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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멍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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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서윤 Oct 20. 2024

죽음에 맞서 사랑하기

세 권의 책,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를 빌며

    연달아 읽은 세 권의 책이 동일한 주제를 가질 확률은 얼마 정도일까? 나는 표지, 책 제목, 출판사를 보고 책을 고른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사실은 그저 당시의 우연한 느낌에 따라 책을 고른다. 즉, 아무 기준 없이 그저 느낌과 직관에 따라 새로운 사람을 낯선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 듯 책을 고른다. 요새는 유유상종을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고 유쾌하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내 느낌과 직관은 '사이언스'가 아닌지 골라진 책들은 항상 모든 방면에서 중구난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읽은 세 권의 책이 '죽음에 맞선 사랑'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엮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우연에 기대는 독서를 평생 해온 나에게 있어 이는 어떠한 필연으로 여겨졌다.

    

    <죽음과 사랑>의 3부작 목록은 아래와 같고, 순서는 필자가 체험한 순이다.

    1)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열린책들, 2024)

    2) 최진영의 구의 증명 (은행나무, 2024)

    3)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창비, 2022)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책들이 항상 번역도 훌륭하고 재밌어, 서점에 재고가 있는 '열린책들' 책 중 가장 제목이 자극적이라 선택했다. 도파민을 원하며 책을 읽은 나를 혼내기라도 하듯 책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나에게 쏟아부었다. 열아홉 살의 아름다운 청년 시몽 랭브르는 친구들과 함께 서핑을 하러 겨울 바다로 나간다. 서핑을 마친 후 노곤한 몸으로 시몽은 친구가 모는 트럭에 몸을 실었다. 조수석의 친구와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의 시몽은 트럭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운전석에 앉아 있던 친구에게도 공평하게 졸음이 찾아왔다. 규정 속도를 넘어 과속하던 트럭은 도로를 벗어나 형체가 뒤틀렸고,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시몽 역시 트럭과 함께 뒤섞였다. 그럼에도 시몽의 심장은 계속해서 뛰었다. 뇌는 이미 피에 잠겨 버렸음에도.


    그렇다. 시몽의 뇌는 이미 죽었고, 연명 장치 없이는 다른 장기 역시 기능을 유지할 수 없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시몽은 되살아날 수 없다. 죽음은 비가역적이다. 병원으로부터 연락 받은 엄마 마리안은 별거 중이던 시몽의 아빠 숀에게 비보를 전해야했다. 아직 시몽이 건강한 세상에 살고 있는 숀의 목소리를 듣고 마리안은 지금 이 짧은 순간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상처입지 않은 목소리를 듣는 마지막임을 인지한다. 마리안은 그저 연락을 먼저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숀의 행복한 세계를 부셔야 했다. 행복한 사람이 사는 세계와 불행한 사람이 사는 세계를 가르는 막은 이토록 얇으며 쉽게 찢긴다.


    한국도 그렇듯 프랑스도 뇌사자가 발생할 경우 장기 이식 체계가 작동한다. 이제 다들 이 책의 제목이 왜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인지 이해할 것이다. 뇌는 죽었지만 심장이 뛰고 있는 시몽의 장기들은 장기 이식을 위해 대기 중인 다른 환자들에게로 옮겨질 것이다. 이를 위해 건조하고 객관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뛰어다니는 소생의학과 의사와 간호사, 시몽의 부모에게 장기 이식 과정을 설명하고 프로세스를 이행해야 하는 코디네이터들, 장기 기증 여부에 대한 원치 않은 권력을 가진 시몽의 부모, 시몽의 심장을 이식받게 될 중년 여성의 이야기가 책 한 권에 빼곡히 들어찬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시몽 본인이라면 장기 기증을 원할지, 또 시몽의 부모라면 장기 기증에 동의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두 질문에 대한 내 답은 둘 다 '그렇다'였다. 나는 욕심 많은 사람이기에 내가 죽더라도 내 신체의 일부가 지구에 남아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계속해서 경험했으면 좋겠다. 때문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가 계속해서 나와 같은 지구에 존재하기를 바란다. 파편화된 세포 덩어리에 불과할지라도 내 신체의 일부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가 실재하는 세상에 계속 남아있길 바란다.


