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14화-그녀의 국토종주

본격 자전거 로맨스 소설

by 루파고

스마트폰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화면이 나타났다. 이별하는 스마트폰이 꺼지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족쇄에서 풀려난 것만 같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묘한 일이었다. 딱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없었는데 이런 해방감이라니...

이별하는 현관 옆에 붙은 작은 방 문을 열었고 조명을 켰다. 자전거 다섯 대가 거치대에 걸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건 기껏 일 년도 안 됐지만 이상하게 자전거 욕심이 생겨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한 것들이다. 하지만 로드바이크 외에는 아직 바깥나들이를 해본 적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중 가장 최근에 구입한 하얀색 그래블 바이크는 언젠가는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바로 오늘을 위해 구입한 새로운 애마였다. 그녀는 어느 날 즐겨 보던 자전거 유튜버의 영상에서 신혼여행으로 국토종주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접한 후 국토종주를 꿈을 꾸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한세아와 함께 가는 걸로 잠정 결론을 내렸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꿈은 접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건 혼자라도 그 꿈을 이루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국토종주는 어느새 버킷리스트 아닌 버킷리스트였다.

언제 쓸지도 모르면서 미리 구입해 둔 투어용 자전거 배낭에 잡다한 용품들을 집어넣었다. 양말 세 켤레와 한 번 입고 버려도 될 속옷 세 벌, 숙소에서 입을 옷도 한 벌 챙겨 넣었다. 혹시 모를 상황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런 건 지우기로 작정했다. 이것 저것 다 챙기려다간 짐만 무거워져 라이딩 내내 후회할 게 뻔했다.

선반 위엔 예비용 타이어가 있었지만 교체방법을 배우지는 못한 상황이라 만지작거리다 도로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모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사용할 능력도 없는 상황에 굳이 가져갈 이유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전조등 배터리도 완충된 것을 확인했고, 후미등도 체크했다. GPS도 이상 없고 보조배터리와 충전기도 함께 챙겼다. 평소 쓰던 지갑에서 신용카드 두 장과 신분증을 꺼내 명함 수첩 정도 되는 작은 손지갑에 오만 원짜리 지폐 20장과 함께 챙겨 넣었다.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던 노트와 사장에게서 선물로 받은 몽블랑 만년필도 챙겼다. 가장 큰 물통을 찾아 생수를 가득 채운 후에야 마스크를 착용하고 하나씩 모으다 보니 열 개가 훌쩍 넘은 헬멧들 중 역시 검은색 HJC 헬멧을 골라 들었다. 평소 즐겨 입던 밝은 색을 탈피하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잘 쓰지도 않을 것이 뻔한 걸 알면서도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구입한 똑딱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아마도 카메라는 이 여행을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편이라 바람막이는 몸에 걸쳤다. 꽤 추위를 타는 이별하는 자전거를 타러 나갈 때만큼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전신 거울을 보며 누군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몸을 둘러보았다. 역시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는 몸매인 건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모습만 보고 가수 이별하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이즈가 큰 변색 고글을 써 헬멧과 마스크 사이에 살짝 드러난 살마저 가려 버렸다. 이제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자신이 들었다.

로드바이크에 비해 조금 무게를 더한 중량감이 부담스러웠지만 좀 더 묵직하고 단단해 보이는 타이어가 왠지 든든해 보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꽉 끼는 장갑 위로 들린 그래블 바이크의 무게는 그리 버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현관에 내려둔 그래블 바이크 페달엔 클릿을 달아두지 않았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때 최대한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였다. 클릿 페달을 쓰면 라이딩에 효율이 높지만 신발 하나를 따로 챙겨 무게를 늘리고 싶진 않았던 거다. 에너지바 몇 개와 포도당 캔디 한 움큼을 집어 배낭의 작은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어쩌면 힘이 다 빠져 의지가 약해질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널찍한 엘리베이터홀에 평소 느끼지 못했던 적막함 같은 게 느껴졌다. 박진수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택한 모험이었지만 괜한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다. 매니저를 떨궈낸다 할 지라도 언제나 한세아는 함께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외로움이 밀려왔다. 한세아가 어디로 영영 떠나버리는 것도 아닌데 이런 집착을 가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 짙어질수록 자신은 레즈비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걸 인정할 수 없었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추스르겠다는 목표로 이번 여행이 시작된 것이니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먹고 짐을 꾸릴 때까지도 와 닿지 않았지만 현관을 나서자 이제 진짜 여행이 시작된 걸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부저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으로 시작될 여행을 환영한다는 인사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층에 도착하자 평소 익숙했던 경비원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물어보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잠시 후에야 이별하를 알아보는 듯했다. 그의 표정과 시선엔 여러 가지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별하는 그게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고 별로 부담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무대와 방송에서 겪었던 세상의 수많은 음탕한 시선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솔직하고 선량한 시선에 불과했다.

언제나처럼 경비원은 아파트 로비 문을 열어 주었고 이별하는 고갯짓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싸늘한 아침 공기가 마스크 구멍을 타고 폐 안쪽까지 밀고 들어왔다. 어둠은 아직 가로등 불빛과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몇십 분은 더 지나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한강에 나가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며 라이딩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새로 돋은 지 얼마 안 된 연두색 이파리 사이로 투영된 가로등 조명이 새로움을 알려주려는 듯 새벽 봄바람에 나풀거렸다. 이별하는 자전거에 올라타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가로등 조명 하나를 벗어나자 멀리 휘영청 밝은 반달이 번쩍 떠오른 것처럼 그녀를 반겼다. 왠지 함께 달릴 수 있는 동료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순간 이별하의 머리를 스치는 시구가 있었다. 시 구절이 술술 이어졌고 그녀는 라이딩을 잠시 멈추고 노트를 꺼내 들었다.



<밤이 무서운 건>

어둠이 무서운 건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지가 무섭고
편견이 더 살 떨리는 건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알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아서다

빛이 없으니
귓구멍만 잔뜩 부풀어 오르고
어둠이 깊어가니
패거리 부화뇌동만 늘어간다

풀벌레가 밤에 우는 건
혼자 있기 무서워 벗 부르는 것
해가 담날 위해 잠자러 가자
반달이 겁내지 말라고 손을 흔든다

어둠 내리는 숲은
밝음이 믿음이란 걸 알려주는 스승이다




수정 같은 건 필요 없을 듯했다. 이별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페달을 밟았다. 가끔씩 도로 옆으로 휙휙 지나쳐 가는 차량들 소리만이 이 도시에 사람이 살고 있는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적한 아파트를 벗어나 한강으로 향하는 좁은 터널 근처에 가자 새벽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더러 보이기 시작했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러너, 새벽잠이 없어 산책을 나온 노인 부부, 새벽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도 주인을 끌며 팔딱팔딱 뛰는 리트리버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한강 자전거도로에 접한 이별하는 멀리 자전거 후미등 몇 개를 확인하고 슬슬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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