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아래 바닥에 디딘 작고 하얀 발이 매끄럽다. 엄지발가락에 바른 연한 핑크빛 매니큐어가 귀여운 느낌을 더했다. 오른발 네 번째 발가락에는 무늬 없는 백금 반지 하나가 은근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발 위로 긴 유선형을 그리는 종아리는 발에서 느껴지는 연약함과는 다른 건강미를 뿜어냈다. 오른쪽 무릎 위엔 어디서 얻은 자국인지 모를 아얏자국이 거칠게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흉터는 아닌 듯했다. 하얀 종아리 위로 드러난 허벅지 중간쯤엔 일자로 새겨진 검은 경계선이 그려져 있었다. 경계 위로는 뽀얀 피부가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한 사람의 다리라는 걸 증명하는 건 허벅지가 끝나는 부근에 간신히 걸쳐있는 검은색 쇼트 팬츠뿐이었다. 실리콘으로 이니셜인 듯한 알파벳 몇 자가 박힌 스판 재질의 쇼트 팬츠는 여자의 골반 부위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여자는 머리 위로 깍지 낀 손을 뻗으며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자세는 한참 동안 흐트러지지 않았다. 작은 발만큼이나 작고 가느다란 손은 말 그대로 섬섬옥수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손 끝에서부터 흐르는 야리야리한 느낌은 손목에 자그맣게 드러난 뼈에서 수위를 더했고 흘러내린 잠옷 때문에 드러난 팔꿈치에는 먼지 한 점 붙을 수 없을 것처럼 보드라운 피부가 광채를 냈다. 투명한 듯 우윳빛을 내는 피부 사이로 파란 실핏줄이 아주 조금 도드라졌다. 단추 두 개가 풀어진 봉긋한 가슴께 끝으로 브라를 착용하지 않아 귀여운 녀석이 도드라져 있었고 목까지 간신히 닿는 짙은 갈색 단발머리가 가볍게 찰랑거렸다. 창 밖에서 슬그머니 침투한 새벽녘의 붉으스름한 빛은 실크 원단의 잠옷 사이로 한 줌이나 될까 말까 하는 허리 라인을 드러나게 했다. 거의 일 분 정도 되었을까? 여자는 치켜올렸던 팔을 내려 잘록한 허리춤에 손을 받치고 좌우로 목을 풀었다. 가느다란 목에는 귀여운 자태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파란 핏줄이 돋아나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여자는 두 손으로 종아리를 두드려 근육을 풀며 끄응하는 낮은 신음과 함께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얀 팔은 종아리의 피부색은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마사지나 받을 걸 괜히 참았네."
높은 톤의 청아한 목소리엔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밤새 뒤척이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해 몸이 찌뿌둥했던 것이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긴 소파 하나 덩그러니 놓인 넓은 거실엔 커다란 창 밖에서 쏟아진 빛으로 한가득이었다. 여자는 냉장고에서 유기농 우유를 꺼내 들고 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남대교 방향 한강 위로 붉은빛이 찰랑거렸다. 동이 튼 게 방금 전이었는데 순식간에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TV 틀어줘!"
여자의 목소리에 100인치는 되는 올레드 TV에 전원이 들어왔다. 뉴스 스튜디오 안에 두 남녀 아나운서의 모습과 함께 벽 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별하 씨의 노래 '첫사랑'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게 벌써 3주나 되었지만 인기가 떨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세아 아나운서가 이별하씨하고 꽤 가깝게 지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소감이 남다르시겠습니다."
김철중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여자의 눈이 화면으로 쏠렸다.
"그러게요.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를 새로 쓴 이별하, 지금 보고 있니? 정말 축하해! 생방송에서 이래도 되나요?"
한세아의 말에 여자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 모양을 그렸다. 화면 속 한세아 아나운서가 보는 것도 아닌데 마치 화상통화를 하는 듯했다.
"너랑, 나랑 꽃반지 나누었지. 너랑, 나랑 머리 꽃 달아 주었지. 너랑, 나랑 뒷동산 오르던 날. 너랑, 나랑 손을 잡고 올랐지. 너랑, 나랑 호호 하하 웃었지. 너랑, 나랑 여보 당신 소꿉놀이. 너랑, 나랑 속삭임 몰랐을 뿐. 너랑, 나랑 사랑한다는 말도 몰라. 너랑, 나랑 그냥 미소 나눔이. 너랑, 나랑 사랑 고백이었지. 너랑, 나랑 이야기 두근두근 설렘. 너랑, 나랑 뽀뽀도 못 한 첫사랑. 너랑, 나랑 바보 사랑이었나 봐. 너랑, 나랑 이제야 아쉬움 꼭 품어."
여자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청아한 목소리가 화장실 속에서 메아리치듯 울렸다. 여자의 손길에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쇼트 팬츠가 투톤의 늘씬한 다리를 스쳐 바닥에 스러졌고 봉긋한 가슴을 가렸던 웃옷 역시 바닥에 버려지듯 떨구어졌다. 거실에 틀어 둔 TV에서는 다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어제저녁 아홉 시경 한남대교 인근에서 묻지 마 폭행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던 삼십 대 남자는 지나가던 시민의 신고 덕에 중상에 그쳤지만 피해자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며 자신을 폭행한 남자를 꼭 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요즘 벌어지는 이런 사건이..."
샤워부스 문을 닫고 샤워기 레버를 들어 올리자 TV 소리는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갈색 단발머리가 물에 젖었고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은 여자의 온몸을 핥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