 사람 흉내를 내려면 발음이나 똑바로 해라!”
난 요즘 하도 중국인 범죄가 많아서 짬을 내 중국어 공부를 하던 참이었는데 이 자식은 나보다 더 발음이 안 좋았다. 어디서 배운 건지는 몰라도~
일단 우리는 후미진 곳으로 가는 중이다. 우리라는 집단에는 니스쉐이 이 자식과 나 둘 뿐이다. 물론 수갑을 채웠다. 그것도 두 개나.
*
“자! 우리 이제 한바탕 해볼까?”
나긋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시작부터 편안하게 취조해 보려는 거다.
“우리! 경찰서로 안 갑니까?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그리고 미란다 원칙 같은 거 안 합니까?”
니스쉐이가 대들었다. 골통 새끼!
“자! 그렇게 삐딱하게 굴지 말고~ 우리 여기서 협상을 하던가 아니면 정말 니가 원하는 대로 서로 가던가 하자. 모든 건 니 결정에 달린 거지~”
“뭐? 이 새끼가 어디서 반말을 직직 하고 지랄이야. 당장 안 풀어? 이런 멍멍이 같은 새끼를 봤나! 멍멍멍 멍멍멍”
이 자식이 초장부터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구나.
“야~ 이. 으르렁. 컹컹. 멍멍. 왕왕! 으르렁~”
이 자식이 이제야 말 길을 알아듣는 것 같다. 똥개 주제에 사냥개한테 대들기는~
“자! 협상안은 이거야. 너 조상환 알지? 불어!”
나는 다짜고짜 조상환의 행방에 대해 요구한 거다.
“난 그 사람 모르요!”
어쭈. 초반부터 버티기라 이거지?
“이 새꺄! 내가 다 알고 왔어. 너 이번에 나한테 잡힌 걸 다행으로 알아. 딴 녀석들한테 잡혔으면 이 자식들이 진급하려고 너를 아주 쪽쪽 빨아먹으려 들었을걸? 넌 당연히 전부 다 불었을 거고. 니가 지금 몇 범이더라. 음~”
“12 범입니다.”
니스쉐이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알아. 알아. 폭력 3범, 강간 2범, 마약 7범. 그런데 이번에 잡혔으면 뭐가 다른지 잘 알잖아.”
“뭘 말입니까?”
이제 좀 순순해지려는 것 같다. 나는 일부러 간을 좀 봤다.
“이번에 나 말고 다른 놈들한테 잡혔으면 넌 최소 5년이었어. 최소. 알잖아. 니가 있는 돈 없는 돈다 끌어대서 1억짜리 변호사 사게 되어 운이 좋을 경우에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마약 유통이지 아마?”
이제 니스쉐이의 반응을 지켜보는 거다. 이 자식이 저 자리까지 올라간 거 보면 산수는 충분히 빠른 놈일 텐데~ 지금 저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산수를 때리고 있겠지?
“그래서 뭐요? 대체 내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어~ 그래 그래! 이제 좀 파악이 되시는구먼. 자! 보셔! 조상환 불어. 어디 있는지!”
“지금 내 목숨하고 바꾸자는 거요?”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는 거야. 어차피 내 동료들에게 잡혔으면 넌 어차피 다 불고 재수 없으면 10년 이상을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 나한테 조상환이에 대해 불면 그건 너와 나만 아는 사이고. 난 조상환을 잡아들일 거야. 당연히 너는 자유가 되는 거고. 그런데 네가 나한테 조상환이에 대해 불지 않으며 어떻게 될까? 내가 어쨌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조상환이를 잡아들이겠지? 그러면 난 니가 불었다고 할 거야. 어쩔래? 이 정도면 충분히 거래가 될 텐데?”
난 다시 니스쉐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자식 표정이 완전 똥 씹은 표정이다. 썩었다. 기다려야 한다. 아~ 표정관리 어렵네. 이건 사실 뻔한 결과인데~
*
사실 이 자식을 검거한 건 트릭을 좀 쓴 거다. 마약사범들은 공통적인 문제점이 있다. 의리 같은 건 신발 바닥에 붙은 개똥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거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라는 개념이다. 이런 건 그들끼리도 서로 아는 사실이다. 나는 조상환의 하부조직에 선을 댔다. 역시 한 놈을 잡아 거래를 했다. 눈감아 줄 테니 한 놈 불어라. 이건 보통 검사들이 하는 방식이다. 내가 써먹었을 뿐이다. 우리 경찰에서는 봐주는 걸 무기로, 검사들은 감형해주는 걸 무기로 거래를 한다. 그 자식은 10분도 고민하지 않았다. 니스쉐이가 조상환의 물건을 공급받고 있다는 정보였다. 물론 니스쉐이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거래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니스쉐이는 도망칠 수 없다. 그리고 이 자식은 지금 내가 혼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혼자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들이 내 손에서는 풀려났지만 머지않아 누군가에게 또 잡힌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서 말이다. 망둥어 같은 놈들이다. 아무튼 이런 건 자기 살자고 친구를 팔아버리는 약쟁이들의 오랜 습성이고 영원히 바뀔 수가 없다.
팀장은 지금 내가 이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지금은 팀장을 신뢰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무능해 보여서다. 역시 우리 일은 낙하산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현장 경험도 부족한 사람이 성과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최동철을 죽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팀장의 행동 때문이었다고 해도 된다.
<송유리>
지금 내 손에 새로운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 들려져 있다. 드디어 뭔가 걸려들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수사보고서다. 현장 수사보고서. 다른 지역에서는 별다른 징후가 없었는데 부산에서 드디어 터졌다. 두 여자가 이수영을 찾아왔었다는 거다. 자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지만 경비의 말로는 둘 다 서울 말투에 세련된 스타일의 젊은 여자였다고 진술했다. 의심스러운 여자들이다. 부산에는 현장 주변 CCTV 등을 이용해 두 여자의 인상착의 등을 파악해 달라고 요청해 두었다. 이제 좋은 소식만 들려오면 된다. 드디어 수사에 불이 붙은 것 같다.
*
하루 만에 부산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두 여자에 대한 정보는 방금 이메일로 받아두었다. 한 여자는 부산에 거주하는 유부녀이고 한 여자는 잡지사 기자란다. 대체 뭘까? 냄새를 맡은 걸까? 일부러 비밀에 부친 사건인데 벌써 언론이 냄새를 맡았단 말인가? 지금 밝혀지면 사건 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데 큰일이다. 일단 잡지사 기자를 먼저 만나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이메일에는 두 여자의 신상에 대한 자료가 들어있다. 너무도 멀쩡한 여자들이다. 둘은 대학 동기다. 들었던 대로 한 여자는 유부녀에 무직, 한 여자는 잡지사 기자라~ 이름은 어째 익숙한 것이 무명 기자는 아닌 듯한데~ 나는 전화기를 들고 고민을 하고 있다. 대체 뭐라고 하며 접근을 하는 게 맞는 걸까? 범인일까? 그런데 부산에서는 어떻게 두 사람의 신상파악이 이렇게 빨리 된 거지? 설마 탐문수사를 하거나 한 건 아니겠지? 내가 지금 별 걸 다 고민하는구나. 이 여자가 범인일 가능성은? 아! 대체 고민할 걸 고민해야지. 기껏 단서 하나에 이딴 고민을 해야 한다니. 범인은 두고 또 고민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피의자는 모두 사망한 상태가 아닌가? 황찬욱을 살해한 자만 찾으면 되는데. 대체 내가 누구를 찾으려 하는 걸까? 대체 범인이란 게 존재하기는 한 걸까? 분명히 이 사건들은 두 개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있을 수 없다. 아니! 있다? 그래! 있다고 가정해보자. 있다면~ 왜? 누가? 어떻게? 하지만 어느 하나도 연결되는 게 없다. 모두들 피해자와 피의자 관계가 명확하다. 제삼자의 개입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범인이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유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느 하나도 성립되는 게 없다. 일단 신채은이라는 기자를 만나봐야겠다. 오랜만에 외근이다. 차라리 잘 된 거지. 나는 더 이상의 고민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바로 신채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
꽤 정직하게 생긴 스타일의 여자다. 왠지 기자생활 하기에는 좀 순진해 보인다. 32살이라는 나이 치고는 좀 더 들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성격은 그다지 까칠해 보이지는 않는다. 나름 세련되어 보이려 신경을 쓴 것 같지만 원래는 수더분한 스타일이 분명하다. 끝에만 살짝 웨이브 진 머리칼이 조금 도시 여자 같아 보일 뿐 전반적인 분위기로는 선머슴과의 여자 같다. 다만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진중함이 있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기자라는 직업을 알고 봐서 그런 걸까? 작은 눈이 제법 예리해 보인다. 오뚝한 코는 자존심이 없어 보이지는 않고. 아~ 참! 내가 또 뭘 하는 거지? 또 분 석질이구나. 저 여자보다 사실은 내가 더 문제다.
“처음 뵙겠습니다. 송유리입니다.”
*
“경찰에서 제게 무슨 일이죠?”
신채은은 당당한 척하고 있지만 겁을 내고 있다. 뭐~ 이건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실제 범인들은 이보다는 당당한 편이다. 대체로 경찰 선에서 수사가 끝나는 잡범들이 아닌 자들은 상당한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 든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명배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정에서 거의 모든 게 드러난다. 표정이라고 하는 것은 얼굴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은 물론 긴장으로 인한 피의 흐름으로 드러나는 혈색 그리고 긴장과 완화를 그대로 표현하는 동공의 변화가 그것이다. 사실 그뿐만은 아니다. 몸의 미세한 떨림, 제스처, 자세, 목의 울대, 잔털의 긴장도 등 유심히 살피자면 생각보다 많은 증표가 있다. 본인만 모를 것이다. 아마 거울을 보면서 대화를 한다면 금세 거짓을 말하길 포기하고 자수할지도 모른다. 일단 신채은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없는 여자다. 일선의 형사들이나 수사관들이 구닥다리 수사법이 아닌 최신 수사기법을 제대로 습득만 한다면 정확한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지만 대부분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아니! 그들은 공부하는 것을 꺼려한다. 때로는 자신의 경험을 더 자신한 나머지 최신 수사기법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 말은 즉, 경찰이나 검찰 역시 극도로 보수적인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저는 지금 신채은씨를 수사할 목적으로 만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해 마시고요. 이수영씨 자살사건에 대해 조사하다가 신채은씨가 이수영씨 자택까지 찾아간 것을 확인하고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바쁘신 시간을 부탁드린 겁니다.”
신채은은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굳은 표정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일반인의 반응이다.
“댓글9단. 아니 이수영씨가 자살한 게 저랑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신채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가 긴장을 좀 풀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너무 긴장하는 것 같다. 보통~ 기자라고 하면 자신감도 넘치고 이런 정도의 수사에는 오히려 당당해야 더 정상일 것 같다. 내가 생각지 못한 뭔가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신채은씨! 긴장 푸시고요.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신채은씨를 조사하려고 만난 자리가 아닙니다. 만약 정식으로 수사할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제가 찾아올 이유도 없어요. 오히려 신채은씨가 저희 쪽으로 오셨어야죠.”
나는 가급적 부담스러운 단어를 쓰지 않도록 말을 가렸다.
“아~ 그렇군요.”
신채은은 이제 내 말이 이해가 되는 듯 긴장한 눈빛이 조금 풀어졌다.
“두 분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알고 싶은데요.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부담스러운 것이 있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식 수사 같은 게 아니니까 부담스러워하지는 마세요.”
“저기~ 그런데 왜 저를 소환하지 않고 이런 사적인 자리로 불러내신 건지 궁금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수영씨의 자살사건을 조사하고 계신다면 정식으로 출석요구를 하시는 게 절차상 맞지 않나 싶은데요?”
신채은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제야 기자로서의 본질을 찾은 건가?
“미안합니다. 지금 자리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비공식적 자리가 맞습니다. 현재 수사 역시 아직도 비공식적인 수사라고 할 수 있고요. 자세하게 설명드리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면 수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신채은씨는 이 사건의 중요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입니다. 사견입니다만 월간지 기자인 신채은씨가 부산까지 이수영씨를 만나러 간 것은 제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더군다나 신채은씨는 이수영씨가 자살한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부산에 다녀온 이후로 경찰이 저를 미행하거나 한 건가요?”
신채은이 꽤 불편한 표정을 보인다. 당연한 반응이다. 누군가의 감시에 있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신채은씨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된 것도 기껏해야 하루밖에 안됐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야 신채은씨의 기사를 몇 번 읽은 적이 있었죠. 단지, 그 기사의 주인이 신채은씨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죠. 저는 작년에 신채은씨가 쓰셨던 글들 중 독특한 시각으로 쓴 강렬한 기사들이 제 불편했던 심경에 와 닿는 글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당시…… 아니, 그건 됐고요. 음~ 어쨌거나 저는 어제 신채은씨가 부산 이수영씨의 집에 다녀간 사람이란 수사보고를 받고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나는 신채은이라는 이름이 왠지 눈에 익는 듯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봤었다. 그녀에게 말한 것처럼 지난해 나는 신채은씨가 쓴 기사를 탐독한 적이 있었다. 단지, 그 기사를 쓴 사람이 신채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용주씨를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진 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당시는 복잡한 심경이 있었던 시기였다.
“부끄럽네요. 그 글들은 사실~”
신채은이 뭔가를 말하려다 고민이 되는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신채은이 불편한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 이야긴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으니 그냥 건너뛸게요. 대신에 이수영씨의 자살사건에 있어서 제게 어떤 점이 궁금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신채은은 이제야 기자 본연의 모습을 찾은 듯 당당해졌다. 자신을 범죄자로 몰거나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받아들인 듯하다.
