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21화-시계는 두근두근

by 루파고

오늘 목적지는 상주. 거리는 불과 130km 정도지만 유명한 이화령이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업힐만 무려 10km에 달하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초장거리 업힐이다. 물론 긴 업힐 뒤엔 오른 만큼의 다운힐이 보답을 하기 마련이다. 이별하는 긴장되는 이화령 업힐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다른 데 신경을 돌리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토록 걱정 따윈 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를 다지며 살아왔건만 천성을 뜻한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어쩌면 걱정이 심했기에 미리 준비하고 미친 듯이 연습했던 것이 오늘날의 그녀를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정표에 수안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뜬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자전거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왼쪽 산등성이 위로 해가 곧 떠오를 것만 같았다. 수안보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듯 자전거길은 조금씩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묻어 있었다. 왠지 사람 냄새가 난다 싶었을까 멀리 앞쪽에서 한 무리의 자전거가 보였다. 적어도 스무 명은 될 것 같았다. 조금씩 거리가 좁아지자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녀들이 팀복을 맞춘 듯 비슷한 색상의 복장으로 MTB를 타고 달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 사람이다!"

그들 무리 중 한 남자가 소리쳤다. 사실 그건 이별하가 하고 싶었던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양한 시선과 함께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

"혼자예요? 여자 혼자 대단하시네요."

"어디 가나요?"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고생이 많습니다."

"파이팅!"

"예뻐요!"

"어디서 오셨어요?"

하지만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는 바람에 이별하의 대답을 들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 중엔 그저 목례만 하며 지나간 사람들도 몇 있었다. 이별하 역시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노란 자전거를 탄 남자를 보았냐고 말이다.

그들은 수안보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였다. 이별하는 잠시 괜히 혼자 온 걸까 하는 후회를 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이런 일탈을 꿈꿔온 게 사실 하루 이틀 된 게 아니었다. 유명인이라는 위치에 놓인 후로 자유 같은 건 포기한 지 오래였고 외국에 나가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언젠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해 왔었던 거다. 그런데 우연히 시작하게 된 자전거는 그녀에게 새로운 목표를 구상하게 만들었는데 어쩔 수 없이 온몸을 위장하듯 칭칭 감아 돌려도 누구 하나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고, 바로 이게 목표를 이뤄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수안보가 가까워졌는지 도로 주변엔 상가도 늘어났고 마을 규모도 커졌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개도 심심치 않게 보였고 밭을 일구는 농부도 여럿 보였다. 자전거길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편의점도 하나 둘 나타났다. 이별하는 편의점에 들러 김밥과 커피 하나를 구입해 비닐째 자전거 핸들에 걸고 인적이 드문 장소를 물색했다. 남들처럼 아무데서나 맘껏 지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누가 본다 한들 크게 이슈가 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뭇거리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근처에서 누가 봤다고 해도 가수 이별하라는 걸 알아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것도 알지만 지나왔던 삶처럼 역시 매사 걱정병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잠시 페달을 밟아 갓 피어오른 버드나무 아래 조그만 나무 의자 하나를 발견했다. 버드나무 가지에는 온통 연두색 이파리들이 생기롭게 돋아나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누군가 정성 들여 가꾸었을 게 분명한 작은 꽃밭이 보였다. 예쁜 봄꽃이 시골 풍경과 묘하게 어울렸다. 그녀는 이번에도 노트와 몽블랑을 꺼냈다.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시상이 많이 떠올라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감성은 예전보다 풍부해졌고 생각은 더 깊어졌으며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시계는 두근두근>

느리게 느리게 가던 시계가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어느새 고개를 돌리면
24컷 필름으로 꽃을 찍어 대다
슬로모션으로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인연을 만나면,

그것은 드라마이기도 하고 동화이기도 한 무대
누구나 긴 호흡으로 대사를 연습한다
독백은 끝났고 내 마음이 방백으로 세상에 말하지만
오직 그대만 듣지 못한 엇갈린 대화법에 익숙하여
핀 조명 아래 정적이 감돌고 액팅이 멈추고 나서야
내 귀에는 종소리가 울리고
내 눈에는 갖 피어난 꽃이 난무하는데

느리게 느리게 그대가 딛는 발걸음마다
빗물이 고이고 달리의 시계가 녹아 나듯
천천히 꽃이 떨어질 때
무대 위 구멍 난 천정으로 들어온 점묘의 빛

별이다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지극히 도달하고 싶은
그것은 별이다

그대가 퇴장하기 전
무대의 문이 닫히기 전
단 한 번만 뒤돌아본다면
딱 한 번만 날 향해 멈추어 준다면
또는 슬쩍 하얀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긴 머리 외로 꼬고 배시시,
말문이 턱 막히는 스톱모션의 각인

그리고 페이드 아웃.

박수는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대본을 덮고 부스스한 얼굴로
커튼을 연다

다시 시계가 걷는다
일분에 60걸음으로




똑딱! 똑딱! 이별하는 일 초, 일 초를 차근차근 세어 보았다. 정확하게 육십 번인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겨우 일 분이란 짧은 시간, 그녀는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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