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공포는 나 스스로를 두렵게 한다.
오밤중 혼자 등산할 때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는 것처럼.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했다.
어떤 하나의 목표를 두고 평생을 살았던 사람에게 이정표 같았던 빛이 사라진다면 어떨지 궁금했다.
절망, 좌절...
그런 단어로 표현이 될까?
죽을 각오면 뭘 못할까 하는 말을 했고, 뭐든 죽을 각오로 해왔다.
그렇지만 빛이 사라진 각오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희망 같은 게 있기나 했었던가?
내가 내가 아닌 느낌...
나란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내 인생에 산 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내 맘 속에 들어온 후론 산을 밀어내고 말았다.
네가 나의 산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너와 산이 나의 삶의 전부였다.
네가 사라진 후 내겐 산의 존재도 희미해졌다.
방금 전까지 나는 내가 계획했던 걸 모두 이뤘다.
조금씩 엇나간 적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계획대로였다.
정상을 밟기까지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
하지만 정상에선 내가 원했던 쾌감 같은 게 없었다.
너와 함께 정상을 밟았다는 게 그 무엇보다 행복했다.
하지만 정상을 밟았다는 쾌감 후에 찾아온 허탈함이 나를 지배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생각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 감정 때문이었을까?
해미는 덮었던 아빠의 책을 다시 열었다.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아빠의 당시 감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보다 싫었다.
공유된다는 게 그냥 싫었다.
한참 헤매던 해미는 아빠를 싫어한 적이 없었다는 걸 떠올리고 말았다.
아빠는 항상 자상했고 세밀했다.
해미의 표정을 읽었고 해미가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해미의 입장을 정리했다.
어쩌면 자신은 완벽한 아빠가 더 어려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빈틈이 없었다.
항상 한 발 앞서 생각했고 모든 상황이 그에 맞아떨어졌었다.
부녀 간의 감정에서도 그랬다.
너무나도 논리적인 아빠의 의견에 단 한 번도 토를 달아본 적이 없었다.
반론을 펼치고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빠의 생각에 닿았다.
"아빤... 이래서 싫어."
해미는 태풍이 불던 날 드라이슈트를 챙겨 집을 나서던 아빠의 뒷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거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에도, 그전에도 그랬던 아빠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