“그러지요. 우선은, 신채은씨가 부산에 가게 된 이유가 제일 궁금합니다.”
“아시다시피 오로지 이수영씨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죠?”
내 질문에 신채은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아니! 난처해하는 것 같다. 쉴 틈 없이 몰아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제 기사 때문이었어요.”
“이수영씨가 어떤 기사와 관련이 있나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채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불편해 보인다.
“그걸 꼭 말해야 하나요?”
“지금은 정식 수사가 아니라 말씀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정식으로 수사가 이루어진다면 불편해질 수도 있겠죠.”
“잠시만요. 시간을……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이건 제 개인적인 치부를 드러내는 문제라서 정말 심하게 고민되네요.”
“그러시죠.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스마트폰을 열어 신채은의 기사들을 다시 검색했다. 지난해 읽었던 것들 외에 다른 기사들을 하나 선택해 읽기 시작했다. 짧은 사설이다.
『겨울아이 – 이종용의 겨울아이를 수지라는 어린 여가수가 다시 부른다. 어릴 적 기억이 난다. 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먼지와 이웃하던 낡은 레코드판을 뒤져 구닥다리 턴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올리며 오래된 음악들을 틀어 보았던 적이 있다. 턴테이블의 짧은바늘이 레코드판의 보일 듯 말 듯한 트랙을 따라 돌며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부모님께서 모아 두신 레코드판들은 모두 구닥다리였다. 그것들이 발매되었을 당시에는 ‘최신’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이지만 지금은 ‘구닥다리’라는 수식어로 바뀌어 버렸다. 하춘화, ABBA, 조용필, 이미자 등 어린 내가 봐도 아는 가수들의 음반이 많았다. 그중 박정희대통령연설을 담은 레코드판도 있었다.
이종용의 앨범은 그중 하나였다. 많은 레코드판 중에 제일 처음 작동시킨 음반이 이종용의 것이었다. 난 이종용의 레코드판 재킷에 적힌 제목 중 ‘겨울아이’라는 노래 제목에 눈길을 빼앗겨 버렸다. 제목 자체가 너무 시적이었던 것이다. 재킷 안에 들어 있던 가사집은 감성이 순수했던 어린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더 이상 가사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손으로 턴테이블을 작동시켜 보았다. 당시 CD플레이어로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던 내게 있어 레코드판을 연주하는 턴테이블은 그야말로 선사시대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치지직’ 하는 귀에 거슬리는 잡음 뒤에 따라오는 기타 소리는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웠다. 그날 이후로 ‘겨울 아이’는 나만을 위한 노래가 되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기타를 배웠고 겨울아이를 정확하게 연주했다. 고사리 같은 통통하고 손가락 마디가 짧은 손으로 말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다른 곡들은 몰라도 ‘겨울아이’만큼은 완벽하게 연주한다.
난 겨울에 태어난 아이다. 1월 생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밑도 끝도 없이 이종용이란 가수와 그의 노래 ‘겨울아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그저 ‘공유함’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알건 모르건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그의 레코드판에 담긴 노래 제목 그 자체에서부터 우리의 공유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인간은 서로가 닮은 구석을 찾았을 때 상대방에 대해 더 궁금해지는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게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공유 속에 있는 사람이 이성이라면 지금 당장 바로 다가서기 바란다. 한 가지를 더 공유해야 할 때다.』
*
이 사설도 정말 멋진 것 같다. 이런 감성이 있는 여자라니. 다시 보인다. 이 여자는 눈을 감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도 고민스러울까? 생각할 시간을 더 주기 위해 다른 기사를 하나 더 읽으려는 차에 신채은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뭐지? 사실이라니…… 나는 신채은의 입을 주시했다. 뭔가 대단한 것이 나올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신채은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중대 사안을 발표할 사람처럼 말이다.
“말씀하세요. 가감 없이 듣겠습니다.”
이미 나는 공적이거나 수사적인 마음은 모두 풀어진 상태다. 왠지 신채은과 뭔가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신채은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수영씨의 글을 도둑질했습니다.”
나는 신채은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 뜻이 무엇인지 감이 왔다. 표절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 항간에 표절시비로 말이 많았던지라 이제는 일반인들의 입에서도 표절이라는 것에 대한 도덕적, 법적 문제에 대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신채은은 자신의 표절에 대해 자수하려는 것일까? 내게 굳이 이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단은 그녀의 말을 들어봐야겠다. 신채은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제 글은 댓글9단. 그러니까 이수영씨의 블로그에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지요. 사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수영씨의 글을 보고 나면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보다 더 좋은 비유와 그보다 더 멋진 표현력이 제게는 없었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이수영씨의 글들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 한 번은 조금씩 가져다 썼어요. 악평으로 가득 찼던 제 기사에 호평이 줄을 이었죠. 그때부터 저는 표절이 불법이고 해서는 안될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일종의 중독 같은 거였어요. 더 편한 것으로의 도피였고 더 이상 악평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어요. 이수영씨의 글은 제게 마약 같은 존재였어요. 절대 끊을 수 없을 것 같았죠. 아니! 끊을 수 없었어요. 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절대 이수영씨를 넘어설 수 없었으니까요.
혹평과 악플이 두려웠어요. 멋진 글을 쓰는 기자라는 평을 받는 상황을 포기할 수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수영씨 블로그가 멈춰 버렸어요. 더 이상의 새로운 글들이 게시되지 않는 거예요. 난감했어요.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 않자 저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어요. 마감 날짜가 목전에 오자 저는 스스로 글을 써보려 했어요.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글을 쓸 수가 없었죠. 저는 이미 댓글9단 이수영씨의 글에 익숙해졌고 노예가 되어버린 거였어요. 중독된 거죠. 그래서 저는 이수영씨를 만나는 것이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서라도 원고를 받아내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이수영씨의 집을 알아내기 위해 아는 인맥을 다 동원했어요. 합법적인 방법은 아닐 것 같습니다. 지금 그런 것도 따지자면 범죄가 되겠죠?”
신채은은 내게서 괜찮다는 대답을 원하고 있다. 나는 그러고마 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신채은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수영씨의 집주소를 구하자마자 저는 바로 실행에 옮겼어요. 부산까지 내려간 거예요.”
“부산에 사는 친구분이 설희영씨군요?”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물었다.
“네. 제 동창이자 친한. 아니 친했던 친구죠. 시집가기 전까지는요.”
나는 잠시 딴생각을 했다. 왜 여자는 결혼 후에는 친구들과 멀어져 버리는 걸까 하고 말이다.
“계속할까요?”
신채은이 물었다.
“아~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하느라고~ 계속하세요.”
“이수영씨 집 앞에서 우리는 경비아저씨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어요. 자살했다고 말이죠. 목을 매고 죽었다고. 우리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이 사실. 그러니까 신채은씨가 이수영씨를 찾아온 이유를 친구분께서도 알고 계시나요?”
“네. 어느 정도는요~ 더 궁금하신 거라도 있나요?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 입니다.”
“그런데 친구분은 왜 또 거길 다시 찾아간 거죠?”
“아~ 그것도 있군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이상한 게 뭔가 촉이 있었대요. 그냥 지나는 길에 거길 들렸는데 거기서 윤채아씨를 만났대요.”
“윤채아씨라면……”
“연예인 윤채아 말이에요!”
“그게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죠?”
“모르셨군요. 이수영씨는 윤채아씨와 제법 가까운 사이 같았어요. 경비아저씨도 알고 계셨고요. 아니지~ 저희가 이수영씨와 윤채아씨의 친구관계를 알게 된 것도 경비아저씨 덕분인걸요!”
나는 신채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부산시경의 현장 탐문수사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사소한 사항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군요. 저희 쪽 수사내용에는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게 되는군요.”
“그럼 저는 그쪽 수사선상에서 제외되는 건가요?”
신채은이 반가운 듯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 신채은씨도 수사대상 목록에 있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시다시피 자살사건이지만……”
“듣고 보니 그렇네요. 형사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단순한 자살사건은 아닌 듯싶은데. 제 느낌이 맞는 걸까요?”
“신채은씨. 생각보다는 예리한 분이시군요. 신채은씨가 말하지 않아도 될 비밀을 오픈하셨지만 아직 수사 중인 사건이라 맘대로 말씀드릴 상황은 아니군요. 미안합니다.”
나는 양심상 말해주고 싶은 충동이 있지만 일은 일이니까 생각을 접었다. 사실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우리는 뻘쭘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한두 번 정도는 더 그녀를 만나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신채은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다.
<신채은>
심장이 터지는 줄만 알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형사가 어찌나 노려보는지 눈을 마주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처음에는 입을 열기조차 버거웠는데 나중엔 나도 모르게 형사의 말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쪽팔리게 왜 그딴 소리를 다 해버렸는지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잠시 미쳤었던 것 같다. 그래도 형사는 내게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행이다. 쓸데없이 사건에 연루되어 끌려다니는 일이 발생하면 그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런데 형사는 왜 댓글9단의 자살을 두고 조사를 하는 걸까? 자살이 아니기라도 한 걸까? 만약 반용씨의 말처럼 정말 윤채아와 댓글9단이 함께 마약을 한 사이라면 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지? 형사에게 그들이 마약을 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을까? 일단 내버려 둘까? 그래도 형사인데 설마 하니 나 같은 일반인도 알게 된 사실을 모를 수야 없겠지? 아니야! 윤채아가 stolen dream이라는 아이디로 접속해서 댓글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댓글을 찾지 못하면 절대로 마약에 대한 단서는 없는 거다. 지금이라도 형사를 불러서 말해주는 게 낫겠다. 그리고 우선 반용씨에게 그때 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대해 마저 설명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나는 곧바로 재일 선배에게 전화해 반용씨의 연락처를 넘겨받았다.
“안녕하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안녕하세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지난번에 마약 문제로 제게 말씀하기 꺼려하셨던 것에 대해 선데요. 그냥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게. 좀 외설적이라서요~”
나는 이미 그날 그들의 눈빛에서 설마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아마. 성 관련일 거라고는 생각했었어요. 괜찮아요. 기사 쓸 거라서요. 자세하게 좀 알고 싶네요. 시간 되시면 부탁 좀 드릴게요. 전화로 좀 불편하시면 이따 만나서라도……”
내 호기심 센서는 다시 불을 반짝이고 있다. 오늘 당장에라도 알아내고 싶어 졌다.
“그럼. 이따 퇴근 후에 뵙죠. 장소는 편하신 곳으로 잡으세요. 제가 이동하겠습니다.”
이 남자. 유학파라고 하더니 제법 여성에 대한 배려가 있는 것 같다. 전화를 끊고 회사 근처의 커피숍 주소를 문자로 전송했다.
*
“아니~ 어떻게 제게 물어볼 게 다 있으십니까? 유명 기자님께서.”
반용씨는 농담을 던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나보다 더 유명한 기자다. 아니! 나는 게다가 가짜 기자에다 기껏 월간지 기자이지만 그는 4대 일간지 정치부 기자다. 끗발이 좀 있다는 거다. 물론 그 바닥에서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바쁘신 분인 줄 알지만 제가 꼭 마무리 지어야 할 상황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불러내게 됐네요. 일단 고마워요. 정말요.”
나는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 약속이 취소돼서 저녁에 누굴 불러낼까 고민하던 차였어요. 정치부 기자들은 술 없이는 못 사는 편이라서 말이죠. 하하하~”
그는 목을 젖히며 웃었다. 과했다 싶다.
“한잔 사라는 의미인가요?”
나는 그에게 내 질문에 대한 값을 지불하라는 의도냐고 묻고 있는 거다.
“글쎄요. 그래 주시면 저야 더 좋고요.”
“좋습니다. 좋아요. 대신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의 품질에 따라서 결정하겠습니다.”
“그러시죠.”
“하긴, 제가 지금 품질 따질 형편은 아니군요. 사실~ 이런 걸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고 말이죠. 이런 부분에 있어 제 질문은 경력자 우대 상황인 데다 반용씨가 없다면 제가 어디 가서 ‘혹시 마약 해보셨나요?’ 하고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영광으로…… 농담인 거 아시죠?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제가 생각 없이~”
나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다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부랴부랴 말을 주워 담았다. 다행히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철없이 했던 어린 시절 이야긴데요. 그나저나 궁금하다 하신 걸 물어보시죠. 한 잔 얻어먹으려면 빨리빨리 가야죠.”
“네. 그러죠. 제가 궁금한 건 아까 말씀드린 그것뿐이에요. 제가 알면 부담스럽게 느낄 거라고 했던 성적인 부분 말이에요. 그걸 구체적으로 알고 싶네요.”
그는 목젖 부위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아마도 곤란한 말을 할 때 나오는 습관인 것 같다.
“이게 말입니다. 마약을 하게 되면 성적으로…… 그 행위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요. 마약을 하고 섹스를 하면 일반적으로 섹스할 때는 느끼지 못하는 수준의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섹스를 하는 시간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지속됩니다. 그냥 간단히 표현해서 좋아서 미칠 지경이 되는 거예요. 이걸 호기심 때문에라도 한 번 하겠다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문제는…… 사실, 문제는 겨우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맛에 들린 사람은 일반적인 섹스에서 쾌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거죠. 특히 여자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결과적으로 마약을 탐닉하게 됩니다. 사실상 말하자면 중독이 아니에요. 불만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 거예요. 나쁘게 표현하자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약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거죠.”
