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 그리고 다시 서울

돌배나무집 셋째 딸 Vol.11

by 루파고

모든 흉터에는 각기 파란만장한 사연들이 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흉터들에서부터 언뜻 보기에도 큰 사연이 있을 법한 흉터도 있다. 타인의 눈에는 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흉터일지라도, 흉터의 주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사연도 있다. 아무리 깊게 들여다본다 해도 사연을 알 수 없을 거다. 흉터의 깊이와 사연의 깊이는 비례하지 않는다. 삶이 길어지면 연출하지 않았던 수많은 단막극으로 이어지는 흉터가 하나둘 늘어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삶이 생이 끝나는 시점까지는 가는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지유의 서울 생활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첫 학기 때는 학교에 정을 두지 않아 친구들을 사귀지 않았다. 고향 친구 몇 명 있었지만 그들도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고 일부러 그들에게 연락을 하는 것도 싫었다. 큰언니는 거의 매일 밤이 늦어서야 들어왔다. 더군다나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 일쑤여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서울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맞은 그해 겨울은 진해의 겨울과 달랐다. 진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눈이 내리면 며칠간 녹지도 않았다. 세상은 하얗게 아름답다가 금세 거무튀튀 누렇게 변해버렸다. 추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난해 2월에 입학 준비로 왔을 때와는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 지혜는 지유와 서울 구경에 나섰다. 지유로서는 작정하고 서울 나들이를 나선 건 처음이었다. 서울엔 진해와는 달리 세련된 여자들이 넘쳐났다. 특히 명동에서 본 여자들은 완전히 달랐다. 지유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시골 여자라는 걸 실감했다.

“너 남자 친구 생겼다면서?”

“남자 친구는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아빠한테 들은 거야?”

“어떤 남자야?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아빠가 교감 선생님만 아니었으면 우리의 청춘이 얼마나 로맨틱했겠어?”

“맞는 말이긴 해! 우리 집에 하숙하고 있는 군인들이 그렇게 들이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뭐? 아빠는 군인 싫어하시잖아!”

“그냥 호기심에 한 번씩 만나본 것뿐이야.”

"한 번씩?"

지혜는 지유의 답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얘 좀 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남자가 한 명이 아니었던 거야? 너 대단하다! 아빠가 부득불 너를 여기까지 직접 데리고 올라오신 이유가 있었구나~ 대체 어떤 남자들이야?”

지유는 지혜의 눈빛을 살폈다. 고집 센 언니는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뻔했다. 지유는 입 다물기를 포기하고 김선명과 정미소와의 이야기를 풀었다. 정미소와 포옹했던 일은 감추고 서다. 오해 살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머머~ 얘 좀 봐! 하여튼~ 그 정도 노력 아니면 니가 눈길이나 한번 주기나 했겠어? 그런데 두 남자 전부 정말 멋지다! 몇 살이야? 계급은 뭐래? 어떻게 생겼어?”

지혜는 신이 났는지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몰라! 물어보지도 않았어. 언니는 누가 더 괜찮은 것 같아?”

“둘 다 멋지긴 한데, 난 두 번째 남자가 훨씬 더 멋져 보여~ 넌 어때?”

“글쎄, 나도 그 남자가 맘에 들긴 하는데 매너가 없는 것 같아. 김선명 씨는 귀여운 구석이 있어! 부끄럼도 타고 예의도 있고, 그러고 보니 정미소 씨가 남자답기는 해.”

“언니가 학교에서 보니까 말이야, 서울 애들은 좀 쫌스러워서 만나기도 싫더라! 그냥, 딱 봐도 얼마나 가식적인지 몰라.”

“언니는 저번에 말한 남자하고 계속 만나기는 하는 거야?”

“언니를 쉽게 보는구나? 언니도 너만큼은 아니어도 인기 많아. 왜 이래?”

지혜는 이 년 동안 남자 친구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현재 지혜의 데이트 상대는 공석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유와 노닥거릴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언니! 사실 눈치채고 있었어. 이번엔 도대체 왜 헤어진 거야?”

“알고 있었구나? 언니가 그렇게 며칠을 우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바보라도 알겠다!”

“우리 지유 다 컸네! 이렇게 눈치가 빠르고 말이야.”

“바보니?”

지혜는 미도파 백화점의 숙녀복 코너를 돌아보다 생뚱맞은 말을 시작했다.

“지유야~ 너한테 이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는데~ 아빠한테 혼날 것 같아서 말이야”

“뭔데 그래? 아빠한테 말 안 할게.”

“절대로 내가 말한 거 아니라고 약속하면 알려줄게.”

“약속할게! 궁금하게 하지 말고 알려줘 봐! 미적거리지 말고~ 내 성격 알면서 그래!”

“지난달에 너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대.

지유는 지혜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친구 중에 니네 과 선배 이경희 알지? 걔가 알려준 건데, 그 남자가 우리 집을 알려 달랬다는 거야. 연락처라도 말이야.”

“이름이 뭐래?

지유는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글쎄,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분위기가 군인 같더라고 하던데? 두 사람 중 한 명 아닐까? 그나저나 나는 다음 주에 집에 내려갈 건데, 넌 어떻게 할 거야?”

지유가 아는 다른 군인은 두 사람 외엔 없었다.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었다.

“나도 내려가고는 싶은데, 아빠 눈치가 보여서.”

“그냥 같이 내려가자! 아빠께 잘 말씀드려줄게. 너 혼자 두면 사고칠 것 같아서 데리고 내려왔다고 말씀드리면 어떨까?”

“언니!

지유가 빽 하고 고함을 지르자 지혜가 어깨를 좁히며 주위를 살폈다. 아주 잠시 사람들의 눈초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고맙긴 하지만 내가 사고 친다는 게 무슨 뜻이야?”

하지만 지유의 집요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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