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17화-도래

by 루파고

앞서 갔던 노란 자전거는 고개 정상에서 다시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가 정상에 거의 도착했을 즘 되자 그는 노란 자전거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정상에 도착해서 언덕 아래를 살폈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업힐 정상에서 쉬었다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달려왔는데 쉬지 않고 달려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 남자와 같은 자리에서 어색하게 있고 싶진 않아서다. 행여 말이라도 걸어오면 불편한 상황이 이어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지만 그럴 리가 있겠나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 됐다. 그런데 이별하는 왠지 동행이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란 자전거의 라이더 덕분에 조금은 두려웠던 마음에 안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람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길게는 오늘 하루 정도는 이렇게 앞 서거니 뒤 서거니 하며 몇 번은 더 마주칠 것 같았다. 사실 그 사람 덕분에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잘 정비된 한강변 도로만 달리다 외곽으로 나와보니 이정표도 엉망이고 바닥에 그려진 자전거길 표식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들었던 것처럼 한국의 자전거길이 세계적 수준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싶기도 했다.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는데 먹은 건 없고 목도 말라 거의 초주검 직전에 이르렀다. 체력은 거의 방전되다시피 했다. 이러다 국토종주는 고사하고 사람도 없는 곳에서 비명횡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쌓이고 있었다. 강변에서 벗어났던 자전거길은 다시 남한강과 만났다. 멀리 여주 이포보가 보였다. 촬영 때문에 몇 번 갔던 곳이라 익숙한 지형인 데다 아는 곳이 나오자 고향을 만난 것만 같은 반가움에 허기도 잊을 수 있었다. 멀리 있던 이포보는 조금씩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조금만 더 가면 뭐라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페달을 굴리던 다리에 힘이 솟았다.



*



평생을 두고 이렇게 맛난 음식은 처음이었노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는 포만감을 즐기지 않았던 이별하는 배가 빵빵하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음식물을 쑤셔 넣었다. 그제야 식당 아주머니가 자신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싶자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맞죠?"

다행히 손님이라곤 이별하 외엔 없었기 때문에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아주머니는 A4용지 몇 장을 그녀에게 건네며 사인을 부탁했다. 뭐라고 쓸지 잠시 고민한 이별하는 매직펜을 들어 예쁜 사인을 그리고 아래 한 줄의 글을 남겼다.

<우연히 찾은 여주댁, 제 인생 최고의 맛을 경험했어요!>

"어디 가는 길이세요? 자전거 잘 타시나 봐요."

"그냥 심심해서 나왔어요. 어딜 가고자 하는 건 아니고요."

이별하는 국토종주를 나선 걸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방금 전에도 자전거 타고 한 분 오셨었는데 일행은 아니시죠?"

"아뇨! 혼자 타는 중이에요. 혼자가 더 좋거든요."

"그렇군요. 사인 고마워요. 우리 집 가보 생겼네요."

이별하가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자 아주머니는 세계 최고의 가수에게 사인을 받았다며 그녀의 돈을 거절했다. 게다가 테이블 위에 있던 검은색 봉투 하나를 내밀며 선물이니 꼭 받으라는 부탁까지 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짐이 늘면 라이딩에 불편할 것 같아 받지 않으려 했지만 버리더라도 가져가라며 한사코 밀어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봉투까지 들고 나서야 했다. 식당을 나선 이별하는 짧게 묶인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모두 에너지 바였다. 무려 스무 개나 들어있었다. 그녀는 뒤돌아 식당 문을 확인했지만 아주머니는 벌써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전거 동호인들이 주로 다니는 길이라 판매하는 상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던 현재 그녀의 상황으로선 그보다 좋은 선물은 없을 것이었다. 언젠가는 가수 이별하가 다녀간 식당이라고 소문이 나게 되면 보답은 충분히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에너지 바를 배낭에 쑤셔 넣었지만 양이 많아 몇 개는 져지 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어차피 하루에 몇 개는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별하는 인적 드문 이포보에서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아직 봄을 느끼기엔 조금 이른 편인데 관광객들이 조금씩 보였다. 서울을 벗어난 이래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포보를 지나자 여주는 빠른 속도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강변에 조성된 캠핑장엔 한적한 캠핑을 즐기는 가족들이 몇 보였다. 관광객이 제법 보이는 여주보를 건널 땐 그녀에게 시선을 강탈당한 남자들을 몇 명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늘씬하게 빠진 라이더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어지간한 남자들의 눈길 정도는 빼앗을 수 있었다. 이별하는 가능한 빠른 속도로 여주보를 건넜다. 다시 십여 분을 달리자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강변 구석의 벤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제대로 쉬지도 않아서 위가 불편하던 참이었다. 따스한 봄볕 아래에서 낮잠이라도 즐기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잠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무데서나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남자들이 부러웠다. 헬멧, 고글, 마스크를 벗고 바람막이도 벗어 벤치에 걸어 말렸다. 케이지에서 가득 채워온 물통을 꺼내 한 모금 들이키고 나니 세상의 모든 편안함을 모두 부여받은 듯 편했다. 멀리 강변엔 자전거 몇 대가 우르르 몰려가는 게 보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라면 그녀보다 훨씬 늦게 출발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별하는 생각 했다. 어쩌면 길에서 마주칠 인연 같은 걸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강변 너머 위로 때를 놓친 철새 몇 마리가 군락을 지어 날아가는 것도 보였다. 이별하는 또 노트를 꺼내 들었다. 자연 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얻자 많은 시상이 떠오르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도래>

떠났다고 해서 다 떠난 것은 아니다
사라졌다고 해서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쏜살같이 흘러버린 세월은 과녁의 날줄로
사라진 원시인들은 암각화의 씨줄로
기어코 되살아난다

머지않아 겨울 강에 첫눈 내리고
철새들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낙동강의 슬픈 두께가 그들의
홈타운이기 때문이다

소리치며 울고 떠난 사랑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의 맑은 영혼의 지문이 그것들의
정든 언더그라운드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수수께끼를 흔들고 간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들
생각을 다시 생각하며 돌아올 것이다

형상으로 오지 않고
오로지 소리로만 돌아올 것이다

빛이 꺼지면 빛의 입자를 걸러내는
촘촘한 채의 소리로
세상이 무너지면 침묵을 증폭하는
진공관의 소리로 다시 아우성치며
돌아올 것이다

오늘 도래지에 가서
철새를 기다린다

아마리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한이
빗살 무늬 혼이 되어 도래하는 남해바다
낙동강 발원지에 가서 철새들 부리 사이로 그대를 기다린다

철새가 물고 온 약속이란 다함없는 이름으로 그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가을 오래 참으며 기다린다



'저 새들은 가을이 되면 다시 돌아오겠지?'

이별하는 이번 국토종주가 끝나면 가을에 다시 도전하겠다며 다짐했다. 그땐 혼자가 아닌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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