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받는 아빠였나요?

본격 산악소설

by 루파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코트 어깨 뒤로 정돈한 뒤 강의실을 빠져나오던 해미는 문 앞에서 재용을 마주쳤다. 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재용의 등장은 귀찮은 일이었다. 재용은 손에 쥐고 있던 싸구려 캔커피를 내밀었다.

"오늘은 또 왜?"

"형이 너 좀 봤으면 하던데 시간 어때?"

재용의 질문엔 해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왜? 그 형 괜찮아. 한번 만나 봐!"

"그 선배가 뭐가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내게 어떤 의도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집이 익스트리머 집안인지 모르겠지만 난 그런 데 전혀 관심 없어. 산악부 같은 데는 더욱 싫고 말이야. 꾀죄죄하고 칙칙해."

"사실 나도 산악부원이야. 사실 1학년 때 너를 데려가고 싶었는데 휴학했더라고. 네 소식을 듣고 보니 휴학하지 않는 게 이상했을 것 같았어."

"갑자기? 우리는 고등학생 때에도 가깝지 않았는데... 우리가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기나 했었어?"

해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솔직히 기분은 좋다. 네가 날 알고 있었다는 게 말이야."

재용의 얼굴이 훨씬 환해졌다.

"워낙 설치고 다녔으니까 전교생이 널 모를 수가 없었겠지. 그나저나 네 성적으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니 그건 좀 놀랍긴 하다."

"특기생으로 들어왔어. 스노보드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거든."

재용의 부끄러우면서도 반쯤은 우쭐대는 표정이 해미의 눈에 들었다.

"아아~ 언젠가 들었던 것 같네. 그게 너였구나. 그럼 체육 전공이겠네?"

해미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부러 보여준 제스처였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익스트리머들 얘기에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해미는 초등학생 때까지 스키를 탔었고 나름 잘 타는 편이었지만 그것조차 관심에서 덜어낸 지 오래였다.

"난 집에 갈래. 용무가 그것뿐이라면 굳이 나를 찾는 일이 없었으면 해."

해미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재용 옆으로 비켜 나갔다.

"난 어릴 때부터 네 아버지를 존경해 왔었어. 내 롤 모델이셨고, 나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셨어. 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 힘들었어."

해미의 등 뒤에서 속사포처럼 터진 재용의 혼잣말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흠칫 놀란 해미가 재용을 뒤돌아 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재용의 표정엔 진심 그 자체였다. 해미는 아빠가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주말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아빠가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했던 고등학교 동창의 존경의 대상이었다는 게 의아했다.

"너 혹시 다른 아저씨 하고 착각하는 거 아냐? 우리 아빠는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어."

"절대 그렇지 않아. 네 어머니도 그렇고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이셨어. 넌 잘 모르고 있는 거야."

재용은 그렇지 않아도 달아오른 얼굴에 열기가 더해진 모습이었다.

"아빤 가족보다 레저가 우선인 사람이었을 뿐이야. 내게 남은 아빠의 추억은 거의 없어. 주말에 그렇게 가족들 버리고 나가서 돌아다니셔야 했다면 주중에라도 우리와 함께 하셨어야 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았던 분이야. 그런 아빠가 대체 누구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해미는 사춘기 무렵부터 시작된 아빠앓이가 결국 미움 아닌 미움으로 커진 거라는 걸 스스로 모르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대화가 줄었고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어쩌면 해미 스스로 마음을 닫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해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외면하는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항상 해미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해미는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엄마는 해미보다 아빠에게 가버렸다는 생각이 더욱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말이야..."

"별로 듣고 싶지 않아."

해미는 재용의 설명을 자르고 집을 향했다. 그리움인지 야속함인지 미움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만 남아 소용돌이치고 있었는데 일 년 동안 가까스로 그런 감정들을 누르고 살았건만 다시 불을 지르고 말았다. 상실감보다 버려졌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외로움을 이겨내기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다. 가끔은 자살 생각도 했었지만 가까운 친구들 덕분에 그런 충동을 누를 수 있었다.

그날 밤 해미는 남자친구를 만나야 한다는 친구들을 겁박하다시피 해서 집으로 초대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는 해미의 모습에 걱정이 된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상실감에 눌려 자살소동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 것이다. 이미 해미의 친구들은 두 번의 자살소동을 겪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재용이라는 친구 알아? 같은 학교... 박재용."

혀가 반쯤 풀어진 해미가 물었다.

"야! 걔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학교에서 나름 스타였어. 그나저나 네가 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용하다."

"그러고 보니 너네 학교 들어간 것 같던데. 혹시 만난 거야?"

"훤칠한 키에 근육도 멋지고... 그 자식 그 정도면 얼굴도 잘 생겼긴 편이지. 게다가 집도 엄청 부자라더라."

"언제 벗겨보기나 한 것처럼 말한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외로 훈련을 그렇게나 다녔겠어."

"너도 재용이 맘에 있었구나? 나쁜 년. 난 재용이가 원한다면 한번 사귀어 볼 용의는 있지."

"용의 같은 소리. 재용이가 너한테 관심이나 주겠니?"

해미의 친구들은 재용을 두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다.

"아까... 재용이가 날 찾아왔어. 어제도 만났고."

해미의 말에 친구들이 놀란 토끼눈으로 해미의 표정을 살폈다.

"자랑하려고 우릴 불렀구나? 연애상담이 필요했던 거야? 응큼한 년."

"그런 거 아냐! 재용이 말로는 우리 아빠가 재용이 롤 모델이었고 존경했대. 그런데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대체 왜 서로 보는 눈높이가 다른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가족을 경시한 아빠 같은 사람이 밖에서는 존경을 받는다 하니까 심한 모멸감이 느껴졌어. 아빠가 더 미워지더라고."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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