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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를 나누고 덩치를 줄이며 생존을 고민하는 르노

잘하는 걸 원하는 파트너와 공유하면서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by 이정원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서 수입차라고 하면 크고 럭셔리한 벤츠, BMW, 렉서스 같은 브랜드들이 먼저 떠오른다. 차가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다는 인식이 강한 내수 시장에서 실용적이고 디젤 베이스의 작은 차를 만드는 유럽 브랜드가 설 자리는 없다. 그나마 IMF를 통해 한국 자동차 시장에 M&A로 삼성 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이름을 알게 된 프랑스 자동차 회사 르노는 르노삼성자동차라는 이름으로 먼저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브랜드였지만, 르노는 프랑스에서 1899년에 설립된 100년도 더 된 기업이다. 전 세계 최초로 세단형 자동차를 만들고 직렬형 변속기를 기반으로 한 성능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세계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 히틀러 정부에 협력했다가 종전 후에 재판에 넘겨져서 프랑스 정부 소유로 국영화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영 기업들이 그러했듯이 르노도 느슨하고 안정 위주의 경영으로 유럽에서 서민용 차를 만드는 로컬 자동차 회사 정도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Renault RC4.jpg 1960년대 유행했던 르노의 4CV 차량 - 프랑스의 국민차로 불린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민영화가 되면서 서서히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다. 특히 우리에겐 IMF로 알려진 1990년대 외환 위기에 공격적인 M&A에 나서면서 우리나라의 삼성자동차를 인수하고, 일본의 닛산 자동차의 지분을 확보하면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로 세계 3위의 규모로 덩치를 키웠다. 닛산에 회장으로 취임한 카를로스 곤 회장은 철저한 구조조정 와 공격적인 투자로 닛산을 부활시키면서 얼라이언스를 성장을 이끌었다.


카를로스 곤 회장.jpg 2000년도부터 20년 동안 철권통치를 해 왔던 카를로스 곤 회장


파트너인 닛산이 북미 시장을 기반으로 중대형 차량에서 강점을 보이는 반면, 유럽 시장에서 소형 디젤 차량에서만 선전하고 있던 르노는 전기차를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열쇠로 보았다. 2010년부터 다양한 실용적인 전기차를 선보인 르노는 테슬라 모델 3가 판매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전기차를 팔던 브랜드였다. 우리나라에도 SM3 EV, ZOE, Twizzy 등 몇몇 모델들이 소개되긴 했지만 전기차라면 럭셔리 이미지가 강했던 국내 정서와는 맞지 않아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2020 Renault ZE sales.jpg 2019년까지 28만 대 이상을 판매한 유럽 내 전기차 1위 기업이었지만 곧 추월당한다.


이렇게 유럽 시장에만 적합한 모델의 약점은 코로나 사태로 더욱 큰 위기로 다가온다. 그동안 얼라이언스 체제에서 캐시 카우 역할을 해 주던 닛산은 일본 임원들의 쿠데타로 카를로스 곤 회장이 구속 추방되면서 르노의 지배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코로나 사태로 유럽 전체가 봉쇄되는 동안 유럽 자동차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으면서 유럽 시장에만 의존해 있던 르노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한 때 얼라이언스 기준으로 600만 대를 넘게 판매하던 회사가 당장 150만 대를 팔기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르노가 선택한 방식은 회사를 나누어 분야별로 특화하는 것이다. 기존의 르노 브랜드로는 시장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르노는 기존의 내연기관 차를 생산하는 역할은 본사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기차를 전담 생산하는 AMPERE와 렉서스 같은 고급 브랜드를 만드는 ALPINE으로 생산 주체를 나누었다. 파워트레인 연구 조직도 기존 조직을 내연기관을 연구하는 HORSE와 전동화를 추진하는 POWER로 나누고, 그 외 충전, 배터리 재활용, 차량 공유 등 TaaS 기능을 전담하는 MOBILIZE라는 자회사도 설립하게 된다.


Renalution2.jpg 르노는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회사를 전문 분야로 나누는 전략을 시작했다.


이런 분사 전략은 작아진 회사 규모를 채울 파트너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오랜 시간 함께 얼라이언스였지만 지금은 갈라선 닛산도 르노 본사의 지분은 줄이고 있지만 전기차를 전담하는 AMPERE에는 추가로 투자하면서 성과를 공유하려 하고 있다. 닛산 이외에도 미쓰비시, 발레오, LGES 등 다양한 파트너들과도 함께 하면서 새로운 플랫폼을 만드는 부담을 나누고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의 수를 늘리고 있다.