    철저히 본인 위주의 이기적인 마음일지라도 이 이기적인 마음 덕에 누군가는 새로운 삶과 함께 새로운 사랑과 이야기를 낳을 테다. 장기 기증에 동의한 유족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임을 잊고 지낸다. 가끔 맞닥뜨리는 죽음 앞에서야 우리도 한 줌 흙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하지만 사랑스럽고 고집스러운 인간은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장기 기증의 형태로 시몽 랭브르의 부모는 사랑이 죽음에 맞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제도권 밖에서의 폭력적인 죽음 앞에서도 사랑은 죽음에 저항할 수 있을까?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가기만 하는 '구'와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라며 그와의 사랑을 지켜가는 '담'의 이야기이다. '구'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빚을 갚기 위해 자꾸만 빚을 지는 사람들이었다. 군대를 다녀오니 부모는 행방불명됐고 빚은 '구'에게 떠넘겨졌다. '구'와 '담'은 사채업자들을 피해 전국 각지를 떠돈다. 하지만 한국은 너무 좁고, 결국 '구'는 사채업자들에게 잡혀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한다.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담'을 보고 싶다는 일념하나로 도치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의 숨은 '담'이 도착할 때까지 붙어있었다. 결국 '구'는 죽고 '담'은 '구'가 생전에 했던 말을 실천한다.


    밀가루 반죽처럼 다뤄진 곤죽이 된 '구의 몸', 정확하게는 '구의 시체', 더욱 정확히는 '구의 죽음'. '구'는 생전 '담'에게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라고 말했었다. '담'도 그러했기에 '구의 죽음'을 조심스레 뜯어먹는다. 울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음을 먹어 없앤다. '담'에게 뜯어 먹힌 구의 시체는 혼란한 담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화학반응을 거쳐 착실히 담의 육체가 될 테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서로에게 서로만 있으면 됐던 둘은 서로를 잡아먹는 방식으로 죽음에 맞서고자 했다. 문자 그대로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던 둘이기에 장기 기증이 가능했을지라도 그 둘은 거부했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서로가 서로의 육체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었을 테니.


    '구'와 '담'의 사랑이 완결되는 방식은 분명 기괴하고 역겹다. 그들도 이를 분명히 인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기괴하고 역겨운 방식을 결국 실천했다.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죽음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어쩌면 자신들을 방치한 사회에 대한 복수일 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쉽사리 보낼 수 없다는 이기심이 극도록 발현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체를 뜯어먹는 기괴한 장례를 '구'가 원했다. 제도권 안의 사람들이 손가락질할지라도 구와 담은 서로의 세상 안에서 죽음에 맞서 사랑을 지켰다. 담이 선택한 장례의 방식이 역겨운 만큼 이를 가능케 한 그들 사랑의 위대함도 끔찍하리만큼 대단하다. 어쩌면 구는 담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본인들의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담이었다면 '구의 시체'를 먹었을까? 그리고 내가 구였다면 담이 나를 먹어주길 원했을까? 잘 모르겠다. 나를 먹어주기를,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를 먹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우니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아마 사랑을 증명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몸부림 칠 테다. 죽음에 맞서는 사랑을 증명할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가 나에게 인사를 걸었다. 전날 마신 위스키 때문에 은은한 숙취를 느끼고 있는 나는 '헤헤 나도 안녕?' 하며 책을 골랐다. 소설집의 첫 작품 '봄밤'에서 '시몽의 부모'와도 '구와 담'과도 다른 방식으로 죽음에 맞서 사랑을 완성하고자 했던 몸부림을 읽을 수 있었다.


