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산악소설
해미의 입에서 시작된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각자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 부모자식 간이라 해도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순 없지만 다들 해미와는 달리 평범한 가정이었다. 한 친구는 아빠의 불륜 사건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삶에 희석되며 용서를 하게 됐다고 했다. 오히려 엄마가 먼저 용서했다는 말에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모두들 착잡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해미의 부모 얘기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그것이었다. 자식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아빠, 사랑스럽지 않은 아빠였겠지만 해미의 엄마가 본 남편은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자였던 거라고 입을 모았다. 자식을 위해 인생을 보내는 것도 삶이겠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는 것도 멋진 삶이라는 말도 나왔다. 할 것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이 세상이 점점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식을 낳지 않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해미는 그동안 아빠에게 쌓였던 미움 같은 미묘한 감정과 아빠는 오롯이 엄마의 사랑만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뚤어진 감정 때문에 아빠가 의도한 방향에서 벗어나 다른 삶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는 그녀에게 익스트림의 본능을 심어주겠다며 깨나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녀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부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해미는 아빠가 할 수 있는 한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아빠랑 같이 다녔다면 아빠는 행복했을까?"
"아마도..."
해미의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재용은 다시 해미의 강의실을 찾아왔다. 해미는 속으로 끈질긴 놈이라며 혀를 찼지만 그런 근성 덕분에 스노보드 금메달을 딸 수 있었겠지 싶었다.
"이번엔 왜?"
"이번에도 같아."
해미의 질문에 재용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네가 보기에 내가 산악부에 들어갈 것 같아?"
"물에서 하는 걸 빼면 모든 익스트림 스포츠는 산에서부터 시작이야. 너도 머지않아 빠져들게 될 거야."
재용은 뭔가 잘 안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거. 선물이야. 네가 모르는 네 아버지에 대한... 난 이 책에서 네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어."
재용이 내민 건 표지 디자인부터 어설퍼 보이는 오래된 책이었다. 적어도 30년은 족히 될것 같았다.
"정상 아래가 더 즐겁다? 이게 뭔데?"
"제목보다는 저자가 누군지 봐야지."
재용의 말에 해미는 다시 표지를 살폈다.
"오장민과 이현조..."
해미는 작은 목소리로 저자명을 읽었다.
"그래, 네 아버지이신 오장민 그리고 네 아버지의 절친 이현조 두 분이 쓴 책이야. 너무 소설 같은 글이지만 사실은 두 분의 실화에 대해 쓴 글이지. 난 그 책을 열 두 살에 읽었어. 산악인이셨던 우리 아빠의 책인데 아빠의 책장에서 꺼내 읽다가 반해 버렸지 뭐야. 사실 우리 아빠는 네 아버지와 같은 산악인이셨어. 지금은 동네 뒷산이나 다니는 아저씨가 됐지만 말이야. 내가 그 책을 읽던 걸 본 아빠가 두 분 얘기를 해 주셨는데 그날 이후로 내 동경의 대상이 되고 말았단 말이지."
재용의 표정엔 전에 없던 자긍심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윈드서퍼였어. 산악인하곤 거리가 멀어. 엄마하곤 철인 경기를 하다가 만나서 결혼했고."
"넌 전혀 모르고 있어. 네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산악인이셨어. 아마 지워버리고 싶으셨던 걸 거야. 그 책에 전부 쓰여 있어. 두 분의... 아니지! 네 분의 이야기가 그 안에 기록되어 있어.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해미는 머리에 뭔가를 맞은 기분이었다. 집에는 등산과 관련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빠의 무릎에 앉아 익스트림의 본능을 강제 이식당할 때에도 산과 대한 얘기는 없었다. 앨범에도 산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언젠가 우리도 등산 좀 가자고 졸랐던 기억이 있는데 산보다 바다가 좋다며 해미를 바닷가에 내려놓곤 했었다.
산에 가본 건 수학여행 때 설악산에 가본 게 전부였다.
"잘못 안 건 아니고? 같은 이름을 가진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말이야."
해미의 말에 재용은 건냈던 책을 받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사진들이 삽지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페이지를 펼쳐 해미에게 보여주었다.
"아빠..."
해미가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냈다. 거대한 설산을 배경으로 파란색의 촌스럽고 두꺼운 등산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걸레처럼 바람에 날렸다. 고글을 이마에 걸친 남자는 해미의 아빠 오장민이 확실했다.
"넌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이라는 걸 전혀 몰라. 그 책을 잘 읽어봐. 그럼 조금은 알게 될 지도 모르지. 직접적으로 알게 된 건 아니었지만 강한 분이면서도 여린 분이셨어. 우리 아빠도 그렇게 말했고."
"이 책 빌려가도 돼?"
해미는 전에 없던 아빠에 대한 호기심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몰랐던 아빠를 새로 알게 된 느낌이었다.
"내가 재밌는 거 하나 보여줄까?"
해미에게서 책을 돌려받은 재용은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두 사람의 사인이 그려져 있었다.
"자필 서명이야. 네 부모님 두 분의..."
"어떻게 네가 이런 걸..."
해미의 얼굴이 달아 올랐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만난 것만 같았다.
"우리 아빠가 네 부모님께 선물 받은 책이래. 그래서 빌려줄 순 있어. 내 책은 아니니까 말야."
해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더니 결국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