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13화-다시 처음
<가을앓이 기도>
외롭게 하소서,
그렇게 하시더라도
외롭지 않을 것은
낙엽 향기에 취하고
갈대밭에 부는 바람의 휘파람 소리,
귓불이 잘 익은 홍시처럼
발그레 지면
그리움은 그냥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고 싶은 것을,
그렇게
미어터지다 죽을 것 같이 다가오는 가을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게 하소서,
그렇게 하시더라도
마음만 아프게 하소서
두발로 산야를 거닐면
높지 않을 능선에서,
서부 사하라 사막에서 목마름에 바라본 그 맑은 밤하늘이 아름다움을 넘어 질투심 깊은 슬픈 아픔이
마음의 별 노래가 된 적도 있지만,
외국의 사치를 부리지 않아도 될 것은
밤바다 갈치, 오징어 잡이 어선의
불빛에서 만족하고 또 만족하겠습니다.
경로당 옥분이 할머니 38광 팔고,
기분 좋아 두 번 죽는
점당 10원 고스톱만큼 좋은 가을,
외롭고,
아프게 즐기는
식겁할 만큼 좋은 것을,
자기 싫은 듯 겨울 따라쟁이 될까 봐
조바심,
단풍나무는 잎사귀 떨어내고
봄을 잉태하는 기약을 하는데
가을이 멀어갈 때 서러움이 아닌 것은
영원한 무한감사의 기도가 혀 짧은
옹아리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가을이다 라고
목청을 돋우고
가을앓이를 하는가 봅니다.
딱히
기도제목은 정하지 못했는데
괜스레 이유 없이 옷깃을 여미어 봅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중 읽은 시다. 준흠의 노트에 있던 거다. 이별하는 유명 가수의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자신의 의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다른 차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다. 절벽 끝에 간당간당하던 가을은 작별인사도 없이 사그라졌고 매서운 서울 빌딩 숲을 가르는 도시풍이 불쑥 찾아온 겨울을 실감하게 했다. 그것도 잠시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봄이었건만 어느 살벌한 대지 구석에 숨죽여 피어오른 연두색의 여린 새싹이 새 세상을 알리고 있었다. 그즈음 한세아는 백인찬과 교제하는 사실을 공개했고 누구도 눈치챌 수 없었던 이별하 속의 두 존재의 밀당은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들의 교제 소식을 들었던 날, 이별하는 자신이 기억하는 아릿한 그 가을날의 묘한 감정을 꺼내어 새로운 노래 가사를 만들어 냈다. 그녀는 지난 감정을 추슬러 보았다. 괜한 에너지 낭비였음이 분명했지만 왠지 노래 안에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열 번째 앨범, '밀당'은 그 안에 삽입될 곡 중 하나가 됐다.
<밀당>
당신이랑 나랑 밀당해도
들판과 가을의 하늘은 달리고 있다
햇살은 따사로워 대추 속 씨도 여물고
하늘은 코발트빛 투명하여 맘까지 시려오고
바람은 방 깊숙한 곳에 들어와 앉았는데
당신은 밀당하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네
애타는 마음들 말라 낙엽이 되며
그리운 맘 녹아 핏빛 되어 물들고
계곡의 물마저도 지쳐 말라 버렸다
종일토록 전화기만 바라보다가
전화기 꺼놓고 기다리는 건 뭔지
알다가도 모를
우리들 밀당에 가을이 타 들어가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야 오겠지만
어제 같은 가을도 다시없고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도 없다
가을 그만 애태우고 만나서 이야기하자
애초에 밀당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그녀 스스로가 만든 밀당이었던 거다. 이별하는 자아가 생성되기도 전이었을 시절 트라우마를 앓던 한세아가 진짜 사랑을 얻어 멋진 삶을 살아가게 된 걸 축복했다. 대신 그녀는 지독한 고독을 맛보아야만 했다. 어쩌면 자신이 레즈비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몸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마음은 온통 한세아의 것이었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 왜 그랬던 걸까? 한세아의 손길은 섬세하고 보드랍고 따스했다. 굳이 연인으로서의 남자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건 한세아의 존재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인지하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과 한세아의 관계를 이제는 완전히 청산할 때가 된 것이다. 이별하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가슴속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해도 뜨지 않은 낌깜한 밤,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혼란스러운 생각 여행에 잠겼던 이별하는 슬그머니 이불을 밀어내고 걸터앉았다. 아직 눈을 뜨진 않았지만 표정 속엔 뭔가 확신을 가진 듯한 느낌이 엿보였다. 잠시 후 어둠을 밝힐 듯한 눈빛을 낸 그녀는 어디론가 튀어나갈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한 칸 가득 걸려있는 라이딩용 의류는 왼쪽의 밝은 색상에서 어두운 색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팔짱을 끼고 노려보듯 의류들을 훑던 이별하는 팬티를 벗고 알몸 상태로 검은색 춘추계용 롱 빕과 긴팔 져지를 꺼내 입었다. 새로 구입한 검은색 에어로 헬멧에 검은색의 꽉 끼는 동계용 장갑까지 끼고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도둑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스마트폰 메시지 창을 열어 매니저 박진수에게 예약 문자를 전송했다.
<삼일 동안 찾지 말아 주세요. 혼자 여행을 갈 건데 나중에 연락하면 데리러 와 줘요. 사장님한테는 따로 연락하지 않을 게요.>
"이제 떠나 볼까?"
이별하의 하얀 얼굴엔 묘한 미소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