반용은 30분 가까이 마약과 성에 대해 설명했다. 대체로 남자들은 쉽게 빠져나오는 경향이 있지만 여자의 경우는 쉽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여자들의 경우, 레즈비언끼리 마약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마약의 노예가 된 후에는 가산을 탕진하고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그저 정해진 수순이라고 했다. 마약상들은 조금씩 가격을 높여 마약의 노예들을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약을 복용하면서 직업도 잃고 자신 본연의 모습도 점차 잃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게다가 어떤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취하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했다. 마약은 단지 음용이나 주사로만 취하는 게 아니고 대기 중으로 호흡을 통해서도 피부 접촉을 통해서도 취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약이 사회적으로 음지로 몰리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했다. 마약 중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체념하고 인생과 바꾸는 것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결국 반용씨에게 저녁식사와 술자리까지 대접해야 했다.
그는 술이 한 잔 들어가자 충격적인 한마디를 더 건네주었다. 술에 의존하는 사람은 마약에도 의존하기 쉽다는 것이다. 모든 게 의지의 문제라는 거다.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자립심이 가장 중요한데, 이 사회는 점점 더 인간을 외롭게 만들고 자꾸 무언가에 의존하게끔 만들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중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댓글9단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제 헤어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지만. 만약 나에게 나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댓글9단 의존증은 끝도 없이 깊어졌다. 결과적으로는 희영이가 유일하게 내 고민을 듣고 함께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뛰어 준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 덕에 나는 새로운 힘을 얻었고 댓글9단에 의존하던 이른바 댓글9단 중독증에서 헤어나고자 이렇게 미친 듯이 뛰고 있잖은가 말이다.
*
나는 취한 상태로 송유리 형사에게 찾아갔다. 그녀는 한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윤채아와 이수영이 함께 마약을 한 사이였으며, 그녀들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말했다. 확실한 사실도 아닌데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 것 같다. 진실을 알고 있는 양. 사실을 말하는 양~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이후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건 내가 다시 반용씨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내 옆에 말이다. 눈 앞에는 송유리 형사와 한 남자가 있었다. 송유리 형사는 반용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대체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송유리>
신채은 기자는 낮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다시 나타났다. 술자리에 합류했을 당시만 해도 그다지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빠른 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주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주정이라고 하기에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봐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마도 그녀는 그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은 중독자라면서 이제는 중독에서 헤어 나오는 중이라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하소연했다. 그리고는 윤채아와 이수영이 마약을 했다며 그 부분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대체 뭘까? 신채은 기자는 내가 모르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나는 마음이 급해졌지만 이미 정신을 잃은 그녀에게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치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녀의 전화기에 있던 마지막 통화 내역 중 남자의 이름이 여러 번 기록된 것을 확인했다. 나는 곧장 그에게 전화했다. ‘당신의 여자 친구가 여기서 맛이 가셨다’고 말이다. 반용이라는 남자가 우리 자리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신기하게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물론 눈은 풀려 있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마약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다가 다시 쓰러져 버렸고 반용이라는 남자는 우리에게 자신이 그녀에게 마약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설명했다. 거기까지다. 나는 지금 신채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 여자!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
신채은 기자를 초대했다. 아무리 기자라 해도 여기 내부까지 들어와 본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어제의 빚을 갚기 위해 일부러 그녀를 초청한 거다. 정선배에게도 어제 일을 대충 설명했고 신채은 기자와 함께 그녀의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로 했다. 오후 3시가 안돼서 신채은 기자가 도착했고 나는 정선배의 사무실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정선배 사무실이 일을 좀 하는 곳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사건파일로 가득해서 뭔가 있어 보일 수도 있다. 신채은 기자는 별천지를 방문한 듯했다. 나는 정선배와 함께 신채은 기자에게 구석구석 안내해 주었다. 기자의 눈으로 보는 이 곳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게는 그저 삶을 꾸리기 위한 일터일 뿐인데 말이다. 한 바퀴 둘러본 후에야 사무실로 돌아온 우리는 본격적으로 그녀의 설명을 전해 듣기 시작했다. 정선배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 정선배는 뭔가 새로운 고민에 빠져든 듯한 표정이다.
“선배! 왜 그래요?”
내가 물었다.
“응! 최동철 사건하고 비교해 보는 거야. 그 사건도 사실상 마약 사건인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신기자님 말에 따르면 말이야. 최동철은 결국 자살이라는 결론이거든.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봐도 자살 같지가 않아서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타살이라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냄새가 나거든. 많이 구려~”
정선배는 상당히 고민스러운 눈치다. 쉽사리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니까. 신채은 기자는 우리에게서 궁금한 것들을 꼬치꼬치 물어댔다. 우리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다는 거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댓글9단의 중독에서 헤어 나와 조금씩 자신의 길을 찾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더 이상의 의존은 필요 없어 보였다. 세상의 모든 중독자들이 신채은 기자처럼 빨리 헤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한일이 녀석을 불러다 놓고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정선배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전화를 걸었다. 나는 신채은 기자의 새로운 재기를 위한 기사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다시 세상 속으로 놓아주었다. 김한일 형사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최동철의 주변 탐문수사가 더 필요할 듯싶었다. 그 역시 어떤 이유에서든 마약에 손을 댄 이유가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정선배는 또 퇴근을 무르고 자리에 앉아 고민 속에 빠졌다. 저 상태는 뭔가에 집중하기 전의 워밍업 상태다. 나는 조용히 정선배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로 돌아와 용주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이 있어서다. 성공만 한다면 아마 국내에서는 최초로 만드는 계보일 것이다. 마약조직의 계보다. 나는 계보 제작을 위해 김한일 형사에게서 씨앗이 될 명단을 확보해 두었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낚시질하는 강태공의 마음으로 미끼를 던져볼 뿐이다. 내 목적을 전해 들은 김한일 형사는 마약조직원들이 쓰는 언어들을 정리해서 보내왔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 요즘에는 마약이 인터넷으로도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필터링하면 마약범들을 체포하는 데 있어서 용이할 것 같다. 이제는 용주씨의 활약을 기대해 보는 거다. 김한일 형사에게서든 용주씨에게서든 도움이 되는 정보가 튀어나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신채은>
뭔가 큰 일을 성사시킨 것처럼 속이 다 후련하다. 그런데 이상한 기분이 든다. 왠지 내가 경찰보다 앞서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나도 한번 수사를 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아직까지는 그들보다 앞서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이런 게 바로 현장감이라는 걸까? 왜 이제야 내가 기자였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야릇하다. 나는 나대로 레이더를 돌려봐야겠다.
댓글9단 이수영. 송유리 형사는 내게 뭔가를 감추려 하고 있다. 물론, 알려주지 않겠지. 그들은 내게 자기들 사무실을 견학시켜 주는 것으로 내 수사 성과에 대한 보답을 한 것이겠지만 내게는 이번 달 기사가 달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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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주변의 인맥이란 인맥은 다 동원했다. 부산에서 마약을 유통하는 사람과 연결이 될 만한 소스는 뭐든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는 곧장 희영에게 부산에 내려가게 되었다고 전했다. 당연히 나는 희영이 집에 머무를 것을 예상했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모텔 신세를 지게 됐다. 물론 상관없다. 길바닥에서 자면 어떤가? 나는 현장 수사를 위해 출장을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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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외로 재일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마약상 한 명을 찾았다는 거다. 얼마 전에 교도소에서 출소해서 행방을 알 수는 없지만 부산 영도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거라는 정보다. 더 디테일한 정보라면 좋겠지만 내가 구할 수 있는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재일 선배는 내게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보나 마나 위험하다며 만류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저 조사할 게 있어서 그렇다고만 둘러댔다. 한술 더 떠서, 더 좋은 정보를 구해 달라며 평소에는 써 보지도 않았던 애교 멘트까지 날렸다. 물론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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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도. 54세. 물론 남자다. 부산의 영도에 있다고는 했지만 그것도 그가 구속되기 전의 주소지일 뿐, 현재 그곳에 있다는 건 보장할 수 없다고 했다. 이거야 말로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나 마찬가지다. 솔직히 겁이 나는 것도 있다. 희영이가 도와준다면 힘이 나겠지만 이런 일에 희영이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미씨 파워를 보여 준 희영이의 박력이 부러울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 주문을 걸고 있다. 일단 부딪쳐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미리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니다. 처음 가 보는 길이니까. 하지만 출발 전에 일단은 계획을 짜야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눈을 감은 채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뾰족한 수는 없다. 역시 현장에서 직접 부딪쳐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 같다.
*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차를 가져가야 할 상황이라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지금은 영도대교를 앞에 두고 있다. 언젠가 새로 만든 개도교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어서 영도다리를 구경할 겸 해서 일부러 이 쪽 길을 택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차량통행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지 않다. 이번에는 3일 예정으로 내려온 데다 부산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서 숙소 때문에 고민이 되었지만 희영이는 이번 출장에 동행해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미안했던지 태종대 관광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남편에게 인맥이 좀 있어서 모텔 값 수준으로 예약했으니 부담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기도 여차하면 튀어오겠다는 말과 함께다. 하지만 이번에는 희영과 함께 할 시간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태종대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서 계획을 짜야겠다. 여장이래 봐야 기껏 핑크색 플라스틱 가방 하나가 전부지만. 3일 동안은 그곳이 내 작전본부가 되어 줄 것이다.
김상도. 그는 신선동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결과 신선동은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이 없는 산동네 같았다. 하긴 부산 자체가 산을 끼고 조성된 도시니 여기저기 산이나 구릉이 많은 게 당연하지 싶다. 인터넷 속에서 소개된 옛날의 영도는 살기 팍팍한 동네여서 건달도 많이 배출된 거친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바닷가 사람들인 데다, 당시에는 완전히 섬이었으니 더 거칠었을 수도 있겠다. 인터넷에서 제일 먼저 만난 곳은 태종대였다. 난 태종대를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태종대가 영도에 있는 줄은 몰랐다. 처음엔 영도라고 해서 부산 근처에 있는 조그만 섬이겠거니 생각했었지만 인천 영종도만큼이나 큰 섬인 데다 다리도 네 개나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영도는 이미 상상 속의 영도가 아니었다. 푸른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눈에 띄는 것이 두 군데 더 있었다. 한국해양대학교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남부분소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한국해양대학교 역시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릴 때 아빠 손에 끌려 세계범선대회를 구경하러 온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멀리 부산까지 기껏 범선과 요트를 구경하겠다며 온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것도 같다. 이렇게도 먼 곳인데 말이다. 나는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짐을 풀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뭐~ 객실은 크고 넓고 경치가 기똥차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다. 호텔을 빠져나오자마자 태블릿을 거치대에 끼워 두고 신선동으로 향했다. 호텔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부산에서 서쪽 바다를 보며 달리는 길이다. 오른쪽으로는 낮은 산이 죽 이어져 있다. 절영로라고 적혀 있다. 무슨 뜻일까? 함지골 체육공원을 지나 한참을 달려서야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음을 알려 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낙후된 동네다. 아니 동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김상도의 집은 해변을 등지고 드문드문 서 있는 오래된 집들 중 하나니까.
녹이 잔뜩 슬어 있는 낡은 철제 대문 사이로 시멘트 블록으로 된 낡은 집 한 채가 보였다. 마당은 그리 넓지 않지만 그 안에는 작은 텃밭도 있다.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합판으로 만든 개집에는 개가 살지 않는다. 빨랫줄에는 여남은 개의 빨래가 널려 있지만 집 주위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집에 사는 사람은 밖에 볼 일이 있거나 출근했을 수도 있겠다. 바닷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빨래 중에는 남자 옷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컬러의 몸빼바지와 할머니 고쟁이 같은 천조각들, 목장갑 몇 켤레, 목이 누런 면티셔츠, 더 이상 늘어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목이 넓은 양말이 전부였다. 일단은 집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마음 한편엔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이 집에는 남자가 살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김상도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살고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고 이런 방법 자체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 다른 기자들도 기사 하나 쓰려고들 이렇게 병신 같은 짓을 할까 싶다. 배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바닷가 냄새를 맡은 듯하다. 일단은 허기진 배를 달래야겠다. 어차피 집주인도 보이지 않으니 다시 찾아와야겠다.
*
혹시나 싶어 김밥 두 줄과 음료수를 사 오긴 했는데 그러길 잘한 것 같다. 오후 세 시가 넘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땐 집 앞에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의 승용차에 손을 흔들며 ‘일찍 와라!’며 소리쳤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 차에서 내렸다. 승용차는 이미 집에서 멀리 떠나고 없었다. 내가 왔을 땐 집 근처에는 어떤 차도 없었다. 그저 황량한 공터뿐이었다. 할머니가 거친 소음과 함께 녹슨 철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횡단보도 없는 차도를 재빨리 뛰어 건넜다.
“할머니~ 잠시만요~”
할머니를 급히 불렀지만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철문 옆에 서서 낡은 담벼락 너머로 마당을 둘러보았다. 그 새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셨나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대청마루 밑에는 할머니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두리번거려서야 집 밖에 외롭게 서 있는 창고인 듯했던 것이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크기의 창이 달린 나무로 된 문이 녹슨 경첩을 비벼 삐끄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고 이윽고 할머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옷을 다 입지 않은 채로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마음이 급했지만 잠시 기다렸다. 나는 할머니를 부르려 타이밍을 잡고 있다. 할머니는 빨간 꽃무늬 몸빼바지를 허리춤에 치켜올리고는 허리를 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불렀다. 그런데 듣지 못하시는 것 같다. “할머니!” 이번에는 목에 힘을 주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제야 할머니는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사색이 된 얼굴이 되어 팔을 휘휘 젓는가 싶더니 뒤로 넘어져 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거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할머니는 담벼락 위에 걸린 내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워낙 인적이 없는 동네인 데다 젊은 여자가 화장을 덕지덕지 칠한 상태로 담벼락에 머리가 뎅강 잘린 채 걸려있었으니 충분히 놀랄 만한 사건이었을 거다. 할머니께는 죄송했지만 고의는 아니었으니까~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셨다. 아마 십 년 만의 손님일 거라는 할머니의 설명을 들었다. 이 집에는 외부인의 왕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가 불쌍하게 보였다. 나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고래고래 악을 써야만 했다. 쓰시던 보청기는 이미 오래전에 고장 나서 그렇단다. 당장에 보청기 하나 사드려야 내가 제 명에 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아까는 정말 죄송해요!”
