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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Feb 08. 2020

자전거 팁. 안녕? 봉크!

기억 모퉁이에서 녀석을 찾아냈다

요즘 복잡한 일이 있어서 머리 아픈 김에 한동안 재워 두었던 술꾼을 소환했다. 지평막걸리 큰 병 하나를 열어 큰 통에 붓고 500미리 레페 흑맥주 한 캔을 섞었다. 약 이십 년 전 전라도 광주에서 첫 경험을 했던 비딱주를 재연한 거다. 그땐 하이트 맥주에 흔들지 않은 막걸리를 조심스럽게 따라 1:1로 섞어서 마셨다. 요령을 몰랐던 나는 첫 병을 마구 흔들었다가 아주머니에게 혼이 난 후 한 병을 다시 받았다. 술이든 음식이든 다 먹는 요령이 있으니 모를 땐 잠자코 있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이번엔 마구 흔든 막걸리에 시커먼 흑맥주인데 그날 먹었던 비딱주와는 차원이 다른 술이 됐다. 비딱주라 함은 'beer&탁주'를 줄여 말한 건데, 나는 앉은뱅이 술이 무엇인지 그날 경험했다. 인간이 그 정도로 삐딱하게 쓰러질 수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하루 정도 물에 불려 두었던 검은콩의 껍질을 벗겨내고 믹서로 거칠게 갈아 부침가루와 후추, 소금 등을 넣고 전을 부쳤다. 십 년 전쯤 집에서 처치 곤란이던 콩을 가지고 두부도 만들고 이것저것 해 먹다가 우연히 개발한 나만의 메뉴다. 담백하고 고소하고 건강에도 좋은 영양만점의 먹거리다.


딱 이렇게 된다.

기름기도 별로 없어서 아이들이 맨 손으로 집어먹기도 좋다. 한참 비딱주를 들이켜는데...

자전거 사부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무슨 일일까?

"내일 뭐하냐?"

"놀아야죠. ㅋㅋ"

"자전거 타자~"

"그러죠. 뭐~"

"내일 성산으로 와라. 송추 가자."

"뉍!"

대화는 아주 간결하다. 잠시 후 내가 활동하는 한강라이딩 동호회에서 제일 무시무시한 팀인 네버스탑의 리더님에게서 카톡이. 긴 대화를 다 줄여서 정리하자면 내일 꼭 나오라는 것이다. 그동안 '타도! 네버스탑!'을 외치며 언젠가는 네버스탑과 라이딩할 수 있는 체력과 몸을 만들겠노라 떠들고 다녔었는데 이놈의 몸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제멋대로였다. 어쩌면 살이 원하는 만큼 빠지고 체력이 좋아진다 한들 네버스탑 팀 라이딩에 참여하면 '개피'를 볼 게 뻔하기에 몸이 거부한 건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막걸리도 한 잔 마셨겠다. 오랜만에 사부님도 만날 기회니 선뜻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아무튼 술이 원수라더니...






