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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Aug 04. 2022

빈곤 극복을 위해, 함께 존엄하게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 9장 돈과 존엄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경제가 왜 이렇게 어려워졌고 불평등은 더 심해졌는지 살펴보았다. 성장 위주의 정책은 한계에 도달했고, 제로 금리 시대는 인플레이션 위협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무역을 통한 국경을 넘은 자유 경쟁은 경쟁에서 도태되는 산업의 쇠락을 가져왔고 로봇과 AI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빠르게 대체해 가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빈곤의 나락에 빠지게 되고, 불평등은 더 심해져 왔다. 그리고 기후 변화는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


그럼 우리는, 경제학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해결책은 '보편 기본소득'이다. 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상당한 금액의 기본적인 소득(미국의 경우 월 1천 달러 정도가 논의 중이다.)을 일괄 제공하는 이 제도는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고 필요한지는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여러 흩어져 있는 복지 제도들을 통합한다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보편 기본 소득은 벽에 부딪히고 있다. 첫 번째 반대 이유는 굳이 필요 없는 사람들까지 왜 지원해 주어야 하냐는 의견이다. 제한된 예산을 생각하면 일면 이해도 된다. 하지만 일단 여러 가지 조건을 달게 되면, 수급자격을 확인하고 관리 감독하는 절차에 대한 비용이 발생하게 되고, 신청하는 절차가 복잡해져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배제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지원을 받는 것 자체가 빈민층이라고 낙인찍히게 되어 또 다른 차별을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금을 주면 그들은 일을 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며 낭비해 버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개인이 성취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레이건은 작은 정부를 내세우면서 복지는 사람들이 나태하게 한다고 연설했고,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현재 체재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도에서 가뭄으로 피해를 받는 농민과 시카고 남부 빈민가의 젊은이들 그리고 방금 해고된 50대 백인 남성은 모두 그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 자체를 문제로 규정하는 것은 '상황'을 본질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며, 이는 희망이 들어설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나라의 사례에서 현금으로 기본 소득으로 주었다고 해서 낭비해 버렸다는 결과는 없었다. 대부분 의 경우 건강 상태와 교육 수준이 개선되었다.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게 됨으로써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지와 활력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대출도 힘들고 사업의 실패가 두려운 가난한 사람들에 지속적으로 현금을 제공하면 추가적인 소득이 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시도한 일이 실패했을 경우에도 생활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완충망이 된다. 특히 인도 같은 극빈층이 두터운 가난한 나라에서는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초'기본소득 제도가 절실히 요구된다. 저자도 이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실험 프로젝트를 현재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단순한 소득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민들을 대상으로 4인 가족 기준으로 연 만 삼천 달러를 조건 없이 지급받으면 구직 활동이나 일을 그만두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87%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을 하고 싶어 하며, 그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이 목적의식, 소속감, 존엄감을 느끼게 해 주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래 일해 온 일자리를 잃은 경우에는 정말 회복이 쉽지 않다. 힐러리 클린턴이 환경 개선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많은 석탄 기업과 탄광 노동자들이 퇴출되게 할 것"이라고 차갑게 발표했을 때, 석탄 업계 노동자들은 이를 일방적으로 그들의 삶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고 받아들였다. 힐러리는 그래서 사회가 '그들'을 돌봐야 한다고 덧붙였지만 이미 주어인 "우리"와 대상이 되는 "그들"사이는 벌어져 버렸다. 변화하는 경제 상황에서 이렇게 일자리를 잃거나 일자리 자체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가 되어야 한다.


일자리 지원과 관련해서 단순히 실업률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표에만 치중한다면, 뉴딜 정책처럼 공공사업을 벌여서 일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면 된다고들 생각해 왔다. 그러나 단순한 경제적인 수입이 문제가 아니라, 개별 노동자의 자존감 문제라면 더 신중하고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프랑스의 "함께 일하고 배우기- TAE (Travailler et Apprendre Ensenble)" 프로그램은 참고할 만한 사례이다. 극도의 빈곤이 열등함이나 무능함의 결과가 아니라 체계적인 배제의 결과라는 신념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일자리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른 문제들 (가령 육아나 가족 문제, 건강 등)이 다 해결되고 난 다음에, 즉 '준비가 된' 다음에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회복 과정의 일부라고 본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여러 지원도 함께 고민해 주고 정서적, 사회적, 재정적 지원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창업 지원 프로그램인 '영 크리에이터'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전통적인 취업 지원은 상담자가 방문한 젊은이들의 성향과 데이터를 분석해서 그리고 그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 크리에이터' 회의에서는 찾아온 젊은이들 본인이 제안하는 프로젝트에서 출발하고 그들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왜 그 일이 하고 싶은지, 그리고 관련해서 자신의 삶의 계획을 내담자가 이야기하면 상담사는 성공에 필요한 자질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고 동시에 꿈을 이루기 위한 다른 여러 가지 길들이 있음을 조언한다. 실제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오히려 자영업보다 취업으로 선회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결과를 보면, 취업을 못해 좌절하는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고 각자에 맞는 길을 함께 찾아 주는 도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존중이 출발점이다. 사람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모멸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체계 때문에 어쩔  없이 나락에 빠진 극빈층은 원하지 않는 도움에도 감사해야 하는 사이에 존엄을 강탈당하고, 이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일종의 '인종주의' 이어 진다. 그동안 많은 복지 정책들이 정작 지원을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러한 정책들은 종종 실패했다. 이제 공공 정책은 '' '존엄' 사이의 긴장 관계를 핵심적으로 고려해서 설계되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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