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없는 고백

본격 산악소설

by 루파고

조난은 남의 일이었다. 다른 팀을 구출해 준 경험이야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참담하고 암담했다. 내가 구해준 사람들도 그런 느낌이었을 거다. 그나마 운이 좋았는지 백 미터 이상은 굴렀지만 어디 하나 부러진 곳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훈련은 그저 훈련이었을 뿐, 아무리 고단해도 훈련은 즐거웠던 행위였다. 헌조, 해수, 하림의 생사를 모르니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사망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잊기 위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런 상상을 하는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지로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여러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의식을 잃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운이 좋아 다들 눈에 파묻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나를 구조하는 중일 수도 있다. 다양한 경우를 떠올렸지만 모두 무모한 생각일 뿐이었다. 난 일단 살 궁리부터 해야 했다. 랜턴조차 없었다면 지독한 어둠에 미쳐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지막 눈사태에 어떻게든 몸을 부풀려 구덩이를 넓게 만들었다. 그런 조처조차 하지 못했다면 난 이미 주검이 되어 설산에 묻혔을 거다. 이미 정상 공격 때 산소통이 거의 바닥난 상황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여지만 다들 얼마 버티지도 못할 거란 생각에 최악의 상황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민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로 구조를 바라는 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종착점 근처라면 뭘 해야 할까? 막상 그런 상황을 두고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정말 그런 상황을 맞고 보니 암담했다. 팀원들에 대해 걱정하던 것도 잠깐이었다. 그때 난 선배들의 등정기나 직접 들어왔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실을 겪고 있었다.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 돌아온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해미는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났다. 죽음 앞에 서 봤던 아빠가 왜 그토록 위험한 스포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끝내 태풍 속으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뒷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호기심을 눌러버렸다. 어차피 아빠는 그 상황에서 살아 나왔으니까 뭐가 됐던 상관없었다. 엄마에 관한 부분이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은 다시 책을 열긴 싫었다.




다음 날에도 재용이 해미의 강의실로 찾아왔다. 해미는 이미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 와줬으면 했다.

"오늘은 그다지 놀랍거나 불편한 기색이 없네? 왠지 고맙다는 느낌이 드는 건 뭘까?"

잔뜩 미소가 담긴 표정이었다.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했어. 금세 포기할 거였다면 아예 시작도 안 했을 거였잖아?"

해미는 강의실을 벗어나 앞서 걸었다. 학교 건물보다 오래됐을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자 아직 이른 봄의 찬기운이 스쳤다.

"책은 다 읽어봤어?"

"아니... 그냥... 몇 줄 읽다가 접었어. 이상하게 아빠가 더 미워지더라고. 난 딱 그만큼만 미워한 채로 아빠를 기억하려고 했었는데 더 미워지는 건 왠지 탐탁지 않았어."

"......"

재용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해미는 그가 원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난감했으리라 생각했다.

"아빠는 그렇다 치고, 네가 아빠를 존경했다는 것도 그렇다 치고, 넌 대체 왜 나를 산악부에 끌어들이려 하는 거야?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산을 좋아하지도 않고 밖으로 나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아빠나 너처럼 그럼 운동에 목숨을 갖다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야. 그리고 난 운동에 젬병이고 체력도 약해서 등산 같은 건 해본 적도 하고 싶었던 적도 없어."

해미와 비슷한 속도로 걷던 재용이 한 발 앞서더니 뒤돌아 섰다.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어. 난 그저 네가 나와 산에 다녔으면 했어."

"언제부터? 며칠 전부터? 이거 왜 이러십니까? 선배님!"

해미는 콧방귀를 뀌며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말했다.

"고백해도 돼?"

재용의 돌발적인 말에 깜짝 놀란 해미가 걸음을 멈추어 섰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가 날 언제부터 알았다고 고백이니 뭐니 장난질이야?"

살짝 화가 나긴 했지만 해미의 호기심엔 작은 불씨가 붙었다. 해미는 그런 고백에 이 정도 흔들리지 않을 여자는 없을 거라고 자위했다.

"사실 나 고1 때부터 널 짝사랑했었어."

"뭐? 웃기고 있네. 난 고딩 때 널 몇 번 보지도 못했었어. 네 말대로 짝사랑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저돌적인 네가 고백 한 번 안 했을 거란 것도 상상이 안 간다."

어처구니가 없단 생각이 든 해미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게 말이야. 우린 고1 때 같은 학교가 아니었거든."

"엥? 그런데 뭐? 말이 안 되잖아."

해미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재용이 게걸음으로 해미 앞을 걸었다.

"나 고3 때 전학 왔어. 모르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

"그런데?"

"역시 전혀 기억이 없구나. 우리 용평리조트에서 처음 만났어. 난 고글을 쓰고 있었고..."

해미는 고1 겨울방학 때 가족여행으로 용평리조트에 다녀온 기억을 떠올렸다. 이틀 내내 콘도 안에 처박혀있다시피 했었는데 우연히 아빠의 친구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키가 큰 남학생을 보긴 했었다. 의례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저 새침했던 기억이 났다. 해미는 어릴 때 스키를 배워서 탈 줄 알았지만 딱히 재미가 없었다. 슬로프에 나오긴 했어도 바인딩엔 물기도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그런 해미를 포기하고 슬로프를 누비고 다녔다. 해미는 스낵바에 앉아 눈을 쓸고 다니는 스키어와 보더를 지켜보다 지쳐 숙소로 돌아갔었다.

"다음 겨울에 넌 스키장에 오지 않았어."

재용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쳤다. 해미는 고1 겨울방학 때를 마지막으로 스키장에 가지 않았다. 부모도 더 이상 억지로 끌고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재용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넌 모르겠지만 난 원래 겨울 내내 스키장에 살다시피 했었어. 난 스노보더였고 모든 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지. 부모님은 날 케어하느라 겨울이면 주말마다 나를 찾아오셨거든. 네 부모님과도 가끔 만나기도 했고 말이야."

"그랬구나..."

해미는 영혼 없는 대꾸를 했다.

"난 항상 네 행방을 물었는데 널 데리고 오는 게 하늘의 별 따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년엔 보겠구나 싶었거든. 하지만 넌 그 후로 볼 수 없었어. 사실은 그래서 네 학교로 전학을 간 거야."

해미는 이제야 알겠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살짝 마음이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슴이 울렁거리거나 하는 감동 같은 건 없었다.

"솔직히 궁금한 게 있긴 해. 대체 스노보드를 타던 네가 산악부에 들어간 이유가 뭐야? 네 전공을 살리는 게 낫지 않아?"

해미의 질문에 전에 없던 묘한 미소를 짓던 재용이 말했다.

"우리 아빤 내 선배님이기도 해. 동아리에서는 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면 이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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