“개안타~”
할머니의 진득한 경상도 사투리가 억양에서부터 부산에 살아온 이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 내를 찾아온 이유가 뭐꼬?”
할머니는 그래도 나를 손님이라도 되는 양 반겨주었다.
“제가 여기 주소만 보고 찾아왔는데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할머니는 잠시 기다리라며 부엌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큼지막한 복숭아 두 알을 씻어가지고 나왔다. 가는 털이 보드라운 분홍빛 복숭아는 먹기 좋게 탐스러웠다.
“내한테 궁금한 게 뭔데?”
나는 할머니에게 내가 이 곳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표정이 처음과 달리 그다지 곱지 않다. 얼굴 가득 쭈글쭈글한 주름 속에서 나에 대한 방어본능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할머니! 아드님인 것 같은데요. 제가 김상도씨에게 피해를 주려거나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서울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예요. 꼭 좀 만나게 해 주세요.”
나는 할머니에게 간절하게 부탁을 해 보았지만 할머니의 입술은 더 이상 열릴 줄을 몰랐다. 아마~ 할머니는 내가 복숭아를 다 먹을 때까지만 기다려 주기로 맘을 먹은 듯했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먹으며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할머니는 이내 대청마루에서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와 할머니의 교감은 거기서 끝이 나 버렸다. 할머니는 아까와는 다르게 부산 남자들만큼이나 무뚝뚝해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와 길을 건넜다. 차에 타고 보니 벌써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며 운전석 쪽으로 강한 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빛을 피하려고 조수석으로 건너와 앉아 창문을 열었다. 일단은 이 상태로 김상도씨를 기다려 보는 거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아까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김상도씨일 가능성이 높다.
한 시간, 두 시간. 이제 해가 지려 한다. 이 짓도 정말 못해 먹을 짓이구나 싶다. 허구한 날 잠복근무하는 형사들이 존경스럽다.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지만 이제는 모기떼가 더 무섭다. 차 시트를 최대한 기울이고 누웠다. 끄응 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나는 그 상태로 다시 골아떨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10시가 넘었다. 할머니 집은 등이 모두 꺼져 있었다. 김상도씨는 돌아오지 않으려나? 나는 그래도 12시까지는 기다려 보기로 했다.
11시 30분. 할머니 집은 그대로다. 집이 어디로든 사라질 것 같은 어둠이다. 갑자기 겁이 났다. 도로엔 똥차 한 대 조차 지나가지 않는다. 원래는 밤샘을 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어둠이 가져온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한참을 저울질한 끝에 나는 두려움에다 손을 들어주었다. 난 정말 무서운 건 싫다. 시동을 켜고 헤드라이트가 주변을 밝히자 은근히 나를 조여오던 두려움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숙소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머릿속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린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어둠을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마치고 폭신한 침대에 누웠는데 말 그대로 뻗어 버렸다. 장거리 운전이 피곤했던 것 같다.
5시. 나는 부리나케 씻고 호텔에서 튀어나왔다. 역시 나는 정신력이 괜찮은 편인 것 같다. 벌써 동이 트려는지 은은한 빛이 느껴졌다. 몇 시간 못 잤지만 부산의 맑은 공기 때문인지 피곤한 몸을 충전하기에는 충분했다. 할머니의 집 앞에는 낮에 본 듯한 승용차가 서 있다. 김상도. 그가 집에 돌아온 거다. 나의 몸은 아드레날린이 도는 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듯 뛰었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성공의 환희를 느끼는 것 같다. 6시가 되려면 아직 몇 분 남았다. 나는 김상도가 내 눈에서 벗어나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지난밤의 두려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다.
6시가 조금 지나 할머니 집에 불이 켜졌고 그 빛은 주변의 희미해진 어둠마저 물리쳐 버렸다. 내 두 눈은 할머니의 집에서 떠나지 못했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너무 집중한 탓이다. 빨리 김상도가 나타나길 하는 바람으로 기다렸다.
오전 8시가 되자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할머니는 미처 내 차를 보지 못했는지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80세는 되어 보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걸음에는 힘이 남아 보인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모르겠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마 바다 쪽으로 내려가신 듯했다.
9시가 다 되어서도 김상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10시가 다 되어간다. 잠시 스마트폰을 뒤적이던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자동차 시동소리였다. 아뿔싸! 나는 급히 고개를 들어 김상도의 차를 보았다. 이미 공터에서 나와 도로를 향해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재빨리 시동 버튼을 눌렀다. 고개를 끝까지 돌려보았지만 김상도의 차는 벌써 시야에서 차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급히 유턴을 하고 액셀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얼마 안 가서 멀리 앞쪽에 그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린다. 이런 걸 보고 심장이 쫄깃해진다고 하는 건가 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꼭 만나야만 한다. 미행이다. 그래~ 이런 걸 미행이라고 하는 거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지만 나는 기억 속을 더듬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다행히 김상도가 가는 방향은 내가 호텔을 오가던 길이어서 조금은 익숙해져 부담이 없지만 그가 어디로 핸들을 돌릴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내비게이션과 김상도의 차량을 번갈아 보며 그가 가는 방향을 미리 체크해 보았다. 교차로를 만나면 나는 그의 차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했다. 영화에서처럼 신호 때문에 놓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다시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차는 태종대 초등학교 근처로 진입했다. 50미터 전방에 김상도의 차가 멈추었고 잠시 후 그가 뭔가를 들고 내렸다. 마약일까? 그는 출소하자마자 다시 마약에 손을 댄 것 같다. 그를 찾기만 하면 뭐든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일순간에 무너졌다. 지금 나는 그를 어떤 식으로 만나야 할지 조차 모르고 있다. 멘붕이라는 표현이 지금의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나는 일단 아무 데나 주차를 해 두고 그의 차가 있는 곳까지 걷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의 비상통화 버튼을 작동하는 방법을 다시 익혔다.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해야 할 수도 있다. 그들이 현장을 내게 들켜 나를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만약 무사하게 탈출을 하게 되면……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만 한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럴 줄 알았다면 재일 선배라도 끌고 왔어야 하는 건데. 내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김상도의 차량까지 가는 길은 불과 50미터 정도였지만 기분엔 1킬로미터는 가는 것 같다. 김상도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마약을 거래하고 있는 듯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던 사이 김상도는 강화유리로 된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분식집이다. 김상도는 거의 90도 가까운 인사를 했고 곧장 뒤돌아 나왔다.
“김상도씨!”
내가 부른 게 절대 아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표정을 보니 편안해 보이지 않다. 할머니와 꽤 닮은 얼굴이다. 내 예상대로 할머니는 김상도의 어머니였던 것 같다. 그는 할머니보다 흰 피부에 마른 몸매다. 다만, 몸매에 비해 볼에 살이 많은 편이다. 얼핏 보면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현재의 저 눈빛은 금방이라도 나를 때려눕힐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주위를 훑어본다. 방금 범죄를 저지른 게 분명하다.
“나를 불렀소?”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미치겠다.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겁을 먹고 말을 못 하는 것을 눈치라도 챈 건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나를 찾아왔다는 그 아가씨구만.”
그는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저 인자한 표정 속에 어떤 흉폭한 유전자가 숨어 있을까? 원래 나는 유전자가 선과 악에 영향을 준다는 설에 반론을 펴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입장이 달려져서 그런 걸까?
“어~ 그래요!”
나는 떨고 있다. 제제제젠~장!
“맞아요! 제가 어제 어머니를 만나 뵈었어요.”
나는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는 마구 떨리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았다. 아니! 이미 통제를 해야 할 이성조차 마비된 상태다.
“그건 들어서 알고 있는데. 언제 나를 만난 적 있수?”
김상도는 무뚝뚝하면서도 침착한 말투다. 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건 오로지 내 촉이다. 그런 느낌이 은근히 전해져 온다.
“소개받았어요. 아아~ 아니. 주소와 이름만 알고 찾아왔어요. 얼마 전에 출소하셨다고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벌벌 떨며 말하고 있다. 마침 옆에 그의 차가 있어 차 윗부분에 손을 짚은 채 최대한 태연한 척하고 있는 거다. 그가 이미 나를 간파했을 수도 있다. 이미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누가 내 주소를 줬다는 거죠? 아! 가! 씨!”
김상도는 아가씨라는 단어에 임팩트 있게 한 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나를 윽박지르려는 듯한 목소리다. 재일 선배에게 정보를 전해 받을 때 누구에게 소개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난감하다.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당신 정체가 뭐요? 영태형이 보냈소?”
영태는 또 누군가 말이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건 아니겠지? 이~쒸! 나한테 정말 화가 난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저는 기자예요. 하지만 김상도씨를 취재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뭘 좀 물어보려는 것뿐이에요!”
저 남자는 지금 내가 기자라는 말에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 사이의 거리는 다섯 걸음 정도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가 코 앞에 다가와 있다.
“타슈~”
그가 내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네?”
나는 그가 더욱 무서워졌다. 몸은 이미 뒤로 한 발을 뺐고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했다. 나는 의외로 침착한 여자였던 것 같다. 나 스스로 몰랐을 뿐. 이런 상황에도 두뇌 회전이 빠르다. 이젠 오히려 몸의 떨림이 사라졌다.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가 갑자기 내 왼손을 낚아채서 잡으며 말했다.
“타라고!”
그는 내 손목을 잡아 조수석 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나를 강제로 태우고 문을 잠가 버렸다. 그는 다시 주변을 살피더니 나를 주시하며 보닛 쪽으로 돌아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그렇게 침착했던 나는 이미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양의 앞의 쥐가 된 듯 무참히 떨고 있다. 두렵다. 게다가 쪽팔린다.
“뭐~ 뭐뭐뭐죠? 지금 나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죠?”
나는 얼굴 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알고 있다. 당연히 말도 떨고 있고 몸도 떨고 있다. 김상도가 나를 쳐다본다. 상체를 내 쪽으로 비스듬히 돌린다. 왼손은 핸들을 잡고 오른손은 시동을 건다. 오른손은 기어봉 위에 있다. 후진기어로 놓았다. 차는 느린 속도로 후진했다.
“아! 저 차가 당신 차로군. 어쩐지!”
그는 이미 내 미행을 은근히 눈치채고 있었던 거다. 이제 나를 어쩌려는 거지? 나는 여자들이 납치되면서 왜 비명 한번 못 질러보고 잡혀가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발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허벅지는 이미 힘을 잃었다. 사지에 힘이 빠진다는 표현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는 인적이 없는 후미진 곳으로 차를 몰았다. 이 지역에 있어 손바닥 보듯 하는 것 같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게 마약을 강제로 먹이고 성폭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반용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문제였다. 두려움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아가씨. 아니지~ 기자님. 꼴을 보니 뭐 대단한 건 없어 보이는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요? 나는 이미 그 바닥에서 손을 씻은 사람인데. 왜 나를 괴롭히는 거지?”
김상도는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물었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손을 씻었다고? 아까 내가 마약 거래하는 걸 분명히 봤는데?
“아까~ 마약 배달……”
나는 모깃소리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하하하~”
그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심부름 다녀온 거요. 배달은 배달이지. 아가씨 기자가 맞긴 맞아? 무슨 기자가 이렇게 어리바리한 거야? 명함 내놔봐!”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까스로 지갑을 열어 명함을 꺼내 주었다. 김상도는 쓰고 있던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더니 내 명함을 노려보았다. 사실은 노려본 게 아니고 노안이 있는 것 같다.
“감방생활을 오래 하면 시력이 나빠져~”
그는 내가 유심히 지켜보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한 마디 하고는 얕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다시 말했다.
“기자가 맞긴 한가 보네. 요즘엔 아가씨처럼 어리바리한 여자도 기자질을 시켜주나 보지?”
나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서 변명은 하지 못했다.
“아가씨. 아니. 기자님. 이런~ 니미럴! 뭐가 기자 같아야 기자라고 부르던가 하지!”
그는 나를 한번 더 뭉개버렸다.
“그래. 기자 아가씨. 나를 왜 찾아왔는지 좀 물어볼까?”
나는 그에 대한 경계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무래도 나를 해치려는 것 같지는 않아서다.
“제 친구 때문이에요. 친구가 얼마 전에 자살했어요. 그런데 마약을 한 것 같은데 단서를 찾을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무작정 부산에서 마약 유통을 하는 사람을 물색했더니 선배가 김상도씨를 알려주더군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자 아가씨는 주소를 잘못 찾았소. 난 이미 손 털었고 그쪽 세상과는 더 이상 연을 대고 싶지도 않군.”
그가 다시 차를 이동하려는 듯했다.
“어디에 내려드릴까? 아까 차가 있는 곳에 내려주면 되나?”
“아뇨. 아저씨! 안돼요. 저는 이 상태로 돌아갈 순 없어요. 이 상태로 여기서 멈춰 버리면……”
나는 한마디 말로 그의 운전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 그에 대한 두려움을 잊은 거다. 나를 해치려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등짝은 땀에 젖어 흥건한 상태다. 나는 이제야 이 차가 구형 그랜저 차량이라는 걸 알았다. 10년은 된 듯한 콘솔 위에는 두 장의 사진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와 친해보고 싶은 마음에 대사를 짜냈다.
“여자분은 누구예요?”
김상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긴 한숨을 내쉬고는 한마디 했다.
