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라는 틀을 벗어나서 진짜 나는 무엇을 하고픈 사람인지 정해야 한다.
회사를 떠나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직함입니다. '저는 어느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XXX 팀장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할 틀이 없어져 버리는 거죠. 월급을 받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나는 OOO 하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제가 20여 년을 해 온 일들이 한순간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동안 애써온 과정은 제 안에 고스란히 있습니다. 제일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면서 부사장까지 올랐다가 퇴직하고 책방을 열어 운영하고 계시는 최인아 님도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는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광고를 기획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예전이나 책방을 운영하는 지금도 본질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만의 태도는 그대로라고 말이죠. 그래서 일단 제가 어떤 일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도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큰 아이 수학을 가르쳐 줄 때면 도전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품질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고 부작용을 검증하고 적용해 나가는 과정이 참 의미 있었습니다. 초기 엔지니어 시절에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부딪히는 기술적인 한계를 어떻게 우회할 수 있을지를 오랜 시간 고민했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 경험이 쌓이고 시야가 좀 더 넓어지니까 문제를 보는 관점도 달라지더군요. 공학에서는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 하지만, 실제 회사에서는 기술적인 문제도 결국에는 인력과 돈과 시간의 문제로 귀결이 됩니다. 인력과 시간이 부족한 문제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과 자원을 더 투입하면 될 때도 많았습니다.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 오면서 목표를 세우고, 납기를 지키기 위한 중간 단계를 계획하고, 진척도를 확인하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부분을 보완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일을 관리하는 일도 잘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문제를 푸는 과정은 늘 벽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남은 자원을 거기에 집중하려면 중요하지 않은 나머지는 포기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막다른 길에 닿았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로 상황을 전환할 수 있으면 그것만큼 짜릿한 일이 없지요. 돈과 시간이 늘 부족한 현장에서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일처리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뿌듯해했던 시간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막다른 길을 열어 주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그냥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에 몰입해서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관점을 바꾸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고 함께 토론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들도 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들과 토론하면서 답을 같이 찾아가는 과정을 저는 좋아합니다. 가능성은 없어 보여도 편하게 의견을 내면서 시도해 보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회사를 떠난 배경에는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런 고민을 함께 자유롭게 하기에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답답함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전 회사는 자동차 회사치고는 규모가 작았고, 외국의 본사의 정책과 경제 상황에 따라서 부침이 많았습니다. 연봉차가 나서 사람들이 나가면 분위기는 가라앉고 떠난 사람의 일은 남은 사람들이 해야 했었죠. 그런 환경에서 다독여 가며 일을 해 나가려면 사람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들여다 보고, 그걸 충족시켜 주기 위해 의미를 찾는 작업을 꾸준히 해야 했습니다. 중간중간받은 코칭 교육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은 제가 무언가를 배우고 정리하고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는 겁니다. 중국에 다녀와서 회사 내 세미나에서 전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고, 브런치와 페이스북에서 자동차에 대해 모르는 걸 물어보는 사람들의 답을 정리해 줄 때도 그랬습니다. 꾸준히 그렇게 쌓인 글들이 책이 되고, 책이 연이 되어서 강연도 하게 되면서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 볼 용기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퇴사를 하기 전인 연초에 최인아 님 책을 읽고 저도 저 자신을 브랜딩해 보았습니다. 회사라는 틀을 벗어나서 진짜 나는 무엇을 하고픈 사람인지 고민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제 브런치의 프로필처럼 "(새로운 변화의 파도를 타고) 먼저 공부하고 고민해서 사람들과 나누는 기획자"라는 말로 정의가 되더군요. 무엇을 공부하느냐에 대해서는 새로운 것이면 좋겠고, 그것이 늘 지금과 이어지는 모습이 제 고향 부산의 바다의 파도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강연팀 파도"라고 법인 등록도 되지 않고 팀원도 없지만 저만의 조직을 만들고 명함도 만들었습니다.
퇴사 이후에 기고하고 있는 매체에서 자동차 업계 사람들을 만나려면 필요할 거라고 전문위원이라는 직함과 함께 명함도 챙겨 주셔서 제 지갑에는 두 개의 명함이 들어 있습니다. 앞으로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정한 브랜딩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한번 잘 살아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