알람을 맞춰 두고 잔 덕분에 제때 눈을 뜨긴 했다. 하지만 국적불명의 흔치 않은 비딱주라는 폭탄주를 마셨으니 머리가 아픈 게 당연하다. 일어나기 싫고, 자전거도 귀찮았지만 약속 때문에 부랴부랴 몸을 움직였다. 해장에 최고는 해장똥을 해치우고 나니 정신이 좀 살아났다. 잘 생긴 얼굴이라면 그냥 나가겠는데 어쩔 수 없이 이를 닦고 눈곱을 떼기 위해 고양이도 비웃을 정도로 간단히 얼굴을 씻었다. (고양이 안 키우는 게 다행이다.) 개인적인 일이 있어 남양주에 잠시 거주하는 상황이라 도농에서 성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려면 한 시간 반은 달려야 한다. 거리는 거의 40km 정도. 그 정도야 우습지, 라는 생각을 하고 한강으로 접어들었는데 맞바람이 만만지 않다. 초반부터 힘을 빼야 하는 상황이다. 속도가 나지 않지만 시간이 촉박해 열심히 달려야 한다. 시간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잠깐 전화를 하기 위해 마포대교 근처에서 한 번 쉰 것을 제외하면 논스톱이나 마찬가지다. 성산에 도착하니 역시 내가 꼴찌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송추고개 코스로 향했다. 초반엔 달리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내가 누군데. ^^ 체력이라면 어디 가도 꿀리는 않는 내가... 내가... 갑자기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업힐이라지만 별 것도 아닌 경사도에서 뒤처지기 시작하는데 내 몸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총 60km 정도 달렸을 뿐인데 이런 정도라면 앞으로 남은 코스를 완주하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핸들 조작이 좀 이상하다 싶더니 앞바퀴에 바람이 몽땅 빠지고 말았다. 요즘 예비용 튜브를 꼭 챙겨서 다니는데 이번에도 펑크를 면치 못했다. 전화를 걸어 사부님에게 도움을 구하고 튜브를 갈았는데... 아뿔싸! 이 튜브도 문제가 있었다. 다른 튜브를 얻어 교체하고 다시 업힐을 달렸는데 고개 하나를 넘자 다시 힘이 쭉 빠져버렸다. 속도는 점점 느려지더니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나의 상태를 감지한 한 분이 나를 콘보이 하며 라이딩해 주셨는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라이딩에서 짐이 된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펑크. 두 번째다. 그것도 같은 앞바퀴. 분명 타이어 안쪽에 이물질 같은 건 없었는데 요즘따라 상태가 이상한 걸 보면 교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튜브 교체 후 다시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머리가 몽롱해지며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리는 유체이탈 같은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말로만 듣던 봉크였다. 두뇌회전은 느려지고 판단력이 흐려졌다. 이렇게 가다가는 차에 쳐서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나는 이미 멀러 떨어진 그분에게 소리를 지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어지러웠다. 눈 앞이 하얗게 변하며 호흡도 이상했다.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목에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닥만 보고 달렸으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란 말인가? 이런 정도의 라이딩으로 내 체력이 바닥날 리가 없었다. 마침 앉기 좋은 돌이 보여 자전거를 던지다시피 팽개치고 앉았다. 클릿을 빼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물을 몽땅 털어 마시고 숨을 골랐지만 상황이 호전되지 않았다. 머리는 멍하고 의식은 흐렸다. 혹시 이러다 골로 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자전거 타다가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를 케어해 주시던 철인 형님이 다시 돌아와 나를 돌봐 주신다. 에너지바 하나를 주셨는데 사양 한 번 안 하고 넙죽 받아먹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그거 아니었으면 택시 타고 집에 갈 뻔했습니다.) 십 분 넘게 그러고 앉아 있으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이젠 빨리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안전하게 복귀하는 게 목표다. 에너지바 덕분에 체력이 약간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이 힘든 것도 아닌데 정말 이상한 증상이었다. 속도는 시속 25km/s를 넘기기 힘들었다. 거의 21~23km/s 수준이었고 약간이라도 경사진 길이 나오면 속도는 기다시피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는데 왠지 익숙한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반갑지 않은 기억이다. 한 번은 죽음 앞에 선 적이 있었는데 딱 이런 증상까지 갔었다. 무기력증! 바로 그것이었다. 자전거 동호인들 사이에서는 '봉크'라고 하는데 '탈진'과 비슷한 것 같다. 등산에 한참 미쳐 있을 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까지 갔던 경험과 체중이 80kg을 넘기자 화가 나서 다이어트 산행을 하겠다며 36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장거리 코스를 단독 등반하다 비슷한 증상을 겪었었다. 물론 그때는 이삼십 대였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다.

그때의 상황을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해외산악원정 때였는데, 사고와 조난이 이어졌고 하루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황에 폭풍우 속에서 살기 위해 무조건 걸어야만 했다. 눈은 허리 이상 빠지는 설산에서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확실하지 않은 희망을 믿고 나아갔다. 아마 당시 우리 둘 다 한 시간 이상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 타이밍을 놓쳤다면 지금 이런 글도 쓰지 못하겠지... 다이어트 산행 역시 너무 무모했다. 아무리 철인 같은 체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런 계획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무식한 거다. 이번 봉크와 마찬가지로 한 걸음도 걷기 힘들 정도였고 말 그대로 정신력으로 버텨낸 것이지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변사체로 발견됐을 것이다.

봉크, 탈진 증상은 의외로 심각한 상황을 야기한다. 코스를 마친 후 일행들과 내 증상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전거 마니아(자덕이라고들 한다.)들은 한 번 이상 봉크 증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다들 경험담을 풀어놓았는데 증상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체내에 에너지가 고갈될 상황이 되면 뇌가 몸으로 가는 에너지를 차단한다. 내 사부님의 경우, 몸은 열심히 달렸던 것 같은데 한 구간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다. 운전하면서 기억이 없는 건 음주운전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거다. 나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지만 말이다. 페달을 밟을 힘이 없으니 페달과 연결된 클릿에서 발을 빼낼 힘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대로 자빠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봉크를 아주 잘 설명한 블로그가 있어 소개한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므로.

https://mvkceo.blogspot.com/2016/09/bon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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