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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Mar 23. 2020

제주도민 같은 육지것의 며칠

무서운 코로나19를 피해 며칠 제주에 머물기로 했다.

텅텅 빈 김포공항은 코로나19의 위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대기줄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남은 휴가를 몰아서 쓰라던 항공사의 버티기 작전은 그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수라고 해도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공항이 작아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제주공항은 김포공항보다 그나마 상황이 낫다.

어쨌든 제주를 찾은 여행자들의 표정과 말투에는 들뜬 기분이 엿보였다.


평소엔 저렴한 항공편을 이용하기 위해 저녁 비행기를 타는 편이라 좀처럼 창 밖 풍경을 감상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엔 점심께 출발한 덕에 대한민국을 쭉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전날까지 비가 내린 덕에 날씨도 화창해 위성지도를 펼쳐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제주는 겨울의 끝자락에 서서 간신히 버티고 선 시기다.

최근 이주일 동안 간간히 내린 비는 마치 '고사리 장마'나 마찬가지였지만 '고사리 철'은 아직 멀었다.

제주 동쪽은 무, 당근 수확이 한창이다.

큰길에서 벗어나 농로로 접어들면 여기저기 밭 위에 작업 중인 일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성산으로 가는 길,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역시 구름이 약간 끼어 있어야 더욱 멋지다.

멀리 한라산의 스카이라인을 돋보이게 하는 낙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종달리까지 돌아서 가기로 했다.

지난번에 괜찮은 포토존을 찾아냈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조금만 빨랐으면 좀 더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었겠지만 더 늦었으면 그나마 이 사진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만족하며 살아야 건강에 이롭다.





다음날 아침, 버섯을 뜯을 생각으로 남원 쪽을 향했다.

하지만 내공의 부족으로 썩은 나무에 자란 목이버섯 몇 개 정도로 만족하고 다시 성산 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던 길에 브레이크를 밟게 만든 것이 있었다.

너무 예쁜 유채밭이 눈에 띈 것이다.



서울에서 아침마다 당근도 갈아먹을 것도 필요하고 해서 지인들에게도 보낼 요량으로 당근 이삭을 캐기로 했다.

꽤 오래전 수확한 밭인데 트랙터로 갈아엎지 않은 밭이다.

수확 당시에는 너무 작아 수확 대상에서 제외된 당근들이었는데 그동안 제법 많이 자라 있었다.

밭에서 당근을 캐다 한입 베어 물은 당근의 달달함은 과일에 버금갔다.

당근을 캐다 보니 양이 점점 많아져 서울 집과 지인들에게 보내고도 넘칠 정도였다.



집으로 가는 길.

가시덤불 사이로 보인 달래밭.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봄 하면 달래!'라는 공식이 있었던가?

이상하게도 봄이 되면 의례히 달래 담뿍 넣고 끓인 고소한 된장찌개가 봄 식단 순위에 올려져 있었다.

파도 파도 너무 많은 달래.

하지만 정도껏만 캐고 자리를 떴다.



점심 식사는 집 앞마당에서 키운 상추와 미나리로 쌈을 싸서 먹기로 했는데 성큼 다가온 봄을 제대로 느끼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미나리에 꽂혀 버렸는데 주변에 미나리밭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식후 미나리 사냥에 나서기로 했다.



미나리밭은 너무 넓어 매일 몇 자루씩 해도 몇 달은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야생에서 자란 미나리는 그야말로 보약이나 마찬가지다.

간에 그렇게 좋다니 열심히 먹어야 하는 녀석 아닌가?



택배로 보낼 당근을 15kg짜리 귤 상자에 가득 채웠다.

박스를 흔들면서 빈틈없이 꽉꽉 채워 넣고 달래도 조금씩 끼워 넣었다.

이 정도면 지인들과 제주를 공유하기에 충분하지 싶었다.

총 네 상자. 내 것을 빼고 세 명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이번엔 바다로 나갔다.

문어를 잡을 목표로 루어대에 문어 채비를 하고 평소 가지 않았던 포인트를 답사했다.

하지만 몇 시간을 캐스팅해도 입질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자리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하도리를 벗어나 성산으로 갔다가 다시 하도리로 돌아가는 길에 하도해수욕장에 티피텐트를 중심으로 백패킹용 소형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제대로 캠핑한다 싶었다.

