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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인정하고 잘하는 파트너를 찾아 진화하는 폭스바겐

디젤을 대신할 친환경 이미지를 다시 찾기 위해 분투 중이다.

by 이정원

이미 전 세계에서 자동차를 가장 많이 만들고 있는 회사들은 사실 변화가 그리 달갑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점이 세상에 계속 유효하면서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 최대한 유지되길 바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차를 파는 도요타는 그래도 하이브리드라는 전동화까지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적합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자동차 회사들보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전기차로 전환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세계 2위인 폭스바겐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24년도 판매 순위. 폭스바겐 그룹은 도요타에 이어 2위지만 9백만 대 아래로 추세는 낮아지고 있다.


바로 2010년대에 있었던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때문이다. 친환경 디젤이라며 연비 좋은 디젤 차량으로 천만대가 넘는 매출을 올리며 전 세계 1위를 달리던 폭스바겐은 경쟁사들보다 더 뛰어난 연비를 달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배기가스를 정화하는 효과가 있는 EGR을 인증 과정에서 진행되는 시험 주행 모드에만 작동하도록 조작한 것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후 각가지 소송전이 일어나면서 막대한 벌금을 내야 했고 추락한 브랜드 이미지는 판매량 감소가 이어졌다. 재발 방지를 위한 실시간 배기가스 측정법 도입 등 인증 프로세스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폭스바겐 디젤 게이트. 친환경 디젤이라는 명성이 무너졌다.


무엇보다도 높은 연비를 내세우며 친환경 이미지를 제고했던 디젤 엔진 자체에 대한 시장의 관심도 급속도로 얼어붙게 되면서 폭스바겐으로서는 디젤을 대체할 새로운 동력원이 필요해졌다. 마침 테슬라가 모델 3으로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열면서 폭스바겐은 디젤 다음 세대로 전기차를 택했다. 2019년 30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를 결정하고 스케이드 보드 타입의 전기차 플랫폼 MEB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폭스바겐의 MEB 플랫폼 - 여러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꽤 안정적인 시스템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MEB 플랫폼 개발은 생각만큼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플랫폼을 구동하는 통합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다며 CARIAD라는 조직을 만들었지만 작고 집중된 형태로 시작하는 대신 폭스바겐, 아우디, 포르셰의 직원들이 각자의 프로젝트와 함께 이동했고, 협력업체와 자회사 인력까지 계속 합류하면서 조직은 순식간에 수천 명 규모로 불어났다.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 소프트웨어 조직을 통해 중복 개발을 없애고 브랜드마다 제각각이던 시스템으로 인한 혼란을 해소하겠다고 했지만 명확한 개념도, 역할 정의도, 실질적인 권한도 없었다.


비대해진 조직 사이에서 각 브랜드들마다 원하는 기능이 다르다 보니 필요한 예산이 눈덩어리처럼 불어났다. 덕지덕지 추가된 기능들은 개발 과정에서 다양한 품질 문제를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차량의 출시는 계속 지연되었다. 이를 진두 지휘해야 하는 리더 자리에 기존에 내연기관 개발하는 사람들을 두면서 IT 기업에서 필요한 신속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나온 결과물도 전기차의 기본 성능인 충전 속도와 주행 거리 측면에서 다른 플랫폼들에 비해 떨어지고, 블루투스 연결이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고장이 자주 나는 등 시장의 악평을 듣게 된다.


CARIAD 소프트웨어 그룹이 진행한 폭스바겐 그룹 소프트웨어 통합. 리더십 부재로 문제가 많았다.


이렇게 혹독한 비평을 받은 폭스바겐은 실수를 인정하고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체적으로 개발한 전기차 플랫폼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중국 합작회사들의 노하우를 받아들였다. 중국 전기차 전문 기업인 XPENG과 차량 공동 개발에 나서고 FAW, JAC 같은 회사에서 개발한 전기차 시스템도 도입했다.. 2024년도에는 아예 그룹의 전기차 개발 센터를 중국에 열고 중국 중심의 CEA (China Electronic Architecture)로 시스템을 재구성하고 있다.


여러 외국 자동차 회사들이 중국에서 실패하고 탈출하는 사이에 오히려 폭스바겐은 개발의 중심을 중국에 두고 있다.


크고 럭셔리한 차량보다 골프처럼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차량을 만들어 시장을 공략했던 폭스바겐의 DNA는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전기차 플랫폼을 만나면서 제대로 시너지를 만들고 있다. 그룹 내 저가 브랜드인 SKODA의 Elroq는 유럽에서 중형 전기차 중 탑 5에 오르는 실적을 거두었고, 조금은 단순하지만 기본에 충실한 ID.4를 시작으로 ID.3, ID.5를 출시하더니 2027년에는 ID.Every1이라는 소형 전기차도 출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2만 유로로 구매할 수 있는 ID.Every1으로 폭스바겐은 다시 국민차의 지위를 노리고 있다.


SKODA의 Elroq과 2027년 출시예정인 ID.Every1


이런 노력들은 실적으로도 이어졌다. 여러 품질 문제로 2024년에 주춤했던 폭스바겐 그룹의 판매량은 2025년 들어 다시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등장과 함께 높아진 관세 장벽으로 지역 내 브랜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세로 비싸진 중국 전기차와 비호감으로 전락한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 대신 폭스바겐 전기차를 찾는 소비자가 늘었다.


폭스바겐 그룹의 전기차 실적은 2024년에 주춤했지만 2025년 들어 급 상승하고 있다.


이런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한 준비도 꾸준히 하고 있다. 전기차 다음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자율 주행 기능에 대해서도 스스로 개발하기보다는 다양한 업체들과의 합작을 통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자동차 공유 업체인 우버와 공동으로 자율 주행 기능으로 운영되는 ID.BUZZ라는 소형 승합차 개발을 시작해서 2027년에 미국에서 출시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한번 개발에 성공하면 그 노하우는 자연스럽게 그룹 내 다른 모델들에게도 공유될 것이다.


우버와 합작으로 개발 중인 자율 주행 승합차 ID.Buzz


내연기관에서 독보적인 디젤 기술로 자동차 산업의 큰 축을 차지하던 폭스바겐은 한 때 전 세계 1위였지만 디젤 게이트로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됐다. 대안으로 선택한 전기차 개발에도 기존에 하던 대로 하다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 재정적으로도 어려워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 내 공장 3곳을 폐쇄한다며 노조와 대립하기도 할 만큼 위기를 겪기도 했다. 기존의 위치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다.


그러나 폭스바겐은 실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이 부족한 점을 채워 줄 수 있는 파트너들을 찾아 손을 잡고 체질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국제 정세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운도 좋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대안을 시장에 준비할 수 있었던 폭스바겐의 노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결국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진리를 수십 년간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의 1-2위를 지켜온 회사의 행보에서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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