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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Jun 16. 2020

지금까지 알던
사려니숲길은 잊어라!

MTB로 사려니숲 구석구석

제주도에 사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몰랐을 것이다.

사려니숲을 안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숲의 겉만 핥다 나왔을 것이다.

잘 익은 과일의 과육 철철 흐르는 듯한 사려니숲의 진정한 맛을 느끼려면 하루 정도 날 잡고 구석구석 다녀야 한다.

걸어서라면 하루, MTB로는 반나절이면 사려니숲을 가슴에 담아올 수 있다.

폐 속 진득하게 달라붙는 피톤치드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없는 거짓말까지 몽땅 갖다 붙이고 싶을 지경이니까!


먼저 동영상 하나 투척!


이거 말고 동영상이 몇 개 더 있지만...




공개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사려니숲길을 찾은 이유가 있다.

목적을 달성해야 하기에 작정하고 찾아간 그곳엔 뜻하지 않은 보물이 있었다.

마구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의 환희랄까?

아무도 없는 깊은 숲 속을 홀로 달리는 기분을 누가 알까?

누구는 혼자라서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 같은 포근한 숲이 나를 꼭 안아주는데 대체 무얼 겁내겠나?


요일 저녁엔 다음 지도를 펴고 사려니숲길을 더듬었다.

516 도로에서 사려니숲길을 타고 성산까지 가는 길은 백 번도 넘게 지나다녔기에 사려니숲길의 풍모는 이미 내 안에 녹아있었지만 숲 안의 모습을 직접 체험한다는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사려니숲길은 나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걷기를 좋아해 제주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는 엄마도 그 숲에 꼭 가보라며 추천을 해 주셨지만 말이다.


그런데 토요일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일기예보에서는 9시부터 비가 내릴 거라고 예고하고 있었고 아침 일찍 출발해서 자전거를 타리라던 목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부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장마급 폭우가 쏟아졌다.

계획을 접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성산 일출봉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는데 빗방울이 가늘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제주의 기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태풍에 쓸려가는 것처럼 몸을 날려버릴 듯했다.

말 그대로 돌풍이다.

갈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차로 한 바퀴 돌아보기로 작정하고 집을 떠났다.


무턱대고...

자전거를 싣지 않은 차를 몰고 붉은오름 방향으로 향했다.

그냥 호기심을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붉은오름 X, 사려니숲길 X...


차로 갈 수 있 곳은 없다.

비가 오니 방문객도 없어 한산하고 사려니숲 입구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결국 전공인 호기심을 발휘하여 안 가본 길을 탐색하기로 했다.

카카오 맵 지도를 열어 위성사진을 크게 확대했다.

전날 미리 봐 두었던 곳이 있었다.

516 도로에서 연결되었을 법한 묘한 집이 보였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있지 않아 로드뷰로 진입로를 확인해둔 참이었다.



숲을 헤치고 들어간 곳엔 위성지도에서 보았던 집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다.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에 나와도 될 법한 곳.

이런 데 살면 병도 안 나겠지 싶었다.


차를 돌려 나온 나는 사려니숲길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싶어 수망리 방향으로 향했다.

위성지도에는 송전탑 설치 당시 만든 임도가 있었다.

그 길을 찾아 들어가면 사려니숲길에 다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거다.



공동묘지에서 이어진 임도는 깊은 숲 속으로 나를 끌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아무도 없는 숲 속은 약간 으슥한 느낌을 자아냈다.

숲으로 난 임도를 구석구석 후비고 다녔지만 사려니숲으로 강 수 있는 길은 모두 막혀있는 듯했다.

송전탑 설치 당시 개설된 임도가 맞는 것 같긴 했다.

질긴 호기심을 간신히 뿌리친 나는 숲을 벗어나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 나의 눈에 띈 묘한 길이 있었다.

그곳에서 결국 세미 오프로드를 즐겼는데 노루 세 마리를 목격할 수 있었다.