“기자 아가씨. 나랑 거래 하나 하시겠수?”
거래라~ 나는 그가 미끼를 물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거래라뇨? 무슨?”
나는 순진한 척 물었다.
“내 이야기를 써 주실 수 있나? 언젠가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지. 더 이상 나 같은 인간이 생기는 걸 막아보고 싶었어. 만약 아가씨가 약속을 한다면 기꺼이 아가씨를 도와주지. 하지만 불법적인 일이라면 절대로 하고 싶지 않군. 하긴~ 아가씨 같은 사람이 그런 걸 알 리도 없겠지만……”
그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니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할게요. 아저씨!”
나는 있는 힘껏 신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런데~ 아저씨라니.
*
김상도는 내 차 옆에 나를 내려주었다. 약속한 대로 나는 그의 차를 따라갔다. 그의 차는 한국해양대학교를 지나 청학동을 거쳐 봉래동이라는 곳을 향했다. 나는 좁아터진 골목에 간신히 주차를 하고 그를 따라 걸었다. 후미진 골목 양 옆으로는 시멘트 블록으로 된 긴 담벼락이 이어져 있다. 군데군데 아이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골목의 분위기는 왠지 음습하다. 녹슨 철문들 위에는 노란 종이에 빨간 글씨-글씨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가 적힌 부적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앞쪽에서는 아줌마 두 명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쑥덕거리며 나를 지나친다. 한 여자가 나를 스캔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기분이 더럽다. 이백 여 미터 정도 좌로 우로 골목을 쑤시고 들어서야 그는 새빨갛게 칠한 목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분위기는 완전히 점집이다. 아니! 동네가 다 그런 분위기다. 아마, 아까 지나친 두 명의 여자들 역시 어느 집에선가 부적을 사서 나오는 중이겠지 싶다. 그런데 무슨 사연이길래 나를 점집으로 끌고 가는 걸까? 설마 내게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아직 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여긴 내가 사는 집이요.”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아까 그 집은요?”
“거긴 어머니 집이고, 아가씨가 운이 좋았던 거야. 난 한 달에 두세 번 어머니 집에 갈까 말까 하는 편인데 마침 아가씨가 찾아온 거니까.”
“우린 인연이 있나 보네요.”
나는 일부러 친숙한 척했다.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은 대화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니까. 댓글9단의 『겨울아이』처럼 말이다.
“점집에서 사신다고요?”
“그런 셈이지. 점집이자 내 집이니까. 여기에는 마누라도 살고 있어. 물론 새 마누라지만. 들어와~”
그는 마루 위로 올라서며 말했다.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영숙아~ 커피하고 과일 좀 내 온나~”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의 부산 사투리다. 건너편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옥이지만 에어컨이 나오는 방이다. 그는 나를 모시듯 하며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은 여자의 손이 닿은 흔적이 다분하다.
“사모님께서는 정말 깔끔하신 것 같네요.”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 내가 청소한 거야.”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당연하다는 의미다.
“약쟁이들의 고질적인 병들 중 하나지. 지저분한 걸 못 보고 살아. 정말 병적이야. 약을 하면 다들 그렇게 돼. 그러고 보니 좋은 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구먼.”
그는 의미 없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영혼 없는 웃음이랄까? 나는 그가 꺼내 준 방석을 깔고 앉았다. 그러자 한 여자가 다과상을 들고 나타났다. 김상도의 아내? 나는 3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꽤 미인 축에 낀다.
“어머~ 미인이신데요~”
이건 김상도에게 한 말이다. 그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인? 그래 미인이지. 나 같은 놈을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준, 그래서 마음이 더 예쁜 여자지. 나를 끝까지 믿어 주었고.”
그는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미처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그의 젊은 아내는 다과상을 조심스럽게 내려 두고는 이내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은은한 레몬향이 나타났다가 온 방 안을 휘이 둘러보고 흩어져 버린 것 같다. 나의 기운을 읽고 간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었다.
“마누라가 당신을 맘에 들어하는구먼. 내가 당신에게만큼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해도 되겠어. 방금 내 마누라가 기자양반을 읽고 간 거야.”
나는 방금 그 이상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한 여자다. 아니~ 어쩌면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자~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야지.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마쳤나?”
나는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노트와 펜을 쥐었다.
<김한일>
우리가 아무리 전국구 수사라지만 나 혼자 부산이라니. 그리고 이건 뭐.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이수영의 탐문수사를 더 해오라고? 연중이 형님은 아주 내 등골을 빼 드시려나. 이건 둘 사이의 거래 치고는 좀~ 어쨌든 정선배는 어떻게 해서든 최동철 사건을 내게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당연한 걸 가지고 무슨 놈의 조건을 다는 건지. 나쁜 인간 같으니라고. 게다가 휴가까지 쓰고 비공식적인 수사를 하라니. 우리가 뭐 CIA도 아니고 너무 하는 거 아냐? 이수영에게 마약을 공급한 업자를 찾아와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여튼 이 양반은 내가 무슨 슈퍼맨인 줄 안다니까. 셜록홈스라면 또 모를까? 크크~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지금 내 앞에서 삼겹살을 굽는 녀석은 대학교 유도학과 동기다. 함께 경찰이 돼서 한 명은 서울에서 한 명은 부산에서 근무하고 있다. 우리는 학창 시절 삼겹살 많이 먹기 내기를 한 적이 있다. 물론 고기뷔페에서였고 승부는 내지 못했다. 주인아저씨의 눈치 때문에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저 녀석은 그때만큼이나 먹는 것 같다. 오늘 내가 실수한 것을 알아챘을 때는 후회하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선배, 후배들 중에 부산에 근무하는 사람은 모두 불러낸 거다. 물론 동기들은 벌써 다 도착해 있다. 내가 쏜다고 하니 모두 불러버린 거다. 그래! 내가 평생 언제 또 이렇게 쏴보겠냐? 아직 총각이니 다행이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도 대충 1인당 먹을 고깃값을 계산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또 고기뷔페를 찾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여기서 최대한 정보를 당겨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당분간 내 정보원 역할을 맡겨야 할 것이다. 나는 정보원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비용으로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돼지같이 얻어먹고 제 값을 해 낼지는 의문이다. 힘든 부탁이라는 건 서로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말이다. 내가 그들에게 부탁한 것은 이수영씨 자살에 대한 탐문수사와 그녀에게 마약을 공급한 놈을 찾아내는 것이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송유리>
“제가 오늘 두 분을 모시고 할 말이 있어서 오시라고 한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은 이미 긴장한 상태다. 이제 미궁 속에서 한 가닥 빛을 찾은 셈이니까.
“야! 뜸 들이지 말고 얼른 시작해라.”
정선배가 보채기 시작했다. 김한일 형사는 입을 다시고 있다.
“재미 좀 보려고 했는데 그냥 불어야겠네요. 사실 저는 이 사건들 전체가 다 마약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증거는 있고?”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선배가 제동을 걸었다.
“증거요? 이제 찾아내야죠.”
“장난하냐?”
정선배는 어이없다는 듯 핀잔이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찾아낸 것이 있다. ③정동규에게서다. 그의 블로그에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선배! 정동규 블로그에서 제가 기가 막힌 걸 찾아냈어요.”
“뭔데?”
“자신이 마약을 했다는 거예요. 제가 이거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를 거예요. 신채은 기자 아니었으면 그냥 놓치고 지났을 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패턴을 더 찾았어요. ①②③④⑤가 모두 마약을 했을 거라는 가정을 두고 보면 혈액형이 한 가지의 패턴을 보이는 거예요. ②임현규만 AB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A 형이에요. ⓐⓑⓒⓓⓔ는 혈액형이 무관하고요. 제가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대체로 A형들이 마약 의존도가 높다고 하더군요. 전혀 과학적인 정보는 아니지만 약쟁이들에게서 나온 말이니 믿어도 될 정보라고 봐요. 아무튼 그걸 인정하고 보면 패턴이 맞아요.”
억지로 짜 맞춘 패턴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아! 그리고 최동철씨도 A형이더군요.”
나는 김한일 형사를 보며 말했다.
“맞아. A형이야.”
대답은 정선배가 했다.
“그러니까 A형이 마약에 의존도가 높고 자살할 확률이 높다는 거지? 니 말은?”
나는 애매한 긍정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 역시도 억지 주장하기에는 자신이 없으니까.
“저는 좀 현실적인 자료가 있습니다. 보고자료가 더 올라오면 정리해서 드리려고 했는데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중간보고를 해야겠군요. 이수영에 대해 좀 조사를 해 봤는데…… 마약전과가 한 번 있었습니다. 집행유예로 끝났고 남자 친구는 부산에서 마약상으로 유명한 김상도라는 놈에게 칼을 맞고 즉사했습니다. 그게 약 9년 전이니까 2004년이군요. 그런데 이수영의 남자 친구 역시 마약상이었습니다. 김상도라는 자의 하부 조직원이었습니다. 보고서와 판결문에는 영역다툼으로 나와있더군요. 김상도는 2015년 1월에 출소했습니다.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고 현재는 완전히 손을 씻은 것 같습니다. 마약과는 말이죠!”
새로운 정보다.
“그럼. 김상도와 이수영의 관계는 적대적인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전혀 접촉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모르는 사실이고요. 아마 서로 잊기로 한 거겠죠. 김상도 역시 마약은 손 털은 게 맞으니까. 아! 그것 역시 부산 경찰에서 체크했습니다. 오히려 부산지역 약쟁이들은 김상도가 출소한 걸 모르는 눈치 더랍니다.”
김한일 형사가 큰 건 하나 해결한 것 같다.
“그럼 말이지. 이수영에게 마약을 공급한 놈은 혹시 알 수 없을까?”
정선배가 물었다.
“그건 저 역시 주문해 둔 사항이지만 사실상 그것까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부산에서는 마약 문제로 꽤나 큰 문제였던 사건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이수영에게 약을 대 준 놈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수영이 작정하고 마약을 구하려고 했다면 부산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도 구할 수 있는 문제고 말입니다.”
김한일 형사의 말이 맞는 말이다.
“그래? 알았어. 그건 그렇고 다시 너 이야기 좀 더 들어보자. 마약이라는 공통점. 좋았어. 그런데 이들이 자살을 하게 된 이유가 마약을 해서라는 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부검을 해 보면 되겠지. 우리는 그걸 놓치고 있었으니 모든 사망자의 마약 테스트는 건너뛴 것이고 말이야. 그건 순전히 내 잘못이군. 미안들 하다. 그래~ 마약을 했다고 치고 자살의 이유는…… 거기서 추리가 막혀 버리잖아. 그저 강박증 때문에?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지가 않아~”
정선배는 다시 심각해졌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강박증에 대해서들 말씀하시니까 제가 약쟁이들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좀 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는 잘들 모르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한일 형사가 말한 대로다. 우리야 부검이나 조사 수준에 있지 심리적인 부분은 현장을 뛰는 형사들보다 나을 게 없다. 심리적 부검에 있어서도 그들이 우리보다는 한 수, 아니 몇 수 위나 마찬가지니까.
“혹시 두 분, 연예인들이 왜 마약을 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뇨!”
“글쎄!”
김한일 형사의 말에 우리 둘 다 같은 대답을 했다.
“마약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기분이 좋아진다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마약을 하게 되면 인체의 감각기관이 평소보다 몇 배에서 수십 배까지 민감해집니다. 예를 들어 연예인을 기준으로 말입니다. 그래요. 음~ 가수 좋다. 가수로 해 보지요. 제가 음악을 잘 모르니까 이해하기 쉽게만 예를 들겠습니다. 가수 아무개씨는 평소 3옥타브 정도밖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꾐에 빠져 마약을 하고 노래를 부르니 4옥타브 혹은 5옥타브까지 올라갑니다. 이건 자신의 착각이 아니에요. 실제 녹음해 보면 스스로 놀래버립니다. 자신의 역량을 뛰어넘어 버리지요. 음~ 그 아무개 가수가 명가수가 됐다고 생각해 보세요. 1집이 대박 나고 또 2집, 3집이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느 정도 위치에 놓이게 되면 그곳에서 추락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반에서 1등만 하던 아이가 2등을 하게 될까 봐서 걱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연예인들은 그럴 때 마약의 유혹에 넘어가곤 합니다. 이미 마약을 하면 예술성이 자신을 뛰어넘는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때부터는 이 아무개 가수는 마약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물론 아무개 가수는 마약이 불법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가수에게는 몇 가지 강박증이 따라옵니다. 제정신일 때는 추락에 대한 공포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집착 등에 관한 강박증이 그리고 약에 취해 있을 때는 경찰에 잡히고 자신이 파멸될 것이란 강박증에 사로잡힙니다. 아무개는 이래도 공포스럽고 저래도 공포스럽습니다. 하지만 취해 있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마약에 의존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 마약에 대한 강박증이 심각해지면 정신분열이 시작됩니다. 영화에서 자주 접해 보셨을 겁니다. 정신분열증 환자 말입니다. 딱~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 안에서 나 아닌 내가 자신에게 말합니다. ‘야! 뒤에 경찰이 널 잡으려고 따라오고 있어!’그럼 아무개는 미친 듯이 도망칩니다. 교통사고를 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뒤따라 오는 차를 멈추고 세워 운전자를 묻지 마 폭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 운전자가 자신을 밀고하려고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 수준입니다. 심각할 경우에는 이럴 수도 있습니다. 한 놈에게 들은 이야긴데 자기 안에 있는 누군가가 그러더랍니다. ‘야! 미친놈아!’ 그럼 자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안 미쳤어. 미친놈아!’ 그럼 그 둘이 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죠. 그럼 이런 주문을 합니다. ‘미친 게 아니라면 지금 홀딱 벗고 길거리 나가서 춤춰봐!’ 이게 말입니다. 정신 분열이 온 약쟁이들은 이런 증상이 거의 백 퍼센트 나오는 겁니다. 정신 분열이 온 약쟁이가 홀딱 벗고 춤을 출까요? 안 출까요?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미친놈들 있죠? 대로변에서 성행위를 한다던가 나체쇼를 한다던가 자위를 한다던가 하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주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 거의 다 약쟁이입니다. 아니라고 발뺌해봐야 소용없어요. 어디 인간이 맨 정신에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주 상습으로 가는 놈들이 있습니다. 허구한 날 같은 걸로 잡혀 들어옵니다. 답이 없어요. 문제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마약을 하지 않아도 정신분열 상태가 되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날 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정도쯤 되면 거의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한 가지는 말입니다. 지 스스로 자수합니다. 차라리 다행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자살입니다. 저는 그래서 방금 송유리 조사관님이 말씀하신 마약에 의한 자살도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정도까지 되려면 이미 마약 전과가 있거나 주변에서 충분히 감지했을 거라고 봅니다.”
