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리 걸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좁은 지역이라 어지간히 폐쇄적이 아니라면 이름만 대도 누가 어느 집 자식인지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초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는 같은 출신인 경우가 많아 한 번도 같은 반이 아닌 적이 없었을 정도로 학생 수도 많지 않았다. 왕파파와 김혜미는 남녀 학교로 갈라진 고등학교 외에는 전부 같은 학교를 다닌 터라 지역에서 그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파파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김혜미는 공공연히 왕파파를 자기 남자 친구라고 떠벌이고 다녔다. 왕파파는 김혜미에게 따지고 들었고 남자 고등학교 다니는 친한 친구라고 말한 것이 와전되어 심하게는 집안에서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까지 소문이 돌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그런 소문이 돌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게 어쩌면 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너 혹시 나 좋아해서 그런 소문 만들었던 거 아니야?"
왕파파가 물었다.
"차 좀 멈춰 봐. 너 좀 죽이고 가야겠다. 이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김혜미가 핸들을 잡은 왕파파의 목을 졸랐다.
"농담이야. 그런데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왕파파는 내심 그녀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김혜미는 툭하면 좋아한다며 달라붙곤 했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영국으로 가기 전부터는 예전에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묻어있다는 걸 은근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자연스러운 표현을 하지 않았다. 좀 달라졌다고 생각되는 게 있다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스킨십이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뭘 자꾸 기억하라는 거야?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한 거?"
김혜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왕파파는 얼굴이 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이 자식 좀 봐! 너 나 좋아하냐? 얼굴이 새빨개졌네..."
김혜미가 놀리듯 싶더니 두 손으로 앞쪽을 보던 왕파파의 두 볼을 잡고 압력을 가했다.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왕파파는 두 손을 뿌리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정말! 그만 좀 해!"
절대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왕파파는 속으로 신음을 내었다. 김혜미는 화가 났는지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멀리 사막 위로 해가 넘어가는 게 보였다. 하악~ 한숨을 내쉰 왕파파는 김혜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얼마 기다리지 못하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김혜미 쪽을 향했다. 왕파파는 그녀의 옆에 서야 하나 뒤에 서야 하나 고민했다. 좁고 예쁜 두 어깨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외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몸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왕파파는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 두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약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혜미의 몸에서 샴푸 냄새와 사막의 땀 냄새가 섞여 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향긋하고 싱그러운 냄새는 나미비아 사막과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김혜미는 백허그를 거부하거나 하지 않았다. 왕파파는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로 코에서 나오는 숨결을 아주 조심스럽게 뿜어냈다. 김혜미는 목 언저리에서 왕파파의 가는 숨이 미끄러지듯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숨은 끊어지지 않은 채 보이지 않게 이어진 듯했다. 쇄골을 스친 숨결은 가슴골까지 느껴졌다. 마치 왕파파의 손길이라는 착각이 들었던 김혜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에 약한 전기가 오른 듯,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미안해."
왕파파 역시 김혜미의 그런 변화를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있었다.
"뭐가?"
순간 왕파파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언젠가 보았던 남자와 여자의 대화에 관한 내용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 역시 자신에게서 구체적인 답을 듣기를 원하는 일반적인 여자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냥, 다!"
"이런 병신!"
김혜미는 짧게 한마디 뱉고는 왕파파의 팔 안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왕파파가 깜짝 놀라고 상황 판단을 하고 대응을 하려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할 여유도 주지 않고 목을 끌어안았다. 왕파파는 우주의 시간처럼 길면서도 빛처럼 짧은 순간에 김혜미의 입술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찰나, 김혜미의 까만 눈동자가 긴 눈꺼풀 사이로 숨으며 가는 물방울을 고이게 하는 것도 보았다. 지금까지 엄마가 갓 구워준 스펀지 빵이 세상에서 가장 보드랍고 촉촉하다고 생각해왔었던 그의 생각이 깨져 나갔다. 그 어떤 것도 그토록 보드랍고 따뜻하며 촉촉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목 뒤로 휘어감은 김혜미의 가는 팔뚝에서 묘한 수분이 느껴졌다. 피부와 피부 사이에서 서로의 솜털들이 서로 부대끼며 비벼지고 있었다. 단단하면서도 통통한 가슴이 찰싹 달라붙어 콩닥거리는 심장 박동과 짧고 거칠어진 호흡도 느껴졌다. 김혜미의 입술은 풀을 바른 듯 그 상태였다. 왕파파는 입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녀를 안았던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김혜미의 입에서 뜨겁고 깊은숨이 쏟아졌다.
"하여튼! 키스도 할 줄 모르냐?"
왕파파의 가슴을 밀어낸 김혜미가 소리쳤다. 산통 다 깨졌다며 후회스러움이 밀려든 왕파파는 어리둥절했다.
"뭐? 내가 뭐?"
"어휴! 숙맥!"
김혜미가 나미비아 사막의 모래를 걷어찼다.
"너는 뭐 숙맥 아니냐? 니가 뭐 사랑의 전문가라도 돼?"
왕파파는 단어 선정을 잘못했다는 생각에 후회했다.
"사랑? 너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해?"
김혜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왕파파는 이게 어떤 느낌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도 사랑이 뭔지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사랑이 맞다면 사랑인 것 같기도 했다.
"그만 가자! 내가 다시는 키스해주나 봐라! 정말!"
김혜미는 툴툴거리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표정엔 성공했다는 느낌이 강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나미비아의 사막 위로 긴 모래바람이 끝도 없이 일어났다. 짙은 사막의 어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