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의 고래(2004, 문학동네)에 대한 감상문
평점: 5/5
한줄평: 오랜만에 만난 이야기꾼, 주인공의 고독에 마음이 아파 오랜만에 책을 읽다 펑펑 울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금복'은 딸을 향한 욕정에 미쳐가는 홀아비를 남겨두고 늙은 생선 장수의 수레를 빌어타 부둣가 도시로 향한다. 그곳에서 금복은 푸른 대왕 고래를 처음 마주했고, 그 순간 고래에 매료된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p271)
생선 장수와 함께 부둣가 도시에서 살면서 금복은 자신의 생명력을 마음껏 뽐낸다.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하며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은다. 그리고 웬 어부한테 겁탈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걱정'과 새롭게 살림을 차리며 인생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낸다. 걱정은 호랑이 사냥꾼 집안 출신의 기골이 장대한 거대한 고래 같은 남자였다. 하역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면서도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야 아무 걱정 없는 단순한 삶을 사는 엄청나게 힘이 센 거대한 남자. 금복은 걱정에게서 대왕 고래를 보았다. 거대하고 단순한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말이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둘의 행복은 걱정이 크게 다치면서 금방 끝나버렸다.
금복은 지극정성으로 걱정을 돌봤으나 폭력적으로 변한 걱정은 금복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게 틀림없다며 금복을 매질한다. 사실 걱정의 의심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시간은 혼란하게 흘렀고 금복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둘 모두를 잃고 나서야 부둣가를 떠난다. 전쟁이 발발하고 거지 생활을 하며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던 금복은 임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된다. 마구간에서 금복은 6 kg에 육박하는 기골이 장대한 딸, 춘희를 낳는다. 또 다른 고래의 탄생이었으며 아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금복은 걱정을 똑 닮은 춘희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춘희를 보면 걱정의 비참했던 마지막이 떠오르며 죽음만이 겹쳐 보였다. 금복은 평대라는 도시에서 훗날 화근이 될 눈먼 돈을 이용해 또다시 사업 수완을 발휘하기 바빴을 뿐이다. 다방, 벽돌 공장, 영화 극장 등등 금복의 사업은 날로 번성했고 평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지만 춘희는 방치됐다. 사실 춘희는 엄마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반편이에 벙어리인 데다 살로 뒤덮여 남자인지 여자인지 전혀 구분이 안 가는 용모였기 때문이다.
의외로 금복의 새 남자였던 文은 춘희를 인간적으로 대해줬다. 文은 금복과 함께 벽돌 공장을 건설한 인물로 성실하고 따뜻한 이였다. 그는 춘희에게 벽돌을 짓는 방법을 알려주며 따뜻하게 보살핀다. 벽돌 공장은 뛰어난 품질 덕에 날로 번창했고 항상 사람으로 북적였다. 춘희는 벽돌 공장의 가마와 따뜻한 벽돌을 사랑했다. 실제로 벽돌을 짓는데도 재능 있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평대에 큰 불이 나고 춘희는 방화범으로 누명을 쓰며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겪는다. 버티고 버틴 춘희는 결국 옥살이를 끝내고 평대로 돌아온다. 하지만 큰 불 때문에 폐허가 된 평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반편이인 춘희는 왜 아무도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질 좋은 벽돌을 구워내면 사람들이 돌아올 거라 믿으며 공장에서 끝없이 혼자 벽돌을 구워낸다.
