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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우 May 25. 2021

행운의 편지를 받았다

어느 날의 뜬금없었던 귀여움

저녁이 되어서야 비가 그쳤다. 여느 때처럼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잔반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인생 신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LG가 또 털리고 있어 음식물 쓰레기에게 화풀이라도 해야 해서였다. 그깟 공놀이 이제 정말 안 본다 하며 들어오고 있는데 우편함에 편지가 하나 꽂혀 있었다.      



겉이 하얀 봉투였다. 보나 마나 돈 빌리라는 것인 줄 알고, 반송함에 넣으려는데 표면에 뭐라 뭐라 써져 있었다. 대충 보니 아이 글씨였다. ‘토끼 반 오빠 놈이 우리 딸에게 보내는 건가, 어느 놈인지 하라는 한글 공부는 안 하고 벌써부터 수작질이야’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살피니 ‘답장 보내주세요’라고 써져 있었다.     



순간 행운의 편지인가 싶었다. 그런데 행운의 편지는 내가 한창 위문편지에 동원되던 30여 년 전에도 이미 한물간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사실 그건 후졌다. 어차피 유행은 돌고 도니 다시 부활의 때가 온 건가 하며 집으로 들고 올라가서 밝은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봉투에 「카페 사장님께, 답장 보내주세요」라고 적혀있었다. 보낸 사람은 같은 동에 사는 어린이였다. 내용인즉슨 「자기는 우리 동 몇 층 사는 아무개인데 우리 가게에서 흑당 밀크티를 먹은 적이 있으며 불경기인데 힘을 내라, 자기도 학교생활이 꽤 힘들다, 코로나 19 이겨 낼 수 있다」 이런 내용이었다.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아내에게 보여줬다.      


아이의 귀여운 편지


「이거 봐봐, 나한테 카페 사장님이래」

아내는 웃으면서 편지를 읽더니 꽤 타당성 있는 분석을 하나 했다.

「자기가 맨날 앞치마 매고 쓰레기 버리러 가잖아. 그거 보고 동네 카페 사장님이랑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한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며칠 전에 아내와 딸을 지극정성으로 수발들어 기특한지 큰 처형께서 앞치마를 하나 사줬었다. 누가 봐도 경력 15년쯤 된 바리스타가 매고 있을 법한 가볍고 폼 나는 앞치마였다. 그것도 나름 새 옷인지라 신나서 쓰레기 버리러 갈 때마다 입고 나갔는데 편지 보낸 어린이는 그걸 보고 자기가 갔던 카페 사장님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나도 딸 키우는 마당에 동심에 상처를 줄 수 없으니 후다닥 답장을 썼다. 편지지로 마땅한 것이 없어 연습장으로 쓰는 노란 공책에 글을 썼다. 색이 있어 그럴듯했다. 「카페 사장은 아니지만 편지 고맙게 받았다, 어린 여자 아기 안고 있는 남자 어른은 나니까 앞으로 보면 인사하자, 학교생활 힘들어도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아라, 나중에 많이 생각날 거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아내에게 연애할 때 편지 이상하게 쓴다며 혼난 적이 많아 약간 떨렸다. 펜 자체를 잡아 제대로 글씨 써 본적도 오래였다. 편지봉투는 군대에서 쓰던 게 남아 있었다. 군인 감성에 어울리는 분홍색 봉투였다. 겉면에 못난 글씨로 몇 호 아저씨가 보낸다고 적었다.     


나도 나름 귀여운 편지...


아파트 입구로 가서 우편함에 답장을 넣고 돌아왔다. 아이의 뜬금없었던 귀여움은 동네 주민에게 7통을 보내야 하는 행운의 편지가 아니었다. 이렇게 글도 쓸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동안 자식 키우느라,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많이 지쳐있었다. 글도 쓰기 싫어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한 아이의 이웃을 향한 선한 마음 덕에 이렇게 이야깃거리가 생겨 한번 적어본다. 이게 인연이 되어 우리 딸에게 좋은 동네 언니 하나 생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기분이 좋다. 그리고 행운의 편지를 받아서인지 LG는 역전했다. 가자 V3!! AGAIN 1994. 라고 썼는데 다시 역전패했다. 야구 진짜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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