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타난 아무도 없는 넓은 도로 위를 미친 듯이 내달리며 소리를 꽥꽥 질러 스트레스를 한껏 풀어내고 한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그녀의 머리를 문득 스치는 게 있었다. 잘 곳을 정하지 않았다는 아주 난감한 문제점에 봉착한 것이다. 이별하의 페달링은 급격하게 힘을 잃었고 자전거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아! 미쳤어! 미쳤어!"
이별하는 세 번째로 남자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들이야 아무데서나 잘도 잔다는데 그녀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얼굴이야 다 가리고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알아볼 리야 없겠지만 아무 모텔이나 잡아 들어가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다. 어릴 때는 물론이고 서른이 한참 넘어버린 지금까지 호텔을 제외하곤 다른 숙박시설을 이용해본 경험이 없다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별하는 배낭을 열어 삼성에서 선물로 받은 시계를 꺼냈다. 배고픔을 잊으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생각을 옮겨 다닐 때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켜보지도 않고 배낭 포켓에 넣어두며 언젠간 쓸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계였다. 운이 좋다면 배터리가 충전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별하는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부풀어 시계 전원을 켰다. 역시 시계 배터리는 완충되어 있었다. 시계는 세팅되어 있었고 잘 작동되고 있었다. 듣기로는 심박수 등 헬스케어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고 들었지만 딱히 관심은 없었는데 스마트폰도 꺼버린 마당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전거에 달린 GARMIN GPS에 세팅된 시계는 보기에 불편해서 눈길도 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날로그 스타일의 초침은 벌써 네 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두어 시간 정도 후면 해가 질 것이다. 절대 켜지 않으리라 작정했던 스마트폰 전원을 켤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별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 버튼을 꾸욱 눌렀다. 스마트폰 전원을 끄는 일은 흔치 않아 시스템이 로딩되며 나오는 화면이 남의 전화 마냥 영 어색했다. 스마트폰 바탕화면이 세팅되자 역시 예상했던 대로 문자메시지, 카톡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알람이 줄기차게 울어댔다.
"에잇!"
이별하는 처음 해본 일탈로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스마트폰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잠시 고민스러웠지만 메시지는 읽지 않기로 작정했다. 괜한 걱정들로 이런저런 메시지를 보냈을 게 분명하니까. 이별하는 카카오 지도 앱을 열어 현재 위치를 살폈다. 자전거를 타면서 배워둔 게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그녀는 아까 만났던 넓은 도로를 찾아냈다. 여주 비상활주로였다. 어쩐지 너무 넓은 도로 아닌가 싶었다. 몇 번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긴 했어도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부산으로 향하는 자전거길 위를 달리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았다. 이별하는 지도를 이동해 앞으로 두 시간 정도 후에 도착할 곳에 위치한 숙소를 검색했다. 여주는 바로 코 앞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먼 곳에 충주가 있었다. 몇 년 전 촬영 때문에 충주 켄싱턴리조트에 묵었던 기억이 났다. 거기까지 가는 도중엔 마음을 놓을 만한 숙소는 보이지 않았다. 괜히 자전거길에서 벗어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스트라바에 기록될 국토종주 라이딩코스가 예쁘게 그려질 것 같지도 않았다. 이별하는 입술을 질끈 물고 에너지 바 하나를 꺼내 비닐을 벗겼다.
"까짓 거, 해보지 뭐!"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별하는 에너지 바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앞으로 십여 분 정도면 여주에 도착할 것이고 길을 잘 찾아 헤매지 않고 달릴 수 있다면 세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억지스러운 계획을 짜고 있었다. '과연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슬슬 걱정도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막무가내였다. 이별하는 다시 페달에 발을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자! 가자!"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었다. 달리다 보면 라이더 한두 명이라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약 없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자신감과 용기를 눌러대는 두려움은 누구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체된 것이다.
*
희망은 태양과 함께 조금씩 꺼져 갔다. 용기는 이미 두려움에 눌려 존재 자체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가는 태양은 빨간 사과처럼 아름답고 영롱하게 이별하 옆에 바짝 붙어 달렸다. 하지만 빨간 태양은 추진력이 떨어진 비행기처럼 열기조차 죽여가며 대지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무려 세 시간이나 달려왔지만 충주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더 달려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세상의 어둠은 에너지를 잃어가는 태양을 빠른 속도로 잡아먹고 있었다. 스멀스멀 사라져 가는 태양의 끄트머리를 어떻게든 낚아채 다시 하늘 위로 띄워 올리고 싶었다. 골프장을 지나며 보였던 펜션에 멈춰 섰어야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가느니 앞으로 가는 게 나을 거란 확신만 있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변은 온통 암흑으로 변해 버렸고 세상에 혼자만 남은 것만 같은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강에서는 야간 라이딩을 다녀도 전혀 거칠 게 없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여긴 인간이 창조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빛이라곤 오로지 자전거 전조등뿐이었다. 다행히 자전거 도로라는 확신이 있기에 앞으로 달려갈 순 있겠지만 속도는 낼 수 없었다. 도로 사정은 매우 열악했고 두려움은 추위와 함께 닥쳐왔다. 배낭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지만 추위는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행히 시골이라 달빛과 별빛이 밝아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윤곽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자전거 도로가 왼쪽으로 휘어지자 멀리 앞쪽에 빨간 LED램프가 점멸하는 게 보였다. 한강에서 자주 봐서 익숙해진 자전거 후미등이었다. 혹시라도 귀신에 홀리거나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긴 했지만 예전에 엄마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사람이 무섭지 귀신이 무섭냐?"
항상 사람을 조심하라며 하던 말이었다. 이별하는 용기를 냈다. 어지간하면 바짝 붙어 따라가고 싶었다. 어쩌면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동행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기대심도 품었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앞 자전거와는 도통 가까워질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별하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같은 걸 생각했다. 길을 잃은 건 아니지만 위험 속에 홀로 놓은 자신의 삶에 하나의 등불처럼 보이는 앞 자전거의 LED램프는 위치조차 알 수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 덜렁 놓인 범선의 선장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북극성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달렸다. 얼마나 달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믿음만 가지고 달렸고 바닥에 그려진 자전거도로 표식만이 제대로 된 길을 달리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멀리 사람의 흔적이 분명한 밝은 조명이 산자락 위로 번져 보였다. 이제 머지않은 걸 알 수 있었다. 빛이 점점 밝아지자 불안했던 마음은 한층 편안해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군 것이다.
이별하는 리조트 안 식당에서 공포스러웠던 야간 라이딩을 떠올리며 시를 적어 내렸다. 싯귀 한 구절이 끝까지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다. 봄의 잎과 가을의 잎 두 가지를 두고 저울질하다 끝내 가을 잎으로 마음을 굳혔다. 마음이 안정되자 이별하는 리조트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점이 되어 사라져 버린 앞 자전거를 떠올렸다.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노란 자전거의 그 남자가 분명해 보였다. 그 남자는 작정하고 자신을 데려다 준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어떻게 알고 켄싱턴리조트까지 안내해 준 걸까? 그는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