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이야기 22
만례씨는 매주 광주와 나주를 오갔다.
월요일 오전에 광주에 와서 토요일 오전이면 다시 나주로 내려갔다.
그 일정이 몇 해가 가도록 변하지 않았다.
“인자 물짠 낯부닥에 살잠 쪼까 붙었고만.”
“나 인자 고만 묵고 자픈디?”
“아따, 속 개안하믄 고것까지만 더 묵어라이.”
“늠어올라항께. 고만 묵을라네이.”
만례씨는 나주에서 올라올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물을 바리바리 싸왔다.
만례씨의 음식 하나하나가 정성이 가득했다.
“할머이, 나 고지나물 묵고 자픈디?”
“나가 삐짝 몰려 갖고 왔응께. 쬐까만 지달려라잉.”
“할머이, 그라고 나는 묵도 안 헌께 도시락에 쏘세지 안 싸줘도 된당께.”
“니 묵으라가니, 느그 친구들 묵으라고 싸능 것이재.”
“같이 묵어도 나는 다른 반찬 안 묵은께, 친구들 묵을 꺼 읍써도 암시랑토 안 헌디?”
“그랴도 그란 것이 아니여. 요새는 후랑크 머시기를 아그들이 질로 좋아한담서?”
만례씨는 도시락 세 칸 중 한 칸을 꼭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채웠다.
소시지나 햄구이 같은 것들로.
씻은 배추김치와 나물만 있으면 혹시라도 친구들이 나랑 밥을 먹기 싫어할까 그게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여그는 문방구도 겁나담서. 깨끼 같은 것은 묵고 잪든 안 허냐?”
“글 안 혀도 문방구 벼락박에 빅토리아 아이스크림 폰다고 쓰졌든디 어쩌고 생긴 줄 몰르겄네.”
“그란 것은 을매나 주믄 산다냐이?”
“잘 몰르겄네. 한 오백 원 줘야 쓰까?”
만례씨는 동전지갑을 열어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내 손에 쥐여줬다.
“속 개안함서 묵고 자플 때 사 묵어라이.”
밭에 나가 일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두고 만례씨는 매주 광주로 왔다.
팔자에도 없는 징역살이를 한다면서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올라왔다.
“나가 잘 챙겨 묵을랑께. 이라고 마이 있지 말고 왔다 갔다 하랑께.”
“나가 할만하믄 할랑께. 여적도 니 낯부닥이 쪽 뽈아블어 갖고 못 쓰겄담마다.”
“개안하당께 그라네이.”
교통사고 이후 만례씨는 의료기 무료체험장을 찾아다녔다.
“할머이, 그란데는 잘 못 가믄 안 된다든디?”
“암시랑토 안 해야. 안 사도 머라고하도 안 해야. 오늘 갈란디, 니도 함 갈라냐이?”
초등학교 후문을 지나 만례씨를 따라 체험장에 갔다. 돌침대에 익숙하게 누워 마사지 기계를 체험하는 만례씨를 보니 마음 한 편이 무거웠다.
“할머이, 난중에 내가 돈 마이 벌믄 사주께.”
“기냥 와갖고 이라고 하믄 된디 먼 돈을 써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방구 앞에서 만례씨가 물었다.
“그때 니가 말헌 깨끼 한나 묵을래?”
“어. 묵을래. 빅토리아 아이스크림.”
“여. 아이스크림 한나 주시요이.”
“얼마예요?”
“100원이예요. 두 가지 맛 고르시면 됩니다.”
만례씨가 나를 본다.
나는 바닐라 맛 두 개를 고른다.
“할머이도 같이 묵게.”
“그래블자. 나도 흐건 것으로 두 개 주시요이.”
아이스크림이 빠르게 녹았다.
만례씨와 나는 천천히 걸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의 발걸음에 맞춰 주던 만례씨.
교통사고 이후 느려진 그 발걸음에, 이제는 내가 속도를 낮춰 함께 걸었다.
만례씨가 없는 동안.
집이 가까워지면 나는 늘 불안했다. 이제는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문을 열어줄 만례씨가 내 옆에 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