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16화-담쟁이 풀

by 루파고

자전거 옆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노란 자전거 옆을 스쳐 지나가며 주변을 살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용변을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별하는 남자들은 참 편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이별하의 자전거는 양평권을 지나 여주를 향했다. 남한강을 따라가는 자전거길은 상의 평화를 모아놓은 듯 온했다. 산책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건 근처에 마을이나 인가가 없다는 걸 의미했다. 배가 심각하게 고파오기 시작했다. 미처 간식거리는 챙기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기껏 에너지바 몇 개가 전부인데 초반부터 그걸 먹어치울 수는 없다. 식당이 나올 때까지는 열심히 달려야 한다. 하지만 이른 시간에 영업을 하는 식당을 찾는 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그 흔한 편의점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위가 쪼그라들다 못해 조금씩 쥐어찌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갑자기 실천에 옮긴 여행이라 전날 먹은 게 별로 없어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을 만한 열량원도 부족했다. 급조된 여행이지만 이별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벌써부터 자신과의 싸움에서 고민하는 게 싫었다. 고민 끝에 쉬었다 가는 걸로 결정을 하고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이젠 인적도 없어 딱히 숨어서 쉴 이유는 없었다. 마침 경치 좋은 곳에 적당하게 위치한 벤치가 보였고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어느새 물안개는 많이 걷힌 상태였고 햇살도 따사롭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느긋하게 쉬었다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누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도 빨리 가야 될 이유도 없는데 뭐.'

이건 스스로를 놓아주기 위해 뱉은 말이었다. 왜 조급한 마음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쯤이면 박진수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국토종주를 빨리 끝내야만 하는 이유도 없었다. 자전거를 벤치에 기대어 놓은 이별하는 헬멧도 벗고 마스크를 목까지 내린 후 벤치에 길게 누웠다. 여린 새싹들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이른 봄볕에 눈이 간지러웠다. 고개를 돌려 강둑을 보니 담쟁이 풀이 가파른 벽을 올라타고 있었다. 아직 벽 끝까지 닿진 않았지만 머지않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국토종주길 위에서 벌써부터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시작은 했지만 가본 적도 없는 길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간다는 게 두렵기도 했다. 이런 생각이 들 줄 알았다면 미리 계획을 잡고 한두 명 같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자기도 몰랐던 한세아에 대한 묘한 감정을 짓눌러버리기 위한 목적이었으니 미리 계획을 잡고 왔을 리는 없다. 이별하는 담쟁이 풀을 보며 의지를 다잡기로 맘먹었다. 담쟁이 풀은 벽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 하면서 의지를 놓지 않고 꾸역꾸역 벽을 타고 오르는 중이다. 어차피 시작한 국토종주. 해운대까지 가기로 작정했으니 가는 길에 어떤 시련과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희열이 느껴질 것 같았다. 이별하는 벌떡 일어나 앉아 배낭에서 수첩을 꺼냈다.


<담쟁이 풀>

올라야만 한다
저 높은 곳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이기에...

물 한 방울 없고
발 디딜 흙 한 점 없는,

목이 타고
발 디딜 곳 없어 바둥거린다 할지라도

내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내 앞길을 막는 것이
절벽이든 벼랑이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 높은 곳 너머의 넓고 큰 세상,

그러니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앞에 놓일 지라도,

난 악착같이
기어코 기어올라야만 한다


시를 다 써놓고 나니 기분이 훨훨 나는 듯했다. 스스로 의지를 다짐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때였다. 서울 쪽에서부터 자전거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이별하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것도 잊을 채 소리가 나는 방향을 확인했다. 아까 봤던 노란색 자전거였다. 자전거가 세워진 곳에서 한참을 쉬다 달려온 듯했다. 십여 미터 정도 거리에서 노란색 자전거의 라이더는 휘청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별하의 얼굴을 모두 보았을 것이다. 이별하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그는 그녀를 지나쳐 한참을 달려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차피 국토종주가 아닌 이상에야 더 이상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노란색 자전거의 라이더는 배낭도 없었던 걸 보면 국토종주 같은 걸 목표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이별하는 앉은자리에서 물통을 거의 비우고 말았다. 이제는 물도 거의 바닥났고 식당이나 편의점을 찾아내지 못하면 탈진해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시 복장을 추리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서울은 조금씩 조금씩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앞으로 남은 길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다. 일종의 두려움 속에서 묘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수로서 이뤄낸 성취 이후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얏! 기다려!"

이별하는 안개가 거의 사라져 가는 남한강에 대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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