김한일 형사는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설명해 주었다. 정선배는 갑자기 부검실에 다녀오겠다며 뛰다시피 나가 버렸다.
“제가 궁금한 게 더 있는데요. 아까 말씀하신 연예인 중에 다른 사례는 없나요?”
“물론 많이 있습니다. 매스컴에는 그런 부분들을 알려주지 않는 것뿐이지 사실상 심각한 수준입니다. 작곡가, 작사가 등도 마약을 한 후 황당한 경우가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몽환적인 음악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이 맨 정신을 차리고서는 깜짝 놀라기도 한답니다. 아시다시피 성적인 부분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일반인의 경우에는 어때요?”
“마찬가지입니다. 좀 웃기는 경우인데 청소에 꽂히기도 하고…… 하여튼 그들은 뭔가에 꽂힌다는 표현을 합니다만. 음~ 예를 들면 청소에 꽂히면 면봉까지 찾아 꺼내서 벽의 모퉁이까지 먼지 하나 안 나오게 청소합니다. 결벽증 환자들도 절대 못 따라갈 수준입니다. 어디서 먼지 하나 나오는 꼴을 못 보는 거죠. 무려 이삼일 동안 청소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검거했던 한 약쟁이는 마약을 하고 집에 갔는데 냉장고에서 컴프레셔 소리가 나서 너무 신경이 쓰이더랍니다. 결국 냉장고를 완전히 분해해서 소리 나는 곳을 찾아 해결하고 다시 조립했답니다. 그 이후로는 툭하면 냉장고를 분해하고 조립한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상상하는 정도의 분해가 아닙니다. 나사 하나하나까지 다 분해해서 청소까지 하고 완벽하게 조립할 정도니까요. 그 정도로 청각은 물론 모든 감각이 증폭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은 아이폰을. 아니 그게~ 뜯어지기는 하는 거랍니까? 아무튼 그런 것은 물론이고 TV, 청소기 등 하여튼 소리 나는 건 죄다 뜯어 청소하고 아주 난리가 아닌 거죠. 12시간씩, 며칠씩 그 짓거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미친놈들이지. 심지어는 자위에 빠지는 놈들도 있는데. 12시간씩…… 어휴~”
김한일 형사는 혼자 광분해서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해댔다. 지금은 그가 더 약쟁이 같아 보인다.
“정말 심각하네요. 청소나 그런 것은 차라리 귀엽기는 하네요. 그런데 정신분열에서 자살까지~ 심각한 상황이네요. 우리야 증상을 책으로만 배운 터라. 그럴려니 했었는데…… 그런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말도 마세요. 제가 표현을 다 못해서 그렇지 제가 말씀드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하나만 더 말씀드릴게요. 어떤 놈은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면서 자살 소동까지 피우곤 합니다. 어찌 보면 이 세상에 중독될 거리가 많긴 하지만 마약 중독은 아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마약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이 2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느 정도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정부에서 마약 관련 캠페인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리려면 제대로 알려야죠. 그냥 나쁘다고만 하고 있지 그것이 왜 어떻게 나쁜 건지에 대해서는 감추려고만 하잖습니까? 옛날에 성교육이랍시고 하면서도 그걸 청소년들이 역행하는 것이 두려워서 대충대충 교육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제대로 알 권리가 있어요.”
김한일 형사의 긴 연설이 드디어 끝났다.
“저~ 혹시 최동철의 자살 말입니다.”
내가 물었다.
“네 말씀하시죠.”
“자살로 보이십니까? 타살로 보이십니까? 이건 순전히 현장감이 뛰어나신 분께 드리는 질문이에요. 사견이 궁금해서 말이죠.”
나는 과학적 수사로 입증할 수 없는 문제인데 정황상 자살로만 보기는 힘든 최동철의 자살에 대해 김한일 형사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글쎄요. 제가 단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타살일 수 없다고 봅니다. 어쨌든 마약은 마약입니다. 아직 어떤 종류의 마약을 투여한 지는 알 수 없지만, 타살? 글쎄요~”
김한일 형사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오늘 마약에 대해 할 말이 꽤 많은 듯했다.
“세계의 15세 이상의 7% 정도가 불법 마약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건 UNODC의 세계 마약실태 보고서에 나온 내용입니다. 제 생각에는 조사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①②③④⑤번이라고 분류하신 그룹이 모두 마약에 의한 자살이라고 한다면 뭔가 있을 수는 있다고 봅니다.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자살의 패턴이 사건의 패턴과 같다는 건 제삼자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같은 류의 마약을 투여한 사고라면 더욱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
김한일 형사가 떠난 후 나는 세계 마약실태 보고서를 찾아 정독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마약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신종마약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정선배의 보고서를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 수준의 실력으로 그 정도의 조사가 가능하긴 할까? 세계 마약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에 마약 투여자의 평균 13% 수준이 HIV 보균자며 50% 수준이 C형 간염 보균자라고 한다. 세상이 IT로 급성장을 하면서 마약 유통 역시 IT로 무장하며 그들 간의 거래 역시 온라인으로도 하고 있다고 하니 이제는 수사망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비트코인으로 결제하는 『darknet(검은망)』들 중 『실크로드』에서 5년간 매출이 12억 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6천억 원 정도라니 웃지 못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편, 코카인, 대마에서 암페타민형 각성제로 변이 되고 있다. 이른바 엑스터시 같은 것들이다. 합성마약이 그것이며 합성마약을 제조하기 위한 전구물질을 불법 유통하는 것을 일일이 막아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이 전구물질은 지난 20년간 생산량이 두 배로 늘었고 거래량도 무려 세 배가 늘었다고 한다. 전구물질의 합법적인 유통은 그렇다 치고, 불법적인 유통의 가격은 무수초산의 경우 리터당 1달러 수준인 것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불법 무수초산의 가격이 리터당 430달러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것은 2002년에 8달러였단다. 이것은 당연히 헤로인 가격에도 영향이 있었다. 세계는 이미 마약에 의해 병들고 있다는 보고다. 게다가 마약의 제조 유통에 있어 아시아가 그 중심에 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연기도 마약류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만성적이고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은 데다 강박증이 있고 약물중독 증상을 유발하는 정신활성 물질이니까.
*
김한일 형사가 다녀간 다음날 정선배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불러냈다. 폼을 보니 밤을 꼬박 새운 일 중독자 같았다. 정선배는 이제 다 해결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상환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증거는 확보했다.”
①②③④⑤와 최동철의 죽음 뒤에는 국내에서는 아직 소문 조차도 없었던 신종 마약이 있었다. 물론 해외에도 그런 마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내에서 개발된 신종 마약인 셈이다. 그들은 임상실험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곧장 조상환의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미궁 속에 있던 이 사건들이 최동철 사건으로 인해 실마리가 풀리는 것이다.
<신채은>
“내 이야기는 소설의 소재로도 제법 괜찮은 이야기야. 뭐~ 원한다면 소설을 써도 된다네. 기자 아가씨.”
그가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해 주려고 서두부터 거창한지 모르겠다. 하긴~ 내가 지금 앉아있는 점집과 그의 젊은 무당 아내만 봐도 그의 인생은 그리 평범해 보이지는 않다.
“이제 제 이름을 부르시죠.”
나는 기자양반이나 기자 아가씨라는 호칭이 너무 거슬렸다. 그는 내가 아까 건네주었던 명함을 다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예의 안경을 이마에 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 신채은씨였군. 그럼 신채은씨라고 부르면 되나?”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렇게 하시죠.”
“음~ 이야기가 좀 길어.”
그는 엉덩이를 들썩여 앉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입을 열었다.
“내게 딸이 있지. 아니! 있었지. 지금은 죽고 없어. 지금 내 나이가 50대 중반이야. 그러니까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였어. 난 딸을 하나 얻었지. 같이 뽕을 하던 여자가 임신을 하더니 덜컥 애를 낳아버린 거야. 우리는 결혼을 할 수는 없었어. 여자 집안이 꽤 잘 나가는 집이었거든. 부산에서 말이야. 물론 우리 집도 잘 나가는 집이었지. 문제는 내가 징역을 다녀온 것이야. 겨우 1년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어. 그게 내 인생의 최초의 징역 생활이었고. 그걸로 내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 거야. 그때만 해도 나는 겁날 게 없었어. 대학생이었지. 둘 다. 나는 선배를 통해서 대마부터 시작했고 시간이 가면서 좀 더 센 마약을 찾기 시작한 거야. 코카인도 하고 히로뽕도 하게 됐지.”
“혹시 히로뽕이 필로폰을 말하는 게 맞는 건가요?”
나는 확실히 해 두기 위해서 말을 끊고 물었다.
“그렇지. 신채은씨가 까막눈은 아닌 것 같네~ 혹시 마약 해봤나? 아니면 비슷한 거라도?”
“아뇨! 절대로!”
그가 나를 약쟁이로 보는 것에 기분이 상해 감정을 실어 말했다. 그는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군. 다른 의미는 아니야. 오해하지는 말고. 마약을 하면 말이야. ‘나’라는 존재가 없어져. 내가 내가 아니지. 판단력이 흐려진단 이야기야. 나는 내 여자 친구도 아닌, 애인도 아닌 그 여자 동기를 마약의 세계로 빠뜨려 버렸어. 그 여자는 집에서 나와서 몰래 애를 낳았어. 나는 징역에서 나와서 내 딸을 받았지. 그 후 여자는 부산에서 사라져 버렸어. 영원히 말이야. 물론 죽거나 한 건 아니라더군. 서울로 간 건지 외국으로 간 건지는 몰라. 그때부터 내 인생은 순탄치 않았어.
사람들은 대체로 징역에서는 마약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징역 안에서도 얼마든지 마약을 투여할 수 있어. 나는 마약 혐의로 징역 생활을 하면서도 징역 생활 내내 마약에 절어 있었지. 지금이야 예전보다 많이 까다로워졌지만 예전에는 간수한테 돈만 쥐어 주면 못하는 게 없었어. 난 돈이 좀 있었고 말이야. 집이 잘 살았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징역이나 아니나 별반 다름이 없었단 말이지.
난 딸을 두고 징역을 다녔어. 아이는 누나가 거의 키워줬지. 7살 때까지는 말이야. 누나는 매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이상은 나를 도와줄 수 없게 됐고, 나는 딸을 키울 수가 없었어. 하지만 고아원으로 보내기는 싫었어. 나는 내 딸을 그렇게까지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거든. 참 예뻤어. 지 엄마 닮아서 말이야. 나를 보고 웃어주는데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어. 하지만 내 딸은 결국 약쟁이들 손에 키워졌어.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고아원으로 보내는 게 옳은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우리 부모님은 징역 생활을 하는 나를 구제하려다 그 많은 재산을 모두 날려버렸어. 재판 때문에 큰돈이, 그 어마어마한 재산이 공중분해된 거야. 집안이 망하는 데는 10년 정도가 걸리더군. 정말 순식간이었어. 아버지는 기업체 사장에서 개인택시 기사로~ 그것도 나중에는 택시회사 월급쟁이 기사로 변해갔지.
30대 중반까지는 약에 취해서 다 보냈어. 친구? 이미 다 떠났지.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건 부모님 밖에 없었어. 형제들도 모두 나를 버렸지. 그 무렵부터는 내가 직접 약을 팔기 시작했어. 내가 약을 쓰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는데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거든. 약을 하는 것 빼고는 말이야. 그렇게 10년 정도를 살았어. 그 사이에 징역 생활을 세 번 더 했지. 내 딸은 그럭저럭 컸어. 거의 신경을 못써주고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제법 착하게 큰 것 같아. 정말 하늘이 도운 일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비뚤어지지도 않고 천사같이 살 수 있었던 건지.”
그는 잠시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지금부터가 그가 가장 괴로워하는 부분임을 알 것 같다.
“모든 건 내 잘못이지. 다 내 죄악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거야. 고2 때였어. 아~ 그건 정말…… 나는 내 집에서 그 새끼가 내 딸의 배 위에 올라타고 있는 걸 본 거야. 그때 난 알았어. 내 딸이 약에 취해 있다는 걸 말이야. 벌거벗고 그 개새끼에게 겁탈을 당하면서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풀어진 눈으로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 말이야. 그걸 보고 만 거야. 그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그 새끼는 내 동생 놈이었어. 지 딸 같은 아이를……”
그는 분노에 찬 표정에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때 미쳐버린 거야. 이미 내 의지는 없었어. 난 부엌에서 식칼을 꺼내 와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 칼로 수십 방을 찔렀지. 그런데 내 딸은 그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보고 웃었어. 그 표정은 5살 때의 그 천진난만한 웃음이었어. 벌거벗은 채 서서 나를 보고 있는 그 모습이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나는 내 딸을 챙겨서 아는 여자에게 보내고 바로 자수했어. 그리고 9년을 살았다네.
