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파파는 기억 속에 있는 동네 구석구석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무기가 살았을 만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산방천이 흐르기는 하지만 대개 설화에서는 이무기가 연못이나 호수 같은 곳에 살았다고 기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봐서 그쪽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후순위로 두고 기억을 더듬었다. 동네 일부는 큰 대학교가 자리 잡았고 대형 아파트 단지도 몇 개 있다. 게다가 대형 공장과 창고들도 많이 들어선 상황이라 예전에 연못이 있었다 해도 그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야산도 많이 잘려 나가 이무기가 살아있다 해도 이런 곳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왕파파는 푸라고가 이무기 찾기를 포기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가장 유력한 곳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했다. 후순위로 미뤄 뒀던 산방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으로 논밭이 있지만 워낙 사람의 손을 많이 탄 곳이라 이무기가 있다면 괴소문이라도 돌았어야 정상일 것 같았다.
왕파파는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리기로 하고 여러 목격담을 검색했다. 최근 백 년 사이 열 개가 넘는 목격담이 인터넷을 타고 흘러 다니고 있었다. 누가 봐도 꾸며댄 이야기에 불과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한 가지가 머릿속에 번지듯이 확장되고 있었다. 제주도 김녕사굴이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푸라고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갔던 기억이 났다. 엄마도 함께였다. 너무 어릴 때였기에 선명한 기억은 아니지만 분명 차갑고 어두운 동굴에도 갔었다. 물론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도 제주도에 갔었고 만장굴에 다녀온 기억도 있다. 다만 푸라고와 함께 갔던 동굴이 만장굴이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왕파파는 스마트폰은 달력을 보더니 만지작거렸다. 생각은 실천으로 옮겨야 후회하지 않는다던 아빠의 말이 기억났다. 할까 말까 고민스러울 땐 하는 게 속이 편하다는 건 여러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왕파파는 1번 버튼을 꾹 눌렀다.
"벌써 보고 싶었어?"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은 김혜미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요즘 왜 그러는 거야?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알았어. 뻣뻣하기는. 왜 전화했어?"
목소리는 그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제주도 갈래?"
"응? 갑자기 제주도에는 왜?"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왕파파는 김녕사굴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폐쇄했다고는 하지만 근처라도 가본다면 푸라고와 갔던 곳인지 정도는 기억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이유라면 못 갈 것도 없지. 아니구나. 꼭 가야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김혜미는 여행을 가는 걸로 생각을 돌렸는지 목소리에 들뜬 기분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왕파파!"
한참 제주도의 이무기에 관한 자료를 찾느라 인터넷 검색에 푹 빠져있던 왕파파는 김혜미의 목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양쪽 어깨 위에는 김혜미의 작은 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쫙 달라붙는 스키니 한 하얀 온동복을 입은 그녀가 보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열두 시가 다 되었을 것이라는 건 감으로 알고 있었다. 시험기간에 함께 밤을 새우거나 한 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늦은 시간에 집을 방문한 경우는 없었다. 그것도 연락조차 없이 불쑥 찾아온 건 그의 기억으로는 처음 같았다.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아저씨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스러운 눈치시던데."
"너를? 우리 엄마 아빠가? 퍽이나 그러시겠다. 내가 널 어떻게 하면 했지."
김혜미는 뒤에서 왕파파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그리고는 귀에다 속삭이듯 말했다. 왕파파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느낌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신체적인 접촉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반 나체나 다름없는 모습을 가족처럼 보며 살아왔기도 했고 은밀한 부위도 여러 번 목격하기도 했었기에 어떤 노골적인 행위를 해도 이성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던 그녀였다. 왕파파는 김혜미의 팔에서 벗어나며 일어났다.
"너 요즘 왜 그래? 발정 났어?"
"어쭈? 이게 요즘 안 쓰는 용어를 쓰네? 한동안 안 맞아서 그러냐?"
왕파파는 단어 선정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미안한 생각을 하던 참인데 김혜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미안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이 헛 나왔어."
"그럴 의도가 뭔데? 사실 너도 나 좋아하지?"
김혜미는 작정했다는 듯이 들이밀었다. 왕파파는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했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우린 아직."
"하여튼, 소심한 자식.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청소년도 아니고 너나 나나 그냥 감정에 솔직해져도 괜찮아. 이제는."
"감정은 충분히 솔직해. 난 세상에서 개미가 제일 좋거든. 하지만 책임지지 못할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무슨 책임? 우리가 뭐가 문제인데? 너 혹시 나랑 뭐 이상한 거 하는 그런 거 상상한 거 아냐? 난 그냥 너를 동생처럼 생각하고 안아준 것뿐이거든."
김혜미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왕파파 옆 의자에 앉았다.
"아냐. 그럼 됐어. 내가 괜히 너무 오버했나 보다."
"괜찮아. 하여튼 남자들은 뇌 성장이 너무 느려. 그런데 뭐에 빠졌길에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제주도... 이무기 그리고 제주도 신화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
"김녕사굴 이야기는 아까 검색해봤어. 그런데 갑자기 제주도 신화는 왜 튀어나온 거야?"
흠~, 왕파파는 깊은숨을 내쉬고는 지긋이 김혜미를 보았다.
"제주도에는 엄청나게 많은 신화들이 있더라고. 연결고리가 있을 것도 같아. 그리고 하나 더 찾아냈어."
"뭔데? 뜸 들이지 말고 하지 그래."
"이무기가 말이지, 중국에도 출몰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왕파파는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김혜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용이 어딜 못 가겠어? 비자 발급 받아야 중국 가냐? 비행기를 타야 일본에 가겠냐? 너도 참 단순하다. 그걸 대단한 거라고 자랑하는 거야?"
왕파파는 김혜미의 핀잔을 듣고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네. 우리에게나 중국이니 일본이니 유럽이니 하는 국가적 경계가 있는 게 아닌데 너무 인간적인 틀에서만 생각했었나봐. 정말 단순하게 생각했네."
"너한테 해줄 이야기가 있었는데 갑자기 흥미가 사라졌다. 우리 왕파파는 정말 똑똑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그러지 말고 그냥 이야기해 주면 안 될까? 내 생각이 좁긴 했지만 어쨌든 이무기가 중국에 있을 수도 있다는 정보는 알게 됐잖아."
"중국 어디에 있는 줄은 알고? 그 넓은 데서? 차라리 아까처럼 아저씨 찾으러 중국 가자고 하지 그래."
왠지 무거워진 듯한 왕파파의 표정을 살피던 김혜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김녕사굴 이야기 듣고 검색 좀 했거든. 만장굴 근처더라고. 너도 자료 봤을 것 같은데 말야. 김녕사굴과 마낭굴은 원래 하나였대. 언제 무너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간 부분이 사라졌다잖아. 그 안에 이무기가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