더 깊은 숲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녀석들의 궁둥이를 지켜보며 천천히 숲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비는 그치고 말았다.

황당했다.

집 뒤쪽에 농약 한번 주지 않은 유기농 하귤을 따서 몇 개 뜯어먹은 나는 제철인 벵에돔과 무늬오징어 사냥에 나섰다.

무슨 일인지 흔히 물던 벵에는 얼굴을 보여줄 생각도 않고  잡어나 건져냈다.

무늬오징어 낚시도 마찬가지였다.

에깅 낚시는 그야말로 캐스팅과 액션, 릴링 노동의 연속이다.

결과? 없다!

모든 게 공친 날이다.






GPS라는 이기 덕분에 위성지도 위에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라 현 위치를 파악하며 산속을 떠도는 재미는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극한의 상황에서라면 별의별 악조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IT 현주소는 매우 유용한 수준에 있기에 혼자라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다.



다음날인 일요일 6시 30분.

비가 그친 하늘을 확인하고 기상 지도를 확인했다.

구름이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이게 웬 땡큐인가?

나는 급히 빕숏에 져지를 입고 튕기듯 집을 뛰쳐나갔다.

엄마의 MTB라 안장을 끝까지 뽑아 내 키에 가까스로 맞게 조절한 뒤 앞바퀴를 빼고 차에 실었다.

안 빼도 들어가긴 하는데 뭐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지...

아무튼 다시 비가 내리기 전에 작정했던 사려니숲길 라이딩을 마쳐야 한다.



도로 위에는 차 한 대 보이지 않는다.

한적함이 공허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아스팔트의 검은색이 무게감을 주는 듯했다.

집에서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입구까지는 불과 30분 정도의 거리다.



사려니숲길로 갈까 하다가 먼저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지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붉은오름에서 사려니숲길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억지스러운 기대 때문이었다.

잘 가꿔진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은 마음이 급해질 정도로 숨을 쉬게 했다.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껏 어떤 공기로도 만져보지 못했을 폐 구석구석까지 한라산의 정기 뭍은 공기를 쑤셔 넣어야만 했다.

생명 덩어리가 몸 안에 축적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생명이 응축된 나의 폐를 한껏 활용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늘어난 느낌인가? ^^





아쉽게도 붉은오름 휴양림에서 사려니숲길로 연결되는 길은 없었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숲과 시설물들을 실컷 즐긴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자전거보다는 걷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싶었는데 나오는 길에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한다.

들어올 땐 몰랐는데 아무튼...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나서는데 제발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지 말라고 부탁을 한다.

자전거는 이렇듯 숲에선 대우를 받지 못하는 녀석이다.



붉은오름 휴양림을 빠져나온 나는 공도를 타고 사려니숲길 입구로 향했다.

잠깐이면 되는 짧은 거리지만 숲을 달리다 보니 영 못마땅하단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사려니숲길 입구로 들어서자 산수국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숲길 좌우로 빽빽하게 심어진 산수국은 인위적이어서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조금 달리자 이정표라는 놈(그분은 지칭한 게 아닙니다. ㅋㅋ)이 나타났다.

이왕이면 지도 위에 표시해주면 좋았을 건데...

아무튼 UI의 이해도가 부족한 디자이너, 공무원의 한계 같다.



숲을 즐길 세라... 느낄 세라...

정말 숲을 달리는 기분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예상치 못했던 사려니숲은 나를 가슴 뛰게 했다.

사진에서나 보던 외국의 유명한 숲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여기가 과연 한국일까, 제주는 맞는 걸까 싶은 깊고 깊은 한라산의 심장 언저리의 이 숲은 그동안 알았던 모든 숲의 정체를 뒤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야생의 식물에 대해 공부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꽃들이 보란 듯이 자란 이 숲.

넓게 정리된 숲길 옆으로는 걷기에 딱 좋은 오솔길이 있다.