난 마약을 끊었어.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어. 모든 걸 알아버렸지만 이제 세상은 내 것이 아니었어. 내 딸도 이미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 딸은 천사였어. 하늘에서 내게 남겨 준 하나뿐인 천사였지. 녀석은 내가 감방에 있는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발했어. 나는 매일매일 후회하고 반성하고 이제라도 딸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했지.”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도 아주 길게 내쉬었다. 그의 한이 모두 쏟아져 나올 듯이 말이다. 나는 그의 딸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의 남은 이야기가 더 그를 괴롭힐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어떤 위로도 불가능할 것 같다. 그는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항상 이렇게 괴롭다네. 나는 만기출소 후에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어.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여기서는 이름도 바꾸고 사는데 뭐~ 이미 동네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고 나는 쥐 죽은 듯이 살지. 대신 돈을 벌어야 했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돈이 되는 건 다 하고 있어. 물론 모든 건 내 딸을 위해서 그랬던 거야. 아버지께서는 내가 마지막 징역 생활을 할 때 돌아가셨지. 효도 한 번 못해 봤는데 말이야. 난 정말 몹쓸 놈이야. 형제들은 나 때문에 모든 재산을 날려버린 부모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홀로 되신 어머니조차 돌아보지 않아. 이젠 내 몫이야. 내 딸은 징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부터 갑자기 우울해하기 시작했어. 우린 따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그 녀석이 약을 하는지 몰랐었어. 철저히 내게 감추었고 그리고 얼마 전에 자살해 버렸어. 내가 빚을 갚기도 전에 말이야. 나는 마약 때문에 나 혼자만이 아닌 내 주변의 모두를 죽여버린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야. 난 지금 내 딸에게 약을 준 놈을 찾고 있어. 난 그놈을 꼭 죽이고 말 거야. 그런데 지금 내 마누라는 내가 장수할 팔자라는군. 평생을 후회하면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을 거래. 그래서 나를 안아 줬다더군. 영혼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말이야.”
한참이 지나자 그의 표정과 안색이 다시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또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신채은씨가 나를 찾은 이유를 들어볼까? 내 이야기는 다 해 준 것 같은데……”
그는 컵에 담긴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다음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다. 지금까지 지켜본 그의 모습에서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게 뭘까?
“제 이야기요? 저는 이미 다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제 친구의 자살 원인과 부산에서 그 친구에게 마약을 공급한 사람을 찾고자 했던 겁니다. 지금 아저씨하고 저하고는 사연과 목표가 비슷한 것 같은데요. 저는 아저씨를 찾으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떠세요?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없나요? 저 역시도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거래를 하시죠.”
나는 과감하게 거래를 제안한 거다. 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다. 그는 또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인 것 같다.
“당신, 그 친구가 혹시…… 혹시 언제 죽었는가?”
그는 창 밖에 둔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 물었다. 왜지?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고 아직 한 달이 안됐네요.”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미처 사망일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
“그 친구도 얼마 되지 않았군. 혹시 성이 이씨인가?”
그가 다시 물었다. 순간 나는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의 딸이 댓글9단 이수영이라는 것을.
“혹시 이수영인가요? 따님이?”
내가 물었다. 하지만 성이 다른데. 내가 헛짚은 것이 아닐까?
“혹시나 했는데 당신 친구는 내 딸 수영이가 맞는 것 같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역시도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런데 성이 달라서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 그것도 사연이 있지. 나는 내 딸 수영이를 내 호적에 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네. 당시 하나밖에 없던 친구에게 부탁했었지. 내 딸을 호적에 올려 달라고 말이야. 우리는 피로 연결되기는 했지만 서류상으로는 연결되지 않았지. 내가 원한 바였고. 그것뿐이야.”
내 호기심 중 하나가 풀렸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왜 제게 감추시는 게 있는 거죠? 이제는 제게 다 풀어내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의 눈동자가 요동을 친다. 지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의 입이 자발적으로 열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비밀이 밝혀지기만을 기다리면서 묵묵히 기다렸다. 한 십 여분이 지났을까? 방 안은 적막함 속에 있었다. 단지, 그의 긴 한숨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고 나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내 귓가에도 들려왔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움직였다. 떨고 있는 게 아니고 말을 하기 위해 머뭇거리는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인자한 듯 보였던 인상이 꽤나 준수한 모습처럼 달리 보였다. 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뭔가 삶을 달관한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내 누나였어. 차에서 본 사진에 있는 여자가 바로~”
그는 한 마디를 던지고 눈물을 보였다.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온 가는 빛이 그의 눈물에 투명함을 더해 주었다. 그가 다시 뻐끔거리듯 말을 이었다.
“수영이는 나와 누나와의 결실이었어. 우린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어. 누나는 내가 징역 간 사이 자살해 버렸어. 수영이만 남기고 떠났지. 우린 불장난이 아니었어.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어. 우리에게는 마약이…… 마약은 우리의 약해진 영혼을 순식간에 빼앗아 버렸지. 서서히 마약의 노예가 되어간 거야. 점점 더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고만 믿었어. 우린 둘 다 미친 거였어. 스스로 알면서도 미쳐 있었어.”
그는 이제 오히려 홀가분한 눈빛을 하고 있다. 편안해 보였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쓰려거든 누나와 내 관계에 대해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데요. 이수영씨는 왜 자살을 한 거죠?”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친구라고 하지 않았던가?”
“네!”
“그런데 왜 이수영씨라고 하는 거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그의 말은 느낌이 강했다. 나는 댓글9단 이수영과 나와의 인연과 관계에 대해 모두 설명했다. 둘 다 정말 우연치고는 희한한 인연 같다.
“내 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군. 기자라는 사람도 가져다 쓸 정도의 문장력이 있었다니.”
그의 표정은 왠지 흐뭇한 듯 보였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수영씨 글에 상당한 깊이가 느껴졌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그런 아픔과 슬픔을 딛고 살아왔으니 말이에요.”
그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연예인 만나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내가 물었다. 왠지 그는 알 것도 같았다.
“이야기는 들었지. 하지만 내 딸과 그런 사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지.”
나는 그에게 이수영과 윤채아가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알고 계셨나요?”
“음. 우연히 알게 됐지. 하지만 난 말리지 않았어. 수영이 영혼을 누군가가 위로해 준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마약을 하게 된 건 그 연예인 여자 때문은 아니니까. 아마 내가 마지막 징역 생활을 하던 즈음이었을 거야. 그 녀석은 내내 마약을 해왔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어. 난 단지 내 딸에게 약을 대 준 놈을 잡고 싶지만 그런다고 해서 무엇이 바뀔 게 없다는 사실이 계속 내 발목을 잡았어. 내가 만약 알아내려고 했다면 벌써 알아냈을 거야. 아까는 내가 일부러 감추려다 보니 오버하게 된 거야. 아마 부산에서는 내게서 마약을 사지 않은 약쟁이는 없었을 거야. 그러니 내가 맘먹고 움직이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
“저는 지금까지 이수영씨에게 마약을 공급해준 사람이 이수영씨 자살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말씀 듣고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네요.”
나는 이 사건이 이제는 그저 자살로 마감을 짓겠구나 하는 결론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연예인 여자는 다른 여자와도 만나더군. 수영이만 만나는 게 아니었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말한 대로야. 수영이를 만나던 그즈음에…… 부산에 기장이라는 곳이 있어. 거기 사는 여자야. 수영이를 만나러 오면 꼭 그곳에 가더군. 물론 나는 수영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미행했던 거야. 다른 의도는 없었어. 그런데 말이지~ 그 여자에게 따라붙는 놈이 있었어. 그 여자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복잡한 여자야~ 지금은 그 여자를 만나는지 모르겠어.”
“아저씨. 거기 주소 좀 알 수 있을까요?”
“글쎄. 주소는 모르고 내가 정확하게 아는 동네라서. 나중에 주소는 알아봐 줄 수 있어.”
“그럼. 주소 좀 알려주세요. 올라가기 전에 들렀다 갈까 해요.”
“왜?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려고 하지? 그런 목적이라면 도와주고 싶지 않아!”
그는 단호했다. 어쩔 수 없다 싶다. 이번의 사건 추적은 여기까지 같다.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와 복잡한 골목길을 더듬어 빠져나왔다. 긴 여행을 하고 온 듯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부산에서 기나긴 여행을 했다. 김상도의 마약 인생 40년을 함께 산 듯했다. 태종대 관광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희영은 내가 마지막 날 시간을 내어주지 않고 떠날까 싶어 아쉬워하던 참이었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달고도 쓴 소주를 마셨다. 『좋은데이』 소주는 내 복잡한 심경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으로 거칠게 부딪쳤다. 나는 희영이에게 깊은 이야기를 해 주기는 어려웠다. 대충 이야기를 줄여 간단하게 성명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독되어 있던 소주에 취해 갔다.
태종대 바닷가의 거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동안 내 머릿속의 이야기들은 분해되고 다시 조립되었다. 김상도의 인생과 이수영의 인생과 윤채아의 인생은 각기 다르게 괴로웠을 거다. 하지만 그 고통을 마약에 기대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 바닷가에서 친구와 소주 한잔에 털어내 버리면 좋았을 것을~ 하긴…… 그들에게는 고민을 털어낼 친구가 없었던 거구나.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마약이 아닌 친구와 가족의 관심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의 존재감이었을 거다. 내게 있어 희영이처럼……
다음날 나는 이수영의 집 앞에 들러 그녀의 집 1002호를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다시 이수영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영혼의 말로~ 도둑질해서 미안하다고도 말했다.
<송유리>
조상환은 영장이 발부되고 불과 이틀 만에 잡혔다. 그다지 영리한 자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조상환은 끝까지 사실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는 자기 뒤에 누가 있다면서 우리더러 조심하라는 80년대 스타일의 협박을 당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차라리 그의 뒤에 있다는 자가 튀어나오길 바랬다. 그래야 속이 후련할 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정선배의 주장대로 증거가 없는 이상 조상환은 다시 풀어줘야 할 상황인 것이다. 물론 풀어주고 다시 잡으면 되지만 어설프게 해서는 다시 영장을 받아내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 정선배는 무슨 생각으로 조상환을 체포한 걸까? 실수할 사람이 아니니 지켜보는 수밖에.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땐 정말 있는 정나미가 다 떨어지려 한다. 나는 정선배의 지시대로 용주씨의 도움을 받아 마약이라는 공통점으로 ⓐⓑⓒⓓⓔ와 ①②③④⑤를 조사했다. 그러나 추가된 점은 없었다. 용주씨는 ①②③④⑤에서 stolen dream이라는 아이디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블로그에는 모든 stolen dream. 즉, 윤채아의 댓글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내용이야 그다지 별 것이 없었다. 내용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수영의 경우만 좀 독특한 것 같다. 그들은 정말 친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⑥을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우리는 앞으로의 사건들을 멈추기 위해서 ①②③④⑤의 공통점인 윤채아를 파고드는 것만이 남았다. 그러나 지금 이것만으로는 윤채아를 조사하기도 힘들다. 사회적으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게 연예인이라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실수를 하는 경우, 공멸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죽어나간 사건들이니까 말이다.
*
지진이 날 것 같은 머리를 잡고 끙끙거리는데 신채은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중요한 제보가 있으니 만나자는 거다. 그다지 당기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중요한 제보라는 것이 뭘까? 사실 내게는 신채은의 중요한 제보보다 ⓕ사건이 더 중요하다. 다만, 신채은의 제보가 이 사건들과 관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신채은 역시 쓸데없는 일로 바쁜 시간 쪼개가며 나를 만나자고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사실 윤채아의 아이디도 그렇고 이수영 사건은 물론 ①②③④⑤사건들이 윤채아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게 된 데 있어 신채은의 공이 큰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신채은은 약속시간보다 먼저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커피는 절반이나 마신 상태다. 나는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를 하나 주문하고 기다렸다. 신채은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투박한 의자에 앉자 신채은이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정보를 공유하시죠. 일종의 거래입니다.”
이 여자는 전에 없던 강한 자세로 나온다.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강하게 받아쳐야 하나? 고민이 된다.
“뭐죠? 정보공유는 뭐고, 거래는 또 뭐죠?”
내가 물었다. 신채은이 빙긋이 웃으며 내게 상체를 들이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은데요. 제가 터뜨리면 수사관님의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어요. 제대로 한 건 하려면 역시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 같아서 말이지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제가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신채은이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꼬아 앉은 다리가 청바지와 제법 예쁘게 잘 어울려 보인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수사관님은 제가 찾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이수영씨에게 마약을 공급한 사람이 누군지…… 윤채아가 요즘 누구를 만나는지. 그리고 또 뭐가 좀 더 있죠~”
지금 신채은이 우리가 찾아내려고 하는 것을 이미 찾아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걸 신채은씨가 어떻게 알게 된 거죠?”
“글쎄요. 현장을 발 벗고 뛴 결과라고나 할까요?”
“우리 형사들도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들인데. 그걸 신채은씨가 어떻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선배라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럼~ 제 정보가 더 우위에 있는 것 같군요. 그럼 제가 먼저 조건을 말씀드리지요. 이 사건에 대한 기사는 제가 쓰겠습니다. 독점 취재가 될 거예요. 그 조건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신채은이 말했다.
“아!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요. 사건이 해결된다면 그 정도야 못 해 드리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게 감추고 있는 이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시죠.”
“그건 안됩니다.”
“왜죠?”
“아직 공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알려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저도 정보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 계약은 없는 건가요?”