    <안녕 주정뱅이>의 해설을 쓴 신형철 님은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욕망의 세계이며, 서로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가 중요하기에 서로의 결여를 교환하는 것이 사랑의 관계'라 주장한다. 하지만 서로의 결여가 극단적으로 커질 때도 우리는 사랑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사고 실험이 권여선 작가 소설집의 첫 작품 '봄밤'이라 생각한다.


    '봄밤'의 영경과 수환은 결여로 가득찬 인간이다. 둘은 각자 본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장난에 의해 좌절됐었다. 영경은 술독에 빠졌고, 수환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노숙자 생활도 했었다. 우연히 만난 그들은 서로의 결여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 신용불량자였던 수환은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상태라 류머티즘 관절염을 방치했고, 척추에까지 관절염이 번져 걸을 수 조차 없게 됐다. 수환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영경의 알콜 중독 증세 역시 심화되었다. 영경은 모았던 돈을 털어 수환과 함께 나란히 요양병원에 입소한다. 하지만 수환의 병세는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고, 영경은 알콜성 치매까지 시달릴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수환은 영경이 술을 마시러 가는 걸 막지 않는다. 수환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수환의 마지막 날에도 영경은 술은 마셨고, 결국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발작을 일으키며 병원에 실려온 영경은 알콜성 치매 때문에 수환에 대한 기억을 완벽히 잃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던 영경의 정신이 수환이 죽으면서 맘 놓고 죽은 것이다.


    인간은 왜 불행한가? 사람은 개인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그 사람의 행실이나 성격적 결함에서 찾길 좋아한다. 불행의 원인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일 테다. 물론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란 표현이 있듯, 자기 자신이 자초한 불행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불치병 진단, 믿었던 연인의 외도 등 이런 것들의 원인은 없다. 그냥 이유 없이 닥치는 자연재해이다. 하지만 우리는 위의 불행들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에 자연재해처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재해는 피하는 게 가장 좋지만 피하지 못했다면 당신이 살아남기를 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결여와 결핍을 깨닫는다. 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결여와 결핍은 살아남았다는 훈장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조롱받아 마땅한 근거가 된다. 영경과 수환은 서로의 결여 때문에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결여와 결핍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상대방의 결여가 무한대로 커져가는 상황에서도 서로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베풀었다. 그 끝에 죽음 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들은 피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것들을 받아먹었다. 그들은 함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으로 서로의 사랑을 지켰다. 죽음에 맞서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었다.


    사랑받고 자라 결핍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쉽게들 말하고 당연하다는 듯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세상이다. 역시 사람은 무릇 불가능한 걸 원하는 법이다. 결핍 없는 사람과의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은 필자가 소개한 3권의 책 모두 소설에 불과할 뿐이며 너무 과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 소설의 불행인 교통사고 / 사채 / 알콜 중독 / 질병은 우리 주위에 너무 흔한 불행이다. 우린 행복만큼 불행이 만연한 세상에서 긍정적인 감정 뿐만 아니라 결여와 결핍을 각자의 인생에 쌓아가며 살아간다. 사랑을 잃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을 쌓기도 하며 즐겁고도 고통스럽게 말이다.


    다들 사랑은 사랑이기에 고통과 충돌을 유발하고, 그로 인해 상흔과 결핍이 자아지며, 역설적이게도 사랑이 그를 회복해 준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결핍과 결여 없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인 양 군다. 어쩌면 다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행은 찾아오지 않으리라고 강하게 믿고 있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불행을 겪어보지 못한 운 좋은 사람도 결국에는 죽기 마련이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도 죽음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자,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고통 없는 사랑을 찾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죽음이 성큼 당신 앞으로 찾아왔을 때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완결낼 것인가?


나는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라본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나지만 그 정도의 용기는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 역시 나의 죽음에서 도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결여와 결핍을 나누며 사랑했기에 내 죽음 뒤에 남겨질 또 다른 결여와 결핍 역시 그 고통만큼 우리의 사랑이 깊었다는 걸 증명하는 계제가 되길 바란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결국에는 갈라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게 사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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