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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Mar 25. 2021

혼자 있던 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1. 지난 주말에 아내가 딸을 데리고 친정에 갔습니다. 저는 2박 3일을 집에 혼자 있었지요. 밤을 혼자 보낸 적은 아내가 직장에 나간 지난 7월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웠지요. 카모마일 차를 한잔 타 놓고 어두운 방 안에서 심야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는 제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현실은 정신을 차려보니 토요일 오후 5시 50분이더라구요. 분명히 금요일 오후에 가족을 처가댁에 데려다주고 왔는데 말입니다. 그동안 뭐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 짬뽕과 탕수육을 시켜 먹고 ‘카이로스’란 인터넷 tv 무료 제공 드라마를 보며 다시 정신줄을 놓았습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일요일 오후 3시가 넘어 있었지요. 곧 아내가 돌아올 것 같아 재회를 기다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청소를 했습니다. 마치 백일 휴가를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그 느낌을 또 받아볼 줄은 몰랐는데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겪었습니다. 그리고 꿈에 재 입대를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드라마 죽돌이


2. 아내는 집 꾸미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리모델링에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 꾸미기에도 신경을 좀 써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고 합니다. 리모델링 최신 경향 따라가기에도 바쁘다고 하네요. 요새 단지에 새로 이사 오는 분들이 많아서 때려 부순 후 고치고 있는 집들이 많습니다. 우리 집 건너 동의 같은 층도 그중 하나인데요, 리모델링 기간이 길어지자 아내는 그 집을 늘 의식하며 뒷 베란다에서 밖을 한참 주시하곤 했습니다. 마침내 그 집이 이사 오는 날, 아내는 라이벌 의식이 폭발하여 뮤지컬 감상용 쌍안경을 들고 올 태세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앉혀놓고 품평회를 시작했습니다. 한참 듣다 지루해져 「차라리 저 집에 가서 2단지 리모델링 협의회에서 나왔다」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반색을 하며 그런 게 있었냐며 회원은 누구냐고 했지요. 저는 「.... 우리 집 하고 저 집?」이라고 대답했고, 싸늘한 눈빛을 느끼며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 하고 나왔습니다. 분리수거는 위기탈출의 참 좋은 명분입니다.      


   

3. 재하를 혼자 볼 때 4가지 과업이 있습니다. 저만의 체크리스트인데요, ‘재하 점심 먹이기’, ‘재하 응가 뉘기’, ‘내 머리 감기’, ‘내 변 보기’입니다. ‘낮잠 재우기’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과제라 감히 넣지 못합니다. 이걸 다하고 나면 하루가 뿌듯해요. 부식을 좋아하는 딸은 응가를 하루에 세네 번씩 합니다. 닦이다 보면 손이 부르틉니다. 제 볼일을 보는 것도 상당히 힘겨운데요, 문을 열고 힘을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하는 화장실 앞에서 아빠가 부끄러워하며 앉아있는 것을 좋아라 하며 보고 있지요. 제게 변비가 생긴 것은 아마 문을 열고 변을 보기 시작한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육아 틈틈이 보는 책은 이제 찢을 때도 있습니다. 예전부터 딸에게 반달리즘적 경향은 있는 것 같았지만 최근 본격화되었습니다. 잊지도 않고 용서도 안 하는 저는 다 엑셀에 적어놓고 나중에 용돈에서 깔 예정입니다.

다행히 다음 달부터는 어린이집에 보낼 예정입니다. 이 천둥벌거숭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더군요. 상담 다녀온 아내가 「재하는 1세 반이라 병아리반이래」라고 전해줬습니다. 그러면서 「0세 반은 다람쥐, 2세 반은 토끼래, 귀엽지?」라고 말했습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저는 「병아리랑 다람쥐랑 싸우면 다람쥐가 이기지 않아? 근데 1세가 병아리야?」라고 되물었지요. 결과적으로는 제 말이 맞았습니다. 1세인 재하는 다람쥐 반에 갈 것이고 0세는 병아리 반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활용 쓰레기를 챙겼습니다.      



4. 저희 어머니 눈에 노화가 왔는지 황반변성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손녀 얼굴 못 볼지도 모른다며 하도 하소연을 하자 약간 지쳐서 ‘괜찮다고, 재하는 목소리도 예쁘다고’ 했다가 ‘xxxx’라고 욕을 먹었지요. 아직 기운은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눈에 주사를 맞기로 하고 병원에 함께 갔습니다. 당신 말로 이번에는 유서는 쓰지 않았다고 했지만 얼굴 자체가 원체 비장하니 남길 말은 딱히 필요 없었습니다. ‘자기는 이제 어떻게 되느냐, 어떤 고난을 겪을 것이냐’ 하면서 처치실 앞에 가니 어머니 같은 어르신들 수십 명이 주사를 맞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며 도열해 계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프고 불행한 사람’이었다가 ‘개중 한 사람’이 된 어머니는 자기 순서가 되자 빠르고 조용하게 주사를 맞고 나왔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내내 자기 아프다고 죽는소리를 하다 점심으로 사 온 초밥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잘 드셨습니다.   


  

5. 요새 재하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딸이 점점 머리성장하여 바라는 것도 많아지고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것도 있어지는 것 같은데, 말을 못 하니 양육자에게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감정도 풍부해지는데 표현은 서툴으니 역정만 내게 되지요. 요구가 들어지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짜증을 내다가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이 두 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상승효과를 내지요. 환장할 노릇입니다. 덕분에 제 인격의 바닥도 보게 됩니다. 아이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데 거기에 기분이 상하고 화도 냅니다. 스스로에게 ‘지금의 나는 진짜 모습이 아니다’라고 하고 있지만 모르지요. 사람은 극단 상황에 몰렸을 때 진짜 얼굴이 나온다고 하니 이게 원래 제 내면인지도요. 그러다 보니 아내에게 종종 필요 없는 화를 내고는 합니다. 이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더라구요. 다만 마키아벨리가 그랬던가요, ‘전쟁은 네가 원할 때 시작할 수 있지만 끝날 때는 빌어야 한다’라고. 화를 내는 것도 비슷합니다. 내는 것은 마음대로지만 화해하려면 눈치를 보며 구차하지만 빌어야 하니까요. 다음부터는 열심히 참아야겠습니다. 분리수거 쓰레기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6. 육아를 가열차게 하다 보니 머릿속이 하얘져서 글을 길게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쓰고 싶어 이렇게 주변의 짧은 이야기 몇 개를 남깁니다. 경어체로 쓴 것도 평어로 쓰는 것보다 이게 글 이어나기기 편하거든요 으하하. 여유가 없으니 브런치도 잘 들어오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감사한 읽어주시는 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려요.


요새 리본에 집착하는 딸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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