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는 아빠가 재용에게 영향을 줬다는 게 신기했다.
"네겐 그렇게 들려? 난 멋있기만 한데. 강렬하고 힘찬 느낌이지 않아? 난 산악이라는 단어가 너무 맘에 들어."
"그보다 말이야. 이제 스노보드는 안 타는 거야? 특기생으로 입학했으면 계속 선수생활을 해야 하지 않아?"
"정곡을 찌르는구나."
재용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멍청하게도 동계등반 갈 때 스노보드를 가져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지 뭐야. 헛된 망상이었다는 걸 첫 동계 예비훈련 때 알았어. 암벽 탈 땐 몰랐는데 빙벽을 타면서 스노보드에 대한 매력이 조금씩 지워져 가더라고."
"그럼 경기는 안 나가?"
"벌써 나를 치고 올라온 어린 친구들이 있기도 하고... 주말만 되면 빙벽 생각만 나서 슬로프엔 안 가게 됐어. 난 아버지가 왜 나를 산에 데리고 다니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가지만 말이야."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후문을 나서고 있었다. 해미는 재용의 얘기에 홀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왠지 재용에게서 들어야 할 얘기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해미를 눈치챘는지 재용은 가까운 카페로 해미를 끌었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아 다시 대화를 이었다.
"놀랍게도 나의 모든 재능은 엄마에게 받았지 뭐야."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아빠의 등반 능력이 내겐 없더라고."
"?"
"좋아하는 걸 잘하는 것과 잘하는 걸 좋아하는 것 중 넌 뭘 고르고 싶어?"
"웬 황당한 질문이야? 둘 중 꼭 골라야 한다면 난 좋아하는 걸 잘하는 쪽이지 싶어."
해미의 답변에 재용이 히죽 웃었다.
"난 후자였어. 산을 만나기 전엔 말이야. 그래서 스노보드를 택했던 것 같아. 물론 아버지는 나를 절대로 산에 데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던 세상일 수도 있지. 그저 책으로 본 산이 전부였으니까. 스노보드를 타러 외국 스키장에 다니면서 스키장 주변의 멋진 산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았는데 스키장을 벗어난 산을 경험한 적이 없었거든. 산이란 곳이 이렇게 매력적이라는 걸 알았다면 진작에 전향했을까 싶기도 해. 난 잘하는 걸 좋아하는 게 올바른 인생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너처럼 좋아하는 걸 잘해보고 싶어 졌어."
"그래? 하지만 그 위험한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네 질문에 답을 하긴 했지만 난 딱히 좋아하는 건 없어서 잘하는 것도 없어."
해미는 갑자기 재용이 부럽단 생각이 들었다. 왜 지금껏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어떻게 재용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해졌다. 어릴 땐 아빠에 찰떡처럼 붙어 지냈지만 중학생이 된 후론 아빠와는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저 엄한 이미지만 남아버린 아빠가 재용의 롤 모델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우리 아빠는 내게 익스트림 본능을 심어 주겠다며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가르쳐 줬는데 난 이상하게 집 밖에서 뭔가를 하는 게 너무 싫었어."
"네가 알려나 모르겠는데, 우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
"우린 둘 다 산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어. 그런 것 같지 않아? 넌 산에서 격리된 채로 살았고 난 산에 격리 된 채로 살았던 것 같아. 애석하게도 두 분 다 우리를 산악계에서 멀리 떼어 놓으셨어."
"듣고 보니 일리는 있네. 나 같은 경우엔 아빠가 나를 산에 데려갔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산에 다녔을 것 같진 않은데 넌 왜?"
"아빠는 어릴 때부터 산악부 분들과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어릴 때부터 삼촌처럼 따랐는데 이상하게 내가 산에 다니는 건 싫어하셨어. 지금 와서 보니까 내가 이렇게 산에 미쳤을 걸 예상하셨던 것 같기도 해."
"내가 산을 좋아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산이 꼭 나쁠 건 없지 않아? 히말라야 같은 데 가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게 문제였던 것 같긴 해. 산을 오를수록 더 높은 산을 동경하게 되더라고. 높은 산일수록 위험하고 높다고 무조건 어려운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높은 산일수록 등반 조건도 까다롭다고 봐야지."
"안 가면 되잖아. 그런 산..."
해미의 말에 재용이 헤헤 거리며 웃었다.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어. 내가 그렇게 될 게 뻔하다는 걸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를 꺾지는 못하셨어. 내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거든. 그리고 내가 아빠의 산악부 후배가 되는 걸 너무 싫어하셨어."
"그건 왜? 부자지간에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 좋은 거 아냐? 어차피 네 아버지가 같이 산에 다니실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내 위로 49년이 넘는 선배들이 계셔. 지금 신입생 기준으로는 50년이지만. 어쨌든 팔팔하신 분들은 산행에도 참여하시곤 해. 참 대단하신 분들이야."
"그렇구나. 아버지와 같이 산에 다닌 적은 있어?"
"있긴 하지. 네가 들으면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같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하는데 집에서와는 달리 전혀 거리낌이 없어. 그런 것들 때문은 아니시겠지만 내가 산악부에 들어온 걸 인정하는 대신 조건이 있었어."
"그런 것도 조건이 필요한 거야?"
"아무래도 내가 설산에 가는 걸 마땅치 않게 생각하신 거지. 아버지는 내게 악우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하셨어"
"악우? 그게 뭔데?"
언제나 얼죽아를 외치던 해미는 얼음만 남은 플라스틱 잔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