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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May 11. 2023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천천히 달리기

외롭지만 자유롭게 스스로에게 몰입하고 지낸다.

복직한 지 네 달이 지났다. 일 년의 휴식으로 모든 것이 다 제자리를 찾고, 나도 다시 현업의 커리어를 이어가는 소설 같은 상황은 현실에는 없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온 말처럼 인생은 정말 초콜릿 박스 같아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내는 많이 건강해졌었다. 그러다가 일교차가 심하던 어느 날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쑤심과 피로감이 몰려왔다. 예전처럼 불안하지도 슬픈 마음이 들지도 않는 상황에서 순전히 몸이 아픈데 어디가 잘못돼서 아픈지는 모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돌다가 이제 대학병원에 와서 검사를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결론이 날지. 해결은 될지. 잘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첫째 딸은 사춘기를 진하게 앓고 있다. 북한도 무서워한다는 중2.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은 많아졌다. 학교 다녀오면 피곤해하고, 공부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과외를 계속 같이 하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들어주다 보면 나도 지친다. 그래도 아빠니까 버터내야 한다.


회사에서는 힘들기보다는 외롭다. 프로젝트 리더라는 직함은 그대로 있고, 회사 전체의 정책을 다루는 일을 맡게 되었지만 팀원은 없이 홀로 진행해야 한다. 얼마 전 구매에 있던 머지막 동기도 회사를 떠났다.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오늘은 어느 팀에 껴야 하나 눈치를 봐야 하는 팀원 없는 팀장의 삶은 편하지 않다.


그런 압박들로 일찍 깬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다섯 시 반이면 눈이 뜨인다. 다시 잠들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일어나서 핸드폰 보고, 책 보고, 스트레칭하고 그러고 일상을 시작하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TV 프로에서 달리기로 출근하시는 교수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수술과 빡빡한 일정에 바쁜 사이에 김유정 교수님은 직장까지 10km를 매일 뛰어서 출근하셨다.


자기가 뛸 수 있는 제일 늦은 속도로 달려 보세요.
그러면 달리는 순간이 정말 행복해질 거예요.




스치듯 보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이야기가, 가족들이 다 지쳐서 쉬고 있고 혼자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선 일요일 오후에 문득 생각이 났다. 그리고 집 앞 호수 공원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달릴 수 있는 제일 늦은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제법 쌀쌀했던 기운을 몰아낼 만큼 따뜻한 햇살 사이로 바람이 불고, 그 바람결에 솜털 같은 꽃씨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핸드폰도 없이, 이어폰도 없이, 얼마나 뛰면 되고 또 걸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어플의 방해나 음악도 없이 그저 혼자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아주 느리지만 분명히 뛰었다.

집에서 호수 반대편까지 도착하고 나니 십 여분, 잠시 스트레칭했다가 다시 오던 길을 돌아서 똑같이 제일 느린 속도로 뛰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삼십 분의 혼자만의 시간이 내게 말했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지금 힘든 시간들도 다 지나갈 거라고."


그 뒤로 새벽에 눈을 뜨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만의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선다. 열심히 빠르게 걷는 어르신에게 따라 잡혀도 상관없다. 어차피 길은 내가 가는 길. 내게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도 그렇다. 어차피 인생은 힘들고 외로운 것. 중요한 건 나의 연봉이나 성과나 성장의 정도가 아니다. 진짜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느리더라도 더 나은 나로, 나다운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유롭게 나만의 속도로 스스로에게 몰입하면서 지내는 법을 나는 이 외로움 속에서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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