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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Feb 13. 2022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게 아니다.

중대재해 처벌법에 대한 고찰

어제 윤석열의 발언에 분노한 내 글을 보고 토목 공사 현장 기업을 운영하는 후배가 반박하는 댓글을 썼다. 중대재해 처벌법의 폐해와 현장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저는 토목 현장서 함바 밥 먹고 지내고 있는데요. 업계 갑을병정의 '병'정도 되겠네요. 광주 사고 유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과 중대재해 처벌법을 재고하는 건 양립 가능합니다. 최근에 발효된 중대재해 처벌법이 현장 안전을 개선하는 법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략적인 문제점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복됨

2. 기업/경영진 처벌에만 중점

3. 적용 기준이 불명확함


한마디로 "현장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용자/경영자를 조지고 겁을 주면 무서워서라도 안전에 투자를 하고 개선을 하겠지"라는 처벌주의에 입각한 탁상행정으로 만들어진 법입니다. 그마저도 어떤 경우에 어떻게 처벌하겠다 마저 모호해서 현장에서는 뭘 하라는지 모르겠으니 이것저것 해보다가 먼저 걸린 놈들 케이스를 보고 파악해보자 이런 실정이고요. "그래도 이것저것 더 신경 쓰다 보면 전보다 나아지긴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로 인한 비효율과 유무형의 비용은 누가 책임질까요.


갑을병정 구조에서 저희 같은 '병' 중소하청업체에게 갑니다. 중대재해 처벌법 없어도 단가 합리적으로 책정해주고 돈 제때 주고 안전관리비 수월하게 사용하게 하면, 현재 법령을 잘 지키게 하고 관련해서 지원을 더 하거나 돈이 잘 흐르게 하면 개선됩니다. 중대재해 처벌법 관련 공부하면서 드는 생각은 "이럴 거면 이 사업 그만해야겠다"입니다. 중대재해 처벌법이 안전을 위하는 법으로 프레임 되어 있는데요. 악마는 디테일 안에 있습니다.


아마도 지난번 글에서 동영상 캡처한 화면을 보고 윤석열이 중대재해 처벌법에 대해서 재고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부분에 대해서 실제 압박을 받는 입장에서 이 법의 다른 폐해를 이야기하고 싶었나 보다. 후배가 보기에는 중대재해 처벌법은 나쁜 혹은 멍청한 정치인들이 "노동자를 위하는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만든, 선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나쁜 악법이다. 현재의 법, 산업안전보건법이 더 구체적으로 많이 개선되어 왔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더 보완하는 게 맞다고 이야기했다.


단편적이고 전시행정인 법에 고생하는 후배에게 위로도 해 주고 싶지만, 그런 대화 속에 더 중요한 것이 생각이 나서 조금 긴 답변글을 달았다.


OO아.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는 어려움 알려줘서 고맙다. 예전에 토목 공학과에서 박사를 한 한 친구가 말하길 도로 하나 내는데 정말 돈과 땀과 "피"를 깔아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현장 특히 토목 공사에서 인사 사고는 피하기 어려운 숙제인 듯하다.


자동차 업계도 생산 현장이 있어 사고 위험성에 대한 중대재해 처벌법에 대해서 자유롭지는 않아. 작년에 협력 업체 직원 중 한 분이 사망사고가 발생하면서 며칠간 라인이 멈추고 책임 소재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및 교육을 다 다시 하곤 했어. 중대재해 처벌법 공표되면서 회사 내에서 안전에 대한 교육이나 계도가 더 엄격해졌으니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확실히 부담이 되는 법인 건 확실해 보여.


중대재해 처벌법 자체는 네 말대로 처벌 주의에 입각한 탁상 행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네가 이야기한 갑을병정까지 이어지는 도급과 하청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누가 실제 안전을 담보하고 누가 그걸 책임지게 할 건지에 대해서는 디테일이 더 명확해져야 하겠지.


그러려면 오늘 네가 이야기해 준 것처럼 실제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의견을 모아야 할거다. 사고가 발생하는 것 자체는 피할 수는 없지만 사고를 줄이려면 어떤 대책들이 필요한지 확인해야 겠지. 그리고 왜 그런 대책들이 실제로는 적용하기 어려운지 파악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풀고 꼭 지켜야 하는 기본 규칙들을 정하고 그걸 위반한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법이 필요할 거야.


중대재해 처벌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발생했기에 네 말대로 유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려면 중대재해 처벌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봐. 그러나 지난 글에서 내가 윤석열 씨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여기는 건 그가 중대재해 처벌법은 재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 아니야. 개선을 하겠다는 말은 하나도 없었고. "내가 생각할 때는 현재의 법으로도 충분히 관리 가능하다"라고 이야기했거든.

그건 "내 맘대로 하겠다"라고 밖에 들리지 않았어. 중대재해 처벌법 외에도 대부분의 법률적 사안에 대해서 개인적인 판단으로 그 때 그 때 다른 기준으로 운영하겠다는 사람에게는 개선를 위해 디테일을 정하는 공론화는 불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너의 이야기 대부분에 공감하지만 사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어디든 현실은 네 말대로 복잡하고 그래서 법과 기준은 더 디테일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동안 모호한 법과 그걸 자기 편한 대로 악용하는 검찰과 정치권들에 흔들려 왔다. 진짜 악마는 우리에게 필요한 디테일을 거부하고 본인의 기득권을 편의에 따라 악용하는 세력들의 무책임함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답이 없는 선거이지만 같이 술 한잔 하고프네. 곧 보자.


요즘 다시 잡은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탈리아 반도 수준의 국가에서 지중해 전체를 로마의 영역으로 확장한 카이사르가 이를 통치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가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유대인은 종교에, 그리스인은 철학에 그리고 로마인은 법률에 맡긴다고 이야기했듯이 인간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규범을 정의한 법률을 통일하는 것이 여러 나라를 통합한 제국을 통치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카이사르의 이 노력 덕분에 로마는 약 3세기에 걸친 평화로운 제국 시대 "팍스 로마나"를 이루게 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빠르게 변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말 디테일하게 문제 상황을 푸는 기준일지 모른다. 그 기준을 명문화해서 공동의 약속을 만드는 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지만, 진짜 악마는 우리에게 필요한 디테일이 필요없다 이야기하는 기득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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