어! 이 여자 세게 나오네? 지난번에는 순진해 보이더니 확 달라졌잖아! 나는 잠시 신채은과 눈싸움을 벌였다. 신경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신채은의 정보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닿았다.
“그럼 저도 조건이 있군요. 기사를 쓰는 건 인정하겠지만 사건이 완전히 조사되기 전에는 절대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도 공개하겠습니다. 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조건이에요.”
“그다지 까다로운 조건은 아니군요. 그럼 거래하기로 하죠. 먼저 말씀하시죠.”
우리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데 합의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내가 먼저 ⓐⓑⓒ-①②③ 사건과 ⓓⓔ-④⑤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④는 물론 이수영 사건이라는 걸 주지 시켰고 앞으로 ⓕ사건과 ⑥사건이 터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 신채은 덕분에 stolen dream을 알게 되어서 사건의 연관성을 찾게 되었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신채은은 자신의 정보가 이미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을 알고 기뻐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는 신종 마약이 사용된 것을 알려주었다.
“어? 그렇다면 또 재미있어지는데요? 그건 제게 정말 도움이 되는…… 아니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예요.”
신채은은 정체를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누군가 덕분에 이 사건을 상당히 끌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도 부산의 기장에 거주하는 여자가 ⑥ 사건의 당사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윤채아의 레즈비언 성향에 대해 듣고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윤채아가 이 사건의 주범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용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다시 조상환에게로 초점이 돌아왔다. 조상환이 윤채아를 조종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곧장 정선배에게 조상환과 윤채아의 관계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알렸다. 그 둘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분명하다. 그들이 사용한 마약은 국내에서 개발된 신종마약이고 다른 곳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조상환과 윤채아에게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채은이 감추고 있는 사람은 대체 이 사건을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는 걸까? 부산 기장의 주소지라도 알게 된다면 현장에서 마약 혐의로 윤채아를 체포할 수도 있다. 나는 신채은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부산 기장의 위치를 꼭 알아내야만 한다. 신채은은 전화통화를 하겠다며 잠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동안 정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선배는 신종마약의 분석을 의뢰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약반은 조상환에게 신종마약에 관해 추궁하고 있다. 신종마약 개발은 법적으로 어떤 구속력이 있을까? 조상환의 위에 있는 자들까지 한 번에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수사에도 달라진 것이 생겼다고 했다. 윤채아와 ⓐⓑⓒⓓⓔ 역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아이디 문제였다. 윤채아의 개인 계정인 stolen dream가 아닌 yoonchaea1004라는 아이디였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었다.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있었다. ⓐⓑⓒⓓⓔ는 윤채아와 거의 같은 시기에 관계가 있었고 ①②③과 ④⑤는 1년의 기간이 차이가 났다. 패턴이 명확해진 거다. 이제 부산 기장에 산다는 그 여자의 정체와 아이디를 찾아내면 이 사건은 확실해지는 것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 여자는 ⑥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는 알 수 없다. ⓕ를 막기 위해서는 윤채아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신채은이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표정이 밝다.
“곧 주소가 여기로 들어올 거예요.”
신채은이 옅은 핑크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
윤채아의 마약 혐의에 대해서는 모든 증거를 확보했다. 당장 체포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와일드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 조상환의 추궁은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구속수사로 변경됐으며 윤채아는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부산 기장으로 향했고 미행하던 형사들에게 긴급 체포됐다. 현장에서는 신종마약이 발견되었으며 함께 투약했던 여자가 함께 구속됐다. 우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⑥이 될 뻔한 여자는 자신의 자살을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앞으로 ⓕ 사건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⑥이 ⓕ의 범인이라면 말이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채아는 전혀 놀라거나 낙담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당당하고 무덤덤해 보였다. 모두들 그녀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보였다. 어떤 연예인도 마약 혐의로 구속되면서 윤채아 같은 당당함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윤채아의 조사에서 신종마약을 공급한 자가 조상환이라는 증언을 받아냈다. 이제 조상환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다만, 그의 여죄를 캐내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의 목표는 윤채아를 구속시키는 것도 아니고 조상환을 마약 혐의로 구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여태 끌어왔던 사건을 풀어내는 것이다. 다행히 며칠 후 용주씨는 윤채아의 공개된 아이디 yoonchaea1004에 연결된 ⓐⓑⓒⓓⓔ의 아이디를 찾아 윤채아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이것 역시 댓글 공방이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모르긴 해도 윤채아로서는 그 댓글을 보았다면 살인 충동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지난 기사들을 뒤져 ⓐⓑⓒⓓⓔ의 댓글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파악했다. 당시 윤채아는 상당수의 네티즌들로부터 마녀사냥을 당했었다. 그 후 루머로 규명되면서 오해는 풀렸다. 어떤 이유에선지 윤채아는 악성 댓글을 달았던 사람들을 용서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댓글과 루머의 수위로 볼 때 윤채아가 그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는 모두 죽었다. ①②③④⑤에 의해. 그런데 윤채아는 ④와는 매우 각별했다. ⑥이 될뻔한 여자와는 성관계까지 가졌다. 이 안에는 대체 어떤 공식이 있는 걸까? ①②③④⑤에게 살인을 사주했단 말인가? ①은 ⓐ에, ②는 ⓑ에, ③은 ⓒ에, ④는 ⓓ에, ⑤는 ⓔ에 각기 댓글로 인한 원한을 가진 것은 확실하다. 윤채아가 이들에게 살인을 하라고 펌프질 한 것이라는 건가? 그렇다고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①②③은 남자다. 윤채아는 그들과도 성관계를 가졌을까? ①②③④⑤는 윤채아와 악의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모두 조상환에게서 공급받은 신종마약을 투약했다. 혹시~ 설마! 윤채아는 ⓐⓑⓒⓓⓔ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들에게 상처 받은 ①②③④⑤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마약을 투여하고 성관계를 가지게 한 다음 살인을 하도록 사주했다? 그리고 당사자들은 자살한다. 결국 이런 시나리오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약이 나중에는 강박증 때문에 자살까지 이어진다고 했는데…… 그리고 ①②③④⑤는 모두 마약에 빠져들기 쉬운 A형과 AB형이다. 이건 애초부터 마약을 이용해 간접적인 살인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윤채아가 선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인가?
*
윤채아는 한동안 모르쇠로 일관했다. 조상환이 구치소에서 자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⑥은 영문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 ⑥은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되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죽고 죽이기 전에 마약 혐의로 체포된 거다. 아마 ⑥에게는 죽이고 싶을 정도의 ⓕ가 존재할 것이다. 정작 본인은 ⓕ를 죽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강박증에 시달리다 자살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이 모든 추리는 모든 것을 체념한 윤채아의 고백 때문에 가능했다. 윤채아는 네티즌들의 마녀사냥으로 상처 받았다. 이미 ⓐⓑⓒⓓⓔ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윤채아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윤채아는 조상환의 도움으로 살인을 시도했다. 윤채아는 마녀사냥 이후 조상환에게서 마약을 배웠다. 그들은 성관계를 맺었다. 조상환은 윤채아를 사랑했지만 윤채아는 그렇지 않았다. 윤채아는 오로지 복수에만 목적이 있었다. 이 비극은 마녀사냥에서부터 시작된 복수를 위한 하나의 작은 전쟁이었다.
<신채은>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현장형 기자가 되었다. 겁이 나기도 했고 망설여지기도 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앞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나는 기사를 쓰고 있다. 다음 호에 낼 기사다.
차도살인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36계』에서 24계다. 직역하자면 『빌려온 칼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조금 부드럽게 풀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공격한다는 의미가 된다.
‘길을 빌려 괵나라를 친다.’
작은 나라의 어려움을 틈타 이를 정벌하는 책략이다.
예로써 괵은 춘추시대의 한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큰 나라인 진이 작은 나라인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 괵나라를 공격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마저 멸망시킨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네이버 포털사이트에서 차도살인으로 검색한 내용이다>
병법으로 치자면야 우수한 전략, 전술임에는 확실한 방법이다. 나는 이번 윤채아씨의 사건에서 두 가지 형태의 살인을 보았다. 위에 풀이한 차도살인과 그 원인이 되었던 촌철살인이다. 나는 이 두 살인에 대해 사건의 발단부터 더듬어 보려 한다. 세상의 어떤 살인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두 살인에 있어 무엇이 더 나쁜 건지를 두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이 사건이 있을 즈음에 <연금술사>라는 소설로 유명한 파울로 코엘료의 <불륜>을 읽고 있었다. 소설 안에서 나는 한 마디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윤채아는 구속된 상태다. 언제 판결이 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녀의 자백에 의하면 자신은 차도살인을 실현했다. 그녀는 이미 자살해버린 피의자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살인을 지시한 적이 없다. 이것을 두고 현재의 법령으로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이들은 윤채아는 물론 자신을 살해한 피의자에게 촌철살인을 선행한 사실이 있다. 피해자들은 피의자의 영혼을 살해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차도살인과 촌철살인 중 무엇이 더 나쁜 행위냐를 두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단지, 우리는 이 일련의 복잡한 사건을 두고 자신을 되새기며 우리의 머리를 일깨울 필요가 있다.
나는 이번 사건들을 통해 세상에 일침을 놓고 싶다. 파울로 코엘료가 말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세상 누구도 그것을 당신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당신 스스로도 그것이 당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도덕에 기준을 두고 보면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 지어질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당신은 약자가 꼭 선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런 고정관념이 바른 것이라고 한다면 약자의 폭력은 정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법은 정의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정신이상이란 같은 행동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불합리하고 불행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희망이 넘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정신이상자다. 우리는 윤채아를 욕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2년 전 그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영혼을 살해당했었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죽고 없다. 그녀가 구속되던 날, 나는 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세상은 영혼이 죽어버린 그녀의 육신만 구속해 놓은 것이다.
나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내 잣대로 그녀를 재 보련다. 선후의 문제를 떠나 윤채아 역시도 용서받을 수는 없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누가 그녀를 용서해야 하는지 그 주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살해한 피해자들을 살인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윤채아는 그들의 공범이라고 할 수도 있다. 법률의 제도 안에서는 그녀를 더 이상 구속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대로 이미 죽은 영혼이 더 이상 무엇을 후회하고 깨우치겠는가? 우리는 이미 그녀의 영혼에게서조차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든다. 영혼을 죽이는 행위와 육신을 죽이는 행위 중 어떤 것이 더 나쁜 걸까?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누군가는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게 당신이 될지도 모른다. 당신이 무심코 던진 농담 한 마디에 그 누군가는 상처 받았을 수 있다. 상대방이 시름하는 동안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당신은 정의롭고 착하고 여린 사람이다. 혹시 또 모르겠다. 어쩌면 인터넷이라는 곳에서 가면을 쓰고 누군가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당신이 그저 시간 죽이기로 장난 삼아 던진 말(글) 일지는 몰라도 그 결과가 사랑스러운 국민배우 윤채아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꿔버렸을 수 있다. 당신의 악성 댓글은 그저 심심풀이였을지 모르지만 이미 고통받고 있던 그녀에게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을 주었을 거다.
우리가 어떤 기사나 게시물에 대고 악성 댓글을 다는 이유가 뭘까? 당신은 우연히, 그것도 아주 우연히 누군가 달아놓은 악성 댓글을 읽고는 그것이 올바른 정보라고 오인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댓글을 달고 있었을 것이다. 잘 모르는 이야기도 어느새 아주 잘 아는 진실이 되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 글 잘 쓰는 이야기꾼에 의해서 말이다. 그들은 누가 봐도 진실이라고 느낄 정도로 논리적으로 재구성한다. 결국엔 없던 사실도 진실이 되어버린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침없이 부풀려지고 변형된다.
그 누구도 그토록 친절했던 당신에게 인터넷 속에서는 조금은 악해져도 된다고 등 떠밀지 않았다. 표현은 자유지만 불필요한 말은 자제해야 한다. 당신이 키보드로 두드려댄 한 줄의 글은 흉기 그 자체다. 상대방은 당신의 스트레스 해소 대상이 아니다. 지금 이 글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당신은 윤채아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두에게 국어공부를 다시 해 보자고 주문한다. 오래전 사업을 하다 부도위기에 처했던 친구에게서 들은 말을 예로 들어본다.
누구는 그에게 “사업이 망하고 있는데 어쩌냐?”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네가 정말 추락하는구나~”라며 위로했단다.
그는 내게 말했다.
“왜 친구들은 내게 ‘어둠 속을 항해하느라 힘들지’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 걸까?”
라고 말이다.
나는 당신에게 시인이 되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디 쉽게 던지기 전에 한 번쯤은 생각해 볼 기회가 있다. 지금, 나는 말이라는 녀석 말고, 적어도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보고 내놓을 수 있는 글이란 놈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왜? 한번 더 생각해보지 않는 걸까? 우리에게 생각해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생각이 머리에서 입까지 가감 없이 전달되는 유아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로그인하라. 자신의 지난 댓글들을 보라.
지금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당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영혼을 살해당했을지도 모르니까.
<송유리>
나는 중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나는 용주씨와 함께 사랑 중독에 빠져들었다.
헤어 나오지 못하는 깊은 사랑이다.
얼마 전 나는 중독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중독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는 무언가에 자꾸 의존하려 한다.
사랑에 의존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에 만족하지 못한 것인지 다른 것들에 의존하려고 한다.
술, 담배, 게임, 도박, 섹스, 자위, 마약 등등
언젠가부터 우리는 귀를 닫고 살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누군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모두들 그들이 사랑을 갈구하는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잠시라도 어깨를 빌려 줄 수 있는 넉넉함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마약 중독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거기까지 간 것은 바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랬다.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고.
그러나 지나간 것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설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