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옥스퍼드는 두 사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UCL의 추천서가 들어왔다며 인터뷰 제안이 왔다.
고고학으로 명망 있는 대학 아닌가?
그들의 논문이 의외의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의기소침했던 두 사람은 뜻하지 않은 결과에 하늘을 날 듯 기뻤다.
UCL은 고고학 분야에서 캠브리지나 옥스퍼드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런던으로 떠나기 전까지 이무기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로 했다.
왕파파는 아빠의 데스크톱 컴퓨터 전원을 켰다.
아빠는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한번 집중하면 몇 시간이고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다.
왕파파는 그동안 아빠의 컴퓨터를 열어보지 않았다.
언젠가 아빠가 돌아올 거란 믿음 같은 것 때문이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아빠의 과업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아빠의 컴퓨터를 켜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왕파파가 데스크톱의 데이터를 검색하는 동안 김혜미는 노트북으로 이무기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김혜미의 잠자는 것만 빼고는 하루 종일 왕파파의 집에서 지냈다.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김혜미 부모의 잔소리도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았다.
어차피 영국으로 떠나고 나면 통제 밖이라며 자포자기한 것이었다.
십 년 넘게 붙어 지냈던 왕파파와 김혜미의 집중력은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긴 했지만 어둠이 짙어지는 것도 모른 채였다.
꼬로록~
왕파파의 배에서 배고프다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갑자기 김혜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에 가야겠다. 엄마가 해 지기 전에는 꼭 들어오라고 하셨는데 혼나겠다."
"왜? 대체 언제부터 그런 규칙이 생겼어?"
왕파파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엄마가 남자는 다 늑대라고 했어. 밤이 되면 변한다고 말이야."
"퍽이나 그러셨겠다. 그런데 왜? 벌써 가려고?"
왕파파의 표정에 아쉬움이 그려져 있었다.
김혜미와 함께 있으면 존재감 자체만으로도 편안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작지만 고른 숨소리가 좋았고 은은하게 풍기는 체취도 좋았다.
가끔씩 신경질을 내며 뱉는 욕지기는 꼭 필요한 추임새 같아 좋았다.
"출국하기 전에 엄마 아빠하고 좀 더 같이 지내기로 했어. 너야 혼자 지낸 지 오래돼서 무감각할지는 모르지만 난 엄마하고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눈물이 나오려 해. 이번에 나가면 적어도 반년 이상은 못 들어올 것 같으니까 엄마 아빠 실컷 봐야지."
김혜미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왕파파도 정리하던 자료를 저장하고 따라 나갔는데 김혜미는 벌써 신발을 신고 있었다.
빨리 가려는 이유는 알지만 왠지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죽고 벌써 몇 년이나 흘렀어도 지금까지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던 적은 없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홀로 남은 듯한 기분에 축 쳐지는 것만 같았다.
손을 흔들고 집을 떠나는 김혜미를 바래다줄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빠, 푸라고의 과업은 숙명 같은 것이며 자신이 이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파파는 머리를 흔들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껏 해야 백 년이나 살 수 있을까 싶은 인간으로서 수천 년을 살아왔을 푸라고의 대를 잇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왕파파는 이무기에 대한 자료를 마저 정리하기로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용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심형래 감독이 제작한 디워에 나오는 괴수가 바로 이무기를 그린 것이다.
이무기에 대해서라면 그보다 많은 연구를 했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에게 자료를 요청하면 쉬운 일이겠지만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금세 마음을 접고 말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무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설화에서의 이무기는 토지신과 용의 중간쯤 되는 존재이며 물속에서 천 년을 수행해야 여의주를 얻을 수 있다.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면 용이 된다고 한다.
모든 게 허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어떤 문헌에서는 오백 년 묵은 뱀은 이무기가 되며 또 오백 년을 묵으면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된다고도 했다.
어떤 전래동화에서는 세 개의 여의주를 얻은 이무기가 욕심을 버리고 하나만 선택하여 용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무기와 관련된 설화 중에는 인간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물에서 나온 이무기가 인간의 판단에 의해 뱀이 되거나 용이 되는 운명을 맞는다는 설도 있다.
이무기는 자라와는 상극이라는 표현도 있다.
어쩌면 자라와 비슷한 형태의 용이 있다면 이무기의 천적일 수도 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1950년 즘에 저수지 같은 곳에서 이무기를 목격했다는 증인도 몇 있다.
신화나 설화 중에는 이무기에 대한 기록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물론 중복되거나 변형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많았지만 대체로 창의적인 부분이 예상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푸라고의 일기 중에 나왔던 강철이는 수행에 실패한 이무기다.
성격이 난폭하여 말 그대로 괴수의 존재나 마찬가지다.
흔히 알던 용들과 마찬가지로 입에서 불을 뿜는데 어찌나 범위가 큰지 우박이 내리는 기상이변이 생길 정도라는 것이다.
과장된 것이겠지만 심지어는 가뭄이 들 정도로 열기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이무기는 다른 용과 다른 부분이 많다.
너무 많은 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개체수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설화대로라면 이무기는 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인데 허무맹랑하게도 인간에게 쉽게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설정이다.
게다가 이무기들 중 대부분은 죽거나 다시 뱀이 되었다고 한다.
오백 년이나 천 년이라는 설정도 너무 구시대적인 구상이다.
디워에 나오는 부라퀴나 발퀴르 같은 이무기는 심형래 감독에 의해 창조된 가상의 설정이다.
왕파파는 이무기를 목격했다는 설화를 찾다가 지명 하나를 발견하고 눈동자의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
"아! 천안!"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가전리.
바로 그들이 사는 동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