그 정성에 신이 감읍한 건지 공장 인부의 아들이었던 자가 찾아와 잠깐이나마 춘희는 가정의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방랑벽이 있던 남자는 춘희가 임신을 하자마자 벽돌 공장을 떠났고, 춘희는 혼자서 출산을 하고 아기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아기는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춘희는 식음전폐하며 그저 벽돌만을 계속 굽는다. 아무리 굶어도 100 kg가 거뜬히 넘던 춘희는 급속도로 살이 빠지기 시작한다. 춘희가 말라갈수록 벽돌의 품질은 높아져만 갔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밌는지는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금복의 사랑, 바람기, 사업 수완에 대한 이야기는 흡입력이 대단하다. 특히 사랑과 바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성관계에 대한 묘사도 굉장히 자세한데 전문 야설에 견줄 수 있는 수준이다. 특히, 천하박색 늙은 여인과 30 cm 양물을 가진 반편이의 이야기는 너무 저속하고 자극적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천박한 분위기 때문에 나는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들의 좌충우돌 이겠거니 하며 편한 마음으로 이 소설을 즐길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간의 꿈틀거리는 욕망과 피할 수 없는 고독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였다. 자신들의 고독에서 도망치기 위해 사랑과 욕망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래는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를 좋아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이아손 원정대'에 참여해 자신의 연인 이아손을 돕기 위해 남동생을 토막 내 바다에 던져버린 '메데이아'라는 캐릭터에 무서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꼈었다. 타인에게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다는 점이 무서우면서도 어떠한 잔혹한 일도 할 수 있게끔 사람을 이끄는 욕망의 절대적 힘이 아름다웠다. 이 책 속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폭발시킨다. 그들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하기도 하고 엄청난 돈을 원하기도 한다. 이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이승이란 개똥밭을 데굴데굴 구른다. 난 지금까지 이 강렬한 욕망을 생명력이라 착각했으나 이는 사실상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대왕 고래의 고고한 생명력 같은 게 아니라 승냥이에게 쫓기는 토끼의 필사적인 뜀박질이었을 뿐이다.
타인과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의 강렬한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를 사랑했던 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메데이아에게 토막 난 남동생과 그 시신을 수습했을 메데이아의 아버지에게 이입할 수 있었다. 내가 매력을 느꼈던 메데이아 역시 어쩌면 금복이처럼 욕망과 고독의 노예였던 것 같다.
이들에 비하면 반편이 춘희의 욕망은 욕망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순수한 것이었다. 그녀는 엄마의 품을 그리워했고, 감옥에서 간수가 자기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고, 남자가 돌아오기를 그리고 자기 자식이 죽지 않길 바랐다. 이 별 것 아닌 소망은 모조리 거절당한다.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했던 이들의 죗값을 세상 물정 모르는 춘희가 자신의 고독으로 이자까지 쳐서 갚아내고 있는 것 같아 읽으면서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더욱더 속상했던 점은 작가가 글을 너무 잘 써서 춘희의 고독이 살에 베이는 것처럼 날카롭게 와닿았다는 점이다. 작품 속 다른 이들처럼 고독을 분노나 욕망으로 바꾸지 못하고 그저 감내하기만 한 춘희는 그렇게 몇 년 간 혼자서 계속해서 벽돌을 굽다 외롭게 떠났다. 그리고 너른 들판 가득 쌓인 그녀의 붉은 벽돌은 이 나라를 대표하는 대극장을 짓는 재료가 된다. 그녀는 훗날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불리게 된다.
춘희의 벽돌로 지은 대극장은 과거 벽돌 공장처럼, 금복의 극장처럼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붉은 벽돌의 여왕 춘희에 대한 안내를 한 번 즈음을 읽어볼지도 모른다. 금복이 고래를 보며 느꼈던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가 춘희의 벽돌로 구현된 것이다. 이렇듯 엄마의 무관심과 억울한 옥살이로 살아있는 동안 전혀 기억되지 못했던 춘희는 죽고 나서야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들에게 잊혔을 때 죽는다'던 원피스의 명대사에 따르면 우리 춘희는 살았을 때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고, 죽고 나서야 살아있게 됐다. 이게 무슨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이 거지 같은 작가가 '춘희를 둘러싼 하많은 얘기들은 제 스스로 생명을 얻은 아메바처럼 무한히 확장해가고 있지만 정작 진실은 그 옛날 지상에서 사라진 무림비급처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이미 허구에 불과한 소설이지만 이마저도 허구여서 춘희가 무시무시했던 겨울을 잘 넘기고 딸과 함께 벽돌 공장에서 따복따복 살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계속 쌓아나았기를 바란다. 고래만큼 똑똑하고 모성애가 뛰어난 동물은 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