전통적인 내연기관 엔진도 새로운 짝을 찾고 있다. 1.6L 디젤 엔진은 벤츠와 개발해서 공유한 르노는 최근 전동화와 함께 대세가 되고 있는 경쟁력 있는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에는 자회사인 HORSE를 내세워 중국의 지리자동차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와 공동 개발을 하기로 했다. 파트너들 입장에서는 전체 자동차 회사의 지분에 참여하는 것은 경영 실적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분사를 통해 전동화, 내연기관 등 필요한 영역만 직접 투자가 가능해지면서 오히려 협업의 영역은 넓어진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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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er renault1.jpg 내연기관을 담당하는 HORSE와 전기차를 담당하는 AMPERE - 직관적인 조직 이름이 인상적이다.


가장 독특한 사업을 진행 중인 곳은 MOBILIZE다. 서비스로의 자동차산업이라는 뜻의 VaaS, Vehicle as a Service를 앞세운 MOBILIZE는 전통적인 자동차 산업에서 파생되는 영역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차를 사는 금융부터, 보험, 유지 보수 등 기본적인 자동차 관리는 기본이다. 여기에 전동화가 진행되면서 새롭게 요구받고 있는 충전 서비스와 차량 공유, 라스트 마일 모빌리티 등 다양한 서비스를 마치 스타트업처럼 진행 중이다.


Mobilize GRID.jpg MOBILIZE에서 추진하는 쌍방향충전기를 이용한 스마트 그리드


특히 MOBILIZE가 주목하고 있는 곳은 전기차를 중심으로 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다. 쌍방향으로 충전과 방전을 할 수 있는 충전기를 전기차에 연결해 두면, 원자력 발전 등으로 전기가 남아돌아 전기료가 저렴한 심야에는 전기차를 충전해 두었다가 전기 수요가 많은 낮에 쌓여 있는 전기도 꺼내어 쓰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전기차를 주차하고 충전기와 연결해 두었을 뿐인데, 전기료의 차이만큼 돈을 벌고, 부족한 발전 용량도 극복할 수 있는 스마트 그리드 시스템을 실현하고 있다. 르노 전기차와 전용 충전기의 판매라는 부수입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전기차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회사답게 오래된 폐배터리 활용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10여 년을 주행하고 폐차되는 전기차에서 탈거한 배터리를 모아서 ESS를 만들어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서 일반 전기로 에너지를 쌓아 두었다가 전기차가 오면 급속 충전하는 방식의 충전소도 유럽 곳곳에 설치하는 중이다. 환경도 지키면서 에너지도 순환하고 전기차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 결국 전기차를 많이 보급할 수 있다는 것을 르노는 MOBILIZE의 전략으로 보여 주고 있다.


renault-ev-battery-recycling-blogimage.jpg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를 재활용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다.


이런 분야별 게릴라 식 운영은 르노 본사 자체의 경쟁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한 때 파산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고 다양한 협업을 통해 본사의 매출과 흑자 규모를 크게 늘렸다. 다만, 이런 전략들이 글로벌 경영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코로나 시기에 르노 그룹에 구제 금융을 지원했던 프랑스 정부는 지원한 자금을 자국 내 프로젝트에 우선 사용하도록 제한을 두기도 했다. 그렇다고 르노 본사에서 만든 모델을 가져와 팔기에는 유럽과 한국 시장의 성향 차이가 너무 크고 운송비와 관세를 고려하면 가격 경쟁력도 없었다.


Grand Koleos.jpg 르노 코리아가 2024년 출시한 그랑 콜레오스 - 한국 시장을 위한 모델로 지리와 공동 개발했다.


크고 조용하고 연비 좋은 차를 선호하는 한국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르노코리아는 새로운 모델의 출시가 절실했다. 이에 르노는 한국 시장용 모델에 대해서는 지리 자동차와 지분을 나누면서 공동 개발하기로 하고 2024년 그랑 콜레오스를 시장에 출시한다. 그렇게 나온 새 모델은 다행히 시장에서 호평을 받아 다음 프로젝트를 이어갈 명분과 자금을 확보했지만 유럽 본사가 적극적으로 투자도, 개입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르노 코리아의 생존을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모두들 다가올 전기차 시대에 덩치를 키울 생각만 하는 시대에 르노는 오히려 회사를 나누고 사이즈를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잘하는 걸 원하는 파트너와 공유하면서 시너지를 만들어 가며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같은 얼라이언스의 파트너로 실제로 300만 대 이상을 팔던 닛산이 실적 악화로 위기를 겪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규모보다 실리를 택한 르노의 전략은 성공적이라고 평할만하다. 작아서 얻을 수 있는 유연함.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은 자동차 시장에서도 100년을 넘게 유지해 오고 있는 르노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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