내가 부린 여유와는 사뭇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함께 캠핑할 사람이 있다면 언제라도 시도할 텐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혼자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데 너무 인색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지만 그 흔한 학꽁치 한 마리 구경조차 하지 못하다가 하도방파제에서 손바닥 만한 고등어 두 마리와 난생처음 본 대형 군소(바다달팽이)를 발견했다.

해가 저물 무렵 고등어 두 마리를 구경한 뒤 어둠이 깊자 적막함이 깊어졌다.



낚시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군소 손질을 시작했다.

대략 난감하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걸까?

커도 너무 크다.

괴물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소주 안주를 만들어 놓고...



비록 작은 고등어지만 육지에선 먹기 힘든 고등어회가 소주 안주로 최고인 듯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지인들에게 당근을 보내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데 역시 포인트를 찾지 못해 배회한다.

이렇게까지 낚시를 해야 하나?

잡히지 않으니 오기가 발동한 거다.



아침에 먹은 게 없어서일까?

도전적 의지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성산 근처 편의점에서 즐겨 먹는 참깨라면 한 사발.

역시 배가 든든해야 힘이 난다.

경치 좋은 곳에서는 뭘 먹어도 맛있나 보다.



이번엔 멀리 남원의 큰엉해안경승지 옆 유명 낚시 포인트로 향했다.

제주에서 낚시를 다니면서 이렇게 장거리를 뛴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 30분 이상 가는 것도 귀찮다.



드디어 도착한 큰엉해안경승지.

좋은 포인트에는 벌써 낚시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낚시가 되긴 할까?

멀리까지 왔으니 일단 낚시를 드리워본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하지만 고기는 입질조차 않았다.

먼저 왔던 낚시꾼들이 한 명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내 낚시만 물지 않는 건 아닌 듯했다.

이왕 멀리까지 왔는데 공치고 가려니 아쉽다.

난 이참에 멀리 영락리까지 가보기로 작정했다.

낚시를 정리하고 보니 벌써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한 시간은 가야 하니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자동차박물관 옆 길에는 유채꽃이 만발했다.

역시 제주인 건가?



사진이 이것밖에 없어 아쉽지만 낚시가 됐다는 증거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영락리 갯바위를 메우고 있었다.

내가 주로 다니던 포인트인데 소문이 난 건가? ㅠㅠ

어쩔 수 없이 위치를 옮겨 벵에돔 채비를 던졌다.

옆 사람들을 보니 고등어를 줄기차게 올리고 있었다.

고등어가 두세 마리씩 달려 올라오는 것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파도는 제법 세게 쳐서 너울이 바위를 차고 올랐다.

가끔씩 물벼락을 맞아가며 꾸준히 올린 결과 두 시간도 안 되어 25마리나 잡았다.

아쉽지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인 데다 날도 어두워져 낚시를 마쳐야 했다.



25~30cm 급 고등어들이 25마리.

내장을 제거하고 끓여 살만 추렸다.

추어탕처럼 조리하면 고소하고 맛난 음식이 된다.

그건 다음에 먹기로 하고 냉동실로 직행.



암컷 리트리버 영미와 떠돌이 잡종견 숏.

다리가 짧아 숏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녀석은 어쩌다 보니 가족에 됐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숏은 다른 녀석들보다 집을 잘 지키는 것 같다. ^^

당근, 달래, 미나리 등을 나눠 드리니 귀한 마스크 두 장을 선물로 주신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가 선물이 되는 재밌는 세상이 온 거다.

육지에서는 마스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인데...



도로변엔 개나리가 봄을 장식하고 동백꽃은 아쉬운 듯 겨울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태풍 급 강풍으로 비행기가 지연되거나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변동사항을 없었다.

김포공항을 랜딩 하던 중 터뷸런스 때문에 비행기가 널을 뛰는데 아이들은 재밌는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첫 번째 랜딩에 실패한 비행기는 김포공항 위에서 10분 정도 선회한 후 다시 랜딩을 시도했다.



그날 저녁, 나는 육지에서 제주맥주를 맛보며 제주의 여운을 즐겼다.

제주행 비행기만 백 번 넘게 탔을 텐데 아직도 제주는 묘한 감흥을 주곤 한다.

곧 고사리철이 오면 한라산 자락에 1미터가 넘는 먹고사리 꺾으러 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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