만약 자전거를 타고 온 게 아니었다면 그 길로만 걸었으리라.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끊어지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보았던 내추럴한 깊은 숲이 내게 남긴 여운이 다시 도는 듯했다.



사려니숲길을 따라 쭉 가면 비자림로 쪽으로 가게 되는데 나는 갈림길에서 다시 반대로 돌아 나왔다.

내 방문 목적은 남쪽 방향인 수망리 마흐니숲길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갈림길까지는 약간 경사가 있는 업힐이었는데 돌아 나오는 길은 긴 다운힐이 이어졌다.

한참을 달려 내려오다 정자가 있었던 갈림길을 만났다.

위성지도를 확인하니 거기서 길을 타고 가면 나의 목적지를 갈 수 있다.



긴 다운힐이 이어졌다.

전반적으로 다운힐 위주의 코스라고 보면 된다.

한라산 어깨를 넘어 내려가는 코스여서 그런 것 같다.

숲길은 역시 송전탑 설치 당시 만들어진 길이었다.

중간중간 꼿꼿이 서 있는 송전탑이 그걸 증명했다.

깊은 숲 속에 사람의 손이 닿은 뭔가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길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는 아스콘 포장이 되어있고, 일부는 가공된 제주석 판재로 깔았는데 이끼가 껴서 미끄러웠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기를 몇 번.

차라리 끌고 내려가는 게 낫겠다 싶어 속도를 줄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순간적으로 자전거가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한숨이 나왔다.

마침 그 덕에 잠시 걷기 시작했는데 시 느림의 미학이 있다.

차보다는 자전거, 그보다는 걷는 거 그리고 잠시 쉬어갈 때 깊이 있는 감흥을 받을 수 있다.

한라산 자락의 아름다운 숲은 그렇게 힐러가 되어주었다.

별 고민 같은 거 없이 사는 사람인데 이렇게 좋으니 온갖 스트레스에 찌든 사람이 그 숲을 즐긴다면 생명에 활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숲을 빠져나오는 길은 끝까지 내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 긴 감흥을 주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거닐던 노루 한 마리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숲으로 미끄러지듯 숨어들었다.

인사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숲을 한껏 즐기고 내려오는 길에 만난 폐골재 파쇄석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청정의 숲이 이게 웬 말인가...

여행의 끝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 부분은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다.



밀 농사였을까?

보리농사였을까?

농사가 끝나고 짚단을 묶어둔 것들이 마시멜로 같다.

이것도 나름의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이제 차를 댄 곳으로...

그런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던 비가 거세졌다.

어차피 젖어도 되는 라이딩 복장이라 신경 쓸 일은 없지만 흙탕물이 얼굴과 등에 마구 튀어 라이딩에 거슬렸다.

하지만 달리는 즐거움은 그 어떤 것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우아아아아악!

즐거움에 지른 소리였다.

축축한 옷이 전혀 부대끼지 않는 아주 상쾌한 기분이 나름 잠식했다.



이제 다시 공도를 만나는 지점이다.

더 클래식 cc 남쪽으로 나온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공도를 타고 붉은오름까지만 가면 된다.

자전거도로가 없는 2차선 도로지만 다행히 폭 좁은 갓길이 있었다.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근처에 삼다수 공장이 있어서 카고트럭이 쌩쌩 달리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공도는 즐거운 라이딩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했다.

더워 죽겠다는 늦봄, 초여름날의 어느 날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피톤치드 맘껏 들이키며 최상의 힐링을 느낀 라이딩이었다.

또 가야지~~~



이번 라이딩은 20.98km

11시 약속이 없었다면 좀 더 둘러보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다음에 다시 돌아보리라.

이 코스는 MTB 아니면 달릴 수 없다.

그래블 바이크라면 모를까.

누적 고도는 물찻오름 올라가면서 생긴 거다.

남쪽으로 가는 코스는 거의 다운힐이다.

사려니숲길에서 라이딩을 해본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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