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체온이 식은 후부터 모든 게 식어가고 있었어.
나의 열정도 식었고,
나의 가슴도 식어 버렸어.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식어 버린 것만 같아.
하지만 아직 그게 뭔지 찾아내지 못했어.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돌아왔어.
해미는 창근이 뿌려진 절벽 앞에 선 채 긴 눈물을 흘렸다. 볼을 에이는 듯한 차가운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용암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해미의 가슴을 잔인하게 헤쳐놓고 사라졌다.
윈드서퍼였던 아빠는 해미가 대학에 입학 후 첫 태풍이 불던 날 사라졌다. 경찰에선 실종이라고 했지만 누구도 실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선 태풍이라도 불어야 서핑할 맛이 난다던 아빠는 태풍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극한 상황에 맞서 그토록 좋아하던 윈드서핑의 절정을 맞았으리라. 엄마는 아빠가 사라진 후, 엄밀히 말하면 아빠가 죽은 후 시름시름 앓다 병명도 없이 갑작스럽게 임종을 맞았다. 철인 경기에서 만나 결혼한 두 사람은 해미에게 익스트림의 본능을 심어주고 싶었다. 해미의 기억으로는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 아빠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해미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지극히 평범했고 여느 여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꿉놀이와 인형을 더 좋아했다. 부모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영 흥미가 없는 해미를 데리고 다니기를 포기했고, 해미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게 싫었던 엄마는 그렇게 좋아하던 활동을 접었다. 익스트리머를 평범한 가정주부로 바꾸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엄마의 몸에 군살이 붙기 시작했고 탄탄했던 근육은 쪼그라들었다. 해가 거듭할 수록 연한 구릿빛 피부의 엄마는 하얀 해미의 피부와 비슷해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빠는 해미에게서 익스트리머의 희망을 접고 말았다. 주말이면 아빠는 집에 없었다.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도 살아보니 나쁘지 않다며,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냐며, 가정으로 돌아오라고 아빠를 설득했아. 하지만 아빠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엄마도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해미는 주말에 아빠가 없다는 게 어색하지 않았기에 그저 순응하며 살았다.
일 년 사이에 아빠와 엄마가 사라진 후 해미는 심한 상실감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엔가 해미는 문득 그깟 익스트림이 무엇이기에 아빠의 인생을 접게 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아빠의 활동이 생명을 위협하는 외줄 타기 같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미는 엄마가 아빠를 말릴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모두 잃은 방황에 놓였던 해미는 대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휴학을 했고 만 일 년 동안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가 원했던 익스트리머의 본능보다 집순이 해미가 그녀에겐 더 잘 어울렸다.
다시 복학한 해미는 동아리 가두모집 기간에 고등학교 동창인 재용을 만났고 그의 손에 끌려 산악부라는 동아리 앞에 섰다. 고교생이던 때에도 딱히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친구인데 너무 반가운 척하는 게 왠지 부담스러웠다. 창고에서 보았던 아빠의 등산장비들과 비슷한 물건들이 가두모집 테이블 위에 널려 있었다. 뭔가 정비되지 않은 듯 불편한 비주얼의 남자들이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홍보물을 배포하고 있었다. 긴 머리가 찰랑거리긴 했지만 남자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여자 한 명과 그래도 여성스러워 보이는 다른 두 여자가 남학생들을 잡아 끄는 모습도 보였다. 오래전 엄마에게도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었던 기억이 났다. 왠지 모를 어색한 여성적 풍모의 엄마는 해를 거듭하며 익숙한 여성미로 변해갔었다. 세 여자들의 모습에서 엄마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게 묘했다. 그중 해미의 눈에 날이 선 턱선에 온몸에 잔근육이 꿈틀거리는 까만 피부의 남자가 꽂혔다.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눈에 쌍꺼풀이 진했다. 피를 모두 뺀 것처럼 창백한 해미와는 정반대라 해도 될 정도의 외모였다. 일 년동안 바깥으로 나돌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지만 해미는 엄마를 닮아 피부가 하얬다. 아빠를 닮은 구석이라곤 기껏 악착같은 고집 정도였다.
"창근 형! 얘는 제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저번에 말했던..."
그 남자에게 다가간 재용이 해미를 가리켰다.
"아! 그 친구?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어?"
굵고 바른 목소리였다. 듬직한 음성인데 익숙했다. 아빠의 성대를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해미는 혼란스러웠다. 딱히 부성애를 느끼지 못했던 아빠의 목소리를 학교 선배에게서 듣다니...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한 해미는 뒤돌아 서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곤 곧장 집으로 향했다. 재용이 뒤따라 오며 불렀지만 해미는 손바닥을 내밀어 제지했다.
"저 친구 갑자기 왜 그래?"
해미의 귀에 창근의 목소리가 명확히 꽂혀 들었다.
"원래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어요. 학교에서도 친한 친구들 외에는 말도 잘 섞지 않았거든요."
"익스트리머 집안이라며?"
"제가 알고 있다는 건 모를 거예요. 해미 아버지가 그 유명한..."
해미는 귀를 막고 말았다. 간신히 눌러 놨던 부모의 죽음이 다시 그녀를 눌렀다.
부모가 남긴 커다란 단독주택은 해미 혼자 살기엔 너무 컸다. 고모가 같이 살자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해미는 거절했다. 상실 후에야 알 수 있었던 아빠의 존재가 너무 크게 다가왔고, 아빠를 좋아했고 아빠가 좋아하는 걸 좋아했던 엄마는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놨다. 엄마의 죽음 후 해미는 엄마에겐 아빠의 존재가 더 무거웠던 걸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해미 중 아빠를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깝게 지내던 순둥이 친구들이 수시로 집에 들락거렸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공허함만 남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보다 집에 홀로 남겨진 게 더 참기 어려웠다. 엄마가 죽고 난 후 몇 달이 지나서야 집에서 부모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매여 살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제일 먼저 천정에 매달아 두었던 사이클 자전거 두 대를 내려 창고 제일 구석진 곳에 치웠다.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던 것들이었다. 아빠의 레저용품 전시장 같았던 구석방에 있는 물건들은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 방에 들어갈 일도 없거니와 눈에 띄지 않으니 신경 쓸 일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무릎에 앉아서 설명을 들어야 했던 아빠와 엄마의 사진들이 담긴 앨범도 거실에서 아빠의 구석방으로 옮겼다. 집안 구석구석 온갖 레저용품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던 게 새삼스러웠다. 하물며 부엌에 있던 주방용품마저도 레저용품이 가득했다. 기억엔 없지만 해미는 태어날 때부터 레저용품 속에 파묻혀 살아왔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원치도 않은 각종 아웃도어 브랜드를 누구보다 섭렵하고 있었다.
해미는 거실 소파에 몸을 묻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혼자 힘으로는 철거할 수 없어서 그냥 방치해 두었던 자전거 거치대가 구식 샹들리에 옆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익스트리머 집안이라니... 그깟 죽음 앞에 목숨을 거는 미친 짓거리가 무슨 대수라고..."
아빠의 실종 후 해미는 익스트림 관련해선 경멸하다시피 했었다. 그런 아빠를 잊지 못해 생명줄을 놓아버린 엄마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을 다시 꺼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