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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도 자동차 회사와 함께 개발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가성비를 달성하려면 중간 단계를 줄여야 한다.

by 이정원

자동차 회사는 기본적으로 원가를 낮출수록 수익률을 확보할 수 있다. 공급망을 통해 부품을 납품받는데 이 단가에는 부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연구개발비와 생산 공정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가 기술적으로 우월하고 대체제가 없을수록 부품 회사는 기술료 명목으로 높은 단가를 붙이고 자동차 회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비용을 내면서도 해당 부품을 적용해서 차를 만들어야 한다. 내연기관 시대에 ECU가 그랬고, 디젤 초고압 인젝터가 그랬다. 보쉬나 덴소, 컨티넨탈, 지멘스 같은 글로벌 부품 기업들이 자동차 전체 생산량을 좌지우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동차 회사 입장에서는 이런 비용들을 부담하다 보면, 점점 본전 생각이 나게 된다. 차라리 내가 스스로 개발하면 이런 기술료를 굳이 저런 부품 회사들에게 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자회사를 세우고 ECU나 인젝터 같은 핵심 부품들을 직접 내제 화하겠다는 시도를 안 해 본 기업이 거의 없다. 그러나 대부분 일정 수준에서 성공하지만 다음 레벨의 배기 규제나 OBD 규제가 들어오면 추가적인 기능들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기술 기업들에게 의존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곤 했었다.


그러나, 전기차 시대에는 이런 사이클이 없어져 버렸다. 2018년 테슬라 모델 3가 출시되면서 전기차 붐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전기차 생산의 주된 키는 핵심 부품인 배터리가 쥐고 있었다. 충분한 주행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누가 더 에너지 밀도가 높은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는지가 목표였고, 늘어나는 전기차 수요에 비해 배터리를 생산하는 용량이 부족하면서 새로운 배터리 공장을 지어 달라고 투자하겠다는 자동차 회사들이 번호표를 들고 기다려야만 했다. 갑과 을이 명확한 상황에서 배터리의 단가도 높고 수익률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

미국 배터리 2022.jpg 2023년에 미국에 진출한 다양한 배터리 업체들. 기업들이 나서서 지원을 세일즈 하던 호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영원히 푸를 것만 같았던 배터리 시장도 전기차 수요 감소와 중국 배터리 회사들의 대두로 순식간에 레드 오션이 되어 버렸다. 대안이 충분한 상황에서 자동차 회사들은 배터리 단가도 공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거기에 예전에 ECU 회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예 배터리 생산에 대해서도 내재화 작업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차의 안성 배터리 연구소에 짓고 있는 생산 라인이다.


안성에 지어지는 현대차의 배터리 연구소에 기획 초기에는 생산 공정 등을 테스트해 볼 프로토 생산 라인 정도가 구성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파우치형 배터리 생산 라인으로 시작했던 계획도 생산 라인을 4개로 늘리고 각형 2개, 파우치형 2개로 나누어 진행한다고 한다. 전체 생산 용량 규모가 1 GWh 이면 아이오닉 5를 만 오천대분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참고로 2024년 아이오닉 5의 내수 총판매량은 14,212 대였다.


배터리 모뮬1.jpg
모듈2.jpg
모듈3.jpg 현대차가 자체 개발 중인 배터리 모듈 생산 공정


현대차가 이렇게 배터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배경에는 BYD의 독주가 숨어 있다. 애초에 배터리 회사였던 BYD는 배터리와 전기차를 한 묶음으로 설계 생산하면서 각종 비용이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한국에도 진출한 BYD의 저가형 전기차가 가능한 것은 LFP를 위시한 셀 자체의 개발 역량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차체 자체를 배터리에 최적화하는 노하우도 숨어 있다. BYD의 가성비를 따라잡으려면 전기차를 만드는 모든 공정 전체 비용을 절감해야 하기에 원가의 40%를 차지하는 배터리 내재화는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 셈이다.


당장 현존하는 전기차뿐 아니라 차세대 배터리 기술에 대해서도 자동차 회사가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BMW는 CATL과 합작으로 얼마 전 성능이 크게 개선된 6세대 배터리를 공개했다. 기존의 CATL이 추가하던 각형이 아닌 대형 원통형 배터리로 Cell to Pack 기술을 적용한 것은 개발의 주도권을 배터리 회사보다 자동차 회사가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에너지 밀도를 높이고 800V 충전도 가능하게 해서 충전 속도도 30% 향상한 이번 버전은 이미 C 샘플 테스트 중으로 내년이면 새로운 모델에 적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BMW 6th gen.jpg BMW가 CATL과 함께 개발한 6세대 배터리 기존 대비 충전 성능이 30% 좋아졌다.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대한 소식도 요즘은 자동차 회사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Benz는 Factorial battery와 함께 양산에 들어갔고 현대차도 관련이 있다. 혼다나 닛산도 자체 개발 과정에 들어갔고 GAC, NIO 같은 중국 업체들도 배터리 회사들의 지원을 받아 차량 테스트에 들어갔다. 대부분 2026년 늦어도 27년까지는 시장에 전고체 배터리가 장착된 차를 출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어차피 차로 현실화되어야 가치가 생기는 전기차 배터리의 특성상 자동차 회사와의 협업 없이는 규모를 늘리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자동차 회사들의 변화는 배터리 회사들에게는 위기다. 자동차 회사가 개발과 생산 공정까지 관여하게 되면 배터리 회사들은 자동차 회사가 개발한 배터리를 규모에 맞게 양산해 주는 OEM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기술적 우위가 사라지면 영업 이익은 제한되고 다른 경쟁사들의 진입은 쉬워진다. 중국 배터리 회사들에 이어 자동차 업체까지 갈수록 배터리 회사들의 밥그릇에 도전하는 신규 세력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시장 점유율과 공장 가동률을 떨어지고 있는 국내 3사에게는 큰 위협이다.


개발 시기도 늦고 개발 과정에서 협업도 불편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지금이라도 자동차 회사와의 적극적인 협업이 필요해 보인다. 그냥 기술을 완성한다고 해서 알아서 찾아오기에는 개성 넘치는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차 만드는 과정에 손발을 맞추는 것보다 선행 단계에서 함께 할 파트너를 찾아서 공동 운명체를 이루면 적어도 다 만들고 나서도 상품화를 해 줄 자동차 회사를 찾아야 하는 위험은 피할 수 있다. 이제는 혼자 개발하는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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