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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Jul 22. 2022

자동화가 아니라 잘못된 정책이 절망과 분노를 가져왔다.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 7장 자동 피아노

1952년에 출간된 자동 피아노 - Player Piano라는 작품은 대부분의 일자리가 사라진 디스토피아를 묘사하고 있다. 기계가 스스로 작동해서 생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 " 쓸모없는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 기술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이 창출하는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파괴함으로써 많은 노동자들이 실직하고, GDP 중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돌아가는 몫을 줄일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컴퓨터로 대변되는 1차 정보기술 혁명을 통해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업무를 하는 일자리는 사라지고 빠른 판단력과 주도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만이 살아남았다. 


기계를 멈춰 열어라 역사를.


비슷한 경험을 우리는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산업 혁명으로 기계가 노동자들을 대체하게 되면서 1755년에서 1802년 사이에 영국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임금은 반토막이 났고, 찰스 디킨스가 묘사했던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이후에 영국은 산업 혁명이 다른 요소들의 생산성을 높여 주었고 그 요소들을 생산하는 새로운 노동자들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극복했었지만, 오늘날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파도로 낮아진 노동 수요가 앞으로도 반등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전체 일자리 개수가 줄지 않더라도 현재의 자동화 파도는 그 기계들을 돌리는 소프트웨어를 짜는 프로그래머 같은 매우 고 숙련인 노동자와 그런 고임금 노동자들의 애완동물을 산책시켜주는 완전히 비숙련인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를 늘릴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이들 간의 임금 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자동화를 추진하는 데는 제도의 영향도 크다. 일단 로봇은 세금을 내지 않고, 자동화에 대한 투자에 대한 세금 혜택도 많다.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업무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 개발보다는 '기존의'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한 AI나 빅데이터 기법 개발에 더 집중하기도 한다. 이 모든 변혁들은 사실 피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정책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1980년경 미국과 영국은 성장의 둔화와 일본의 추격에 위기감이 팽배했다. 그리고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은 1970년대 말 슬럼프의 원인이 강성노조와 높은 세금과 규제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성장 위주의 정책들을 펼치기 시작한다. 소위 '레이거노믹스'도 성장에는 불평등이라는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이 먼저 이득을 얻으면 차차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거라고 낙관했다. 

이 선택의 결과는 명확하다.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부의 비중은 22%에서 40%로 증가했고, 노동자의 임금 상승세는 멈추었다. 테크놀로지는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과 같은 거대 기업의 시장 지배력을 늘려서 수요가 세계화되고 브랜드의 중요성을 더욱 커졌다. 많은 업종에서 시장 점유율이 한 두 개 기업에 집중되는 추세이다. 슈퍼 스타 기업의 지배력이 커지면서 그 회사들의 주주들은 신이 났겠지만 노동자의 임금은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했고 경쟁에서 도태된 같은 분야의 다른 노동자들의 삶은 오히려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좋은 기업과 나쁜 기업의 위계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런 불평등은 금융 분야의 지나친 보상이나 스톡옵션과 같은 인센티브 제도를 통해 가속화된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세금을 올린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파나마와 같은 세금 회피처를 찾을 것이고, 세상에는 그런 돈을 원하는 작은 나라들이 넘쳐 난다. '매우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부유세를 납부하도록 하면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조정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종부세가 거대한 저항에 부딪혔듯이 증세의 부담을 감당하고자 하는 정치인은 좌파든 우파든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계층 이동성은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과 American Dream이라는 신화가 섞이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것이 적어도 일부는 그들의 책임이라고 믿고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정부의 노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가 여전히 제공하고 있(다고 그들이 믿고 있는)는 기회를 붙잡지 못한 자기 자신을 책망하거나 자신의 일자리를 훔쳐 간 누군가를 찾아가 비난하는 수 밖에 없다. 절망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가장 낮은 세율을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불평등 지수가 늘고 절망의 죽음이 늘어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인 듯하다. 경제 성장의 이득이 대체로 소수의 지배층에게만 들어간다면 성장은 사회의 번영이 아니라 사회적 재앙을 낳는 기재가 된다는 걸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 극심한 불평등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바로 지금 필요하다. 이미 많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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