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19화-완생이 미생에게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노란 자전거의 그 남자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짐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가 자신과 같은 코스로 달리고 있다는 게 왠지 불안하게도 느껴졌다. 분명 자신을 켄싱턴리조트까지 데려다준 것만 봐도 허튼 생각을 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이별하라는 걸 아는 걸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어버렸다. 아마 10시도 안 되었을 거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그동안의 라이딩 덕분이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땐 라이딩을 한 날엔 무조건 마사지를 받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는데 이제는 근육이 잡혀 어지간한 라이딩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가 된 것이다.
자전거 복장을 하고 완벽하게 위장을 마무리한 상태로 로비로 나왔지만 프런트 여직원은 그녀가 이별하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묘한 표정으로 종이와 매직을 내밀었다. 역시 A4용지였다.
"오늘 사인받으려고 근무도 연장했어요. 부탁드릴 게요."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이별하는 마스크를 내리고 물었다. 아무리 가려도 어쩔 수 없었던가 싶었던 거다.
"어떻게 몰라볼 수가 있어요?"
"이렇게 다 가렸는데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알 수 있었어요. 실루엣이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설마 했었는데 목소리로 확신했죠."
직원의 말에 이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노란 자전거의 남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 목소리를 못 들었다면 어떠셨겠어요?"
"글쎄요, 긴가민가 했을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어딜 봐도 예쁜 여자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요."
"혹시 저 말고 자전거 타고 온 사람이 있나요?"
이별하의 질문에 직원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힐끗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스무 명 정도 될까요? 단체 손님이라."
"그럼 혹시 혼자 온 사람은 없었어요?"
"네! 없었던 것 같아요. 어제저녁부터 제가 담당이었기 때문에 확실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녜요. 고마워요."
이별하는 사인과 짧은 메시지를 정성 들여 쓰고 짧은 고갯짓을 한 후 프런트를 벗어났다.
켄싱턴 리조트가 자리 잡은 곳은 숲 속이나 마찬가지였다. 혼자였다면 절대 찾아올 수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결국 국토종주를 멈추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별하는 어깨가 축 늘어질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의지도 문제였지만 철저한 준비조차 없이 무작정 이 짓을 시작했다는 자체를 후회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지! 가는 거야. 까짓 거 뭐 있겠어?"
어제는 그녀를 버리고 떠났던 빨간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숲 너머로 어제 새벽과는 상당히 달라진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런 생각으로 안장에 엉덩이를 올리려는데 시상 하나를 떠올린 이별하는 자전거를 끌고 잔디밭 끝에 자리 잡은 벤치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완생이 미생에게>
인간은 세월로 넉넉하게 태어나
분침으로 초조하게 살다가
초침으로 허겁지겁 떠난다
세월은 네월아 하면서 차근차근 가지 않고
째깍째깍 초침으로 전광석화처럼 몰아친다
누구나 생을 한 번쯤 뒤돌아보지만
다들 애통해하면서 돌이켜보지는 않는다
궁리하는 척하면서 생각만 낭비하고
사진 찍는 척하면서 풍경만 낭비한다
사람을 만나는 척하면서 관계만 낭비하고
꿈을 꾸는 척하면서 비전만 낭비한다
사랑하는 척하면서 인기척만 낭비하고
보고 싶은 척하면서 그리움만 낭비한다
낙엽을 밟아도
낙엽이 나를 밟는 줄 모르고
줄을 잡고 개를 데리고 다녀도
개가 나를 끌고 다니는 줄 모르고
청산에 눈이 내려도
생이 하룻밤 잔설처럼
저리도 흔적 없이 사라질 줄 모른다
날이 춥고 산 그림자 두꺼워지면
그제야 비로소 조금은 깨우치게 된다
뒷걸음쳐보니 지난날의 앞걸음이
모두 다 헛걸음이었음을
품격을 내려놓고 보니 지난날의 인격이
모두 다 결격이었음을
시간을 돌이켜보니 지난날의 기간이
모두 다 허둥대던 순간이었음을
너를 만나지만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순한 너를 만나지만
잠시라도 네 안에 머물지 않고
너 없는 변방만을 헤매고 다니며
오늘도 철없는 나만을 만나고 온다
저리도 지독하게 철없는
나만을 만나고 온다
사람아
자고 나면 모두가
외로운 우리네 지상의 사람아
오늘 하루 만이라도
미주 하지 말고 부디 완주 하자
미생 하지 말고 부디 완생 하자
"철없는 것 같으니. 이제 완생이 되는 거야!"
이별하는 충주 켄싱턴리조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SNS에 올리면 팬들 사이에 대박이 날 모험이지만 아직은 알릴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이 여행이 끝난 후 후기를 올리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궁금했다. 매우 즐거운 상상이었다.
리조트를 메운 숲을 벗어나 다시 자전거도로에 들어섰다. 어쨌거나 어제의 목표는 채운 셈이다. 이별하는 아침에 화장실 변기에 앉아 지도를 열고 오늘 갈 코스를 미리 체크했다. 오늘 목적지는 상주로 결정했다. 카카오 맵에서 보여준 긴 업힐이 걱정되었지만 국토종주를 하다가 죽었다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깡이 생기고 말았다. 그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에게 응원을 보냈다.
자전거도로에 들어선 이별하는 사방을 살폈다. 노란 자전거의 그 남자가 어딘가에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역시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리조트에 투숙했다는 이십여 명쯤 되는 라이더들 역시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 방향을 향하는 것일까, 이별하는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기를 바랐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동행이 있다면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젠 자신을 감추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