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환 님의 '기억의 미래'를 읽고
아내는 기억력이 좋다. 그녀는 대학교 때 있었던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끔은 그 시절 누가 누구랑 연애를 했는지 당사자들 앞에서 끄집어내어 분위기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일이 한편에 저장되어 있다가 떠오르면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본인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외우는 일이 익숙해서 그렇다고 겸손해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고 이야기하고 바로 "활생사의 운로기슬"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남다른 머리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을 기억하고 이걸 존재하지 않는 활생사의 운로기슬이라고 되살리는 과정에는 기억과 상상이라는 과정이 숨어 있다. 일생을 뇌와 신경을 연구해 온 정민환 교수님의 "기억의 미래"는 우리 뇌 속에서 어떻게 기억은 저장되고 그 기억들이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상상을 만들어 내는지를 차분하게 알려 주고 있다. 해마나 전전두피질 같은 전문 해부학 용어들이 나오고 여러 이름의 신경망들에 대한 설명이 너무 전문적이라는 느낌도 있지만 교수님은 차근히 그 의미를 하나씩 짚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은 경험한 내용을 해마를 통해 기억한다. 그렇게 저장된 기억들은 비슷한 상상의 재료가 된다. 마치 한번 가본 맛집을 다시 찾아간다고 생각해 보면 기억에 남아 있는 경로들을 어렴풋하게 다시 떠올리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해마를 거쳐 기억이 저장되는 회로를 재조합해 새로운 것을 상상해 내는 능력 덕분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특별한 종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강화하려면 많이 경험해 보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경험하고 자고 멍 때리는 시간에 자연스럽게 뇌 안에서 기억들이 재 조합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면 뇌는 알아서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상상을 하고 그런 상상이 모여 혁신이 만들어진다.
요즘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이야기도 흥미로왔다. 인간의 뇌의 구조를 모사해서 개발되고 있는 지금의 인공지능은 사실 오래전부터 비슷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었고, 강화 학습하는 수만 겹의 신경망 학습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GPU 같은 기술이 등장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성능이 향상되는 특이점에 우리는 서 있다. 1000억 개의 신경세포와 100조 개의 시냅스를 지닌 복잡한 뇌를 질적으로는 조악하게 흉내 냈지만 대신 그 결함을 심층신경망의 층수와 엄청난 학습량과 속도로 메우고 있는 샘이다.
그러기에 한계도 명확하다. 빌게이츠가 언급한 것처럼 요청에 맞추어 답은 만들어도 왜 그 답이 중요한지에 대한 맥락은 아직 스스로 만들지는 못한다. 게다가 LED 전구 한 개에 필요한 에너지면 충분한 뇌와 달리, AI는 엄청난 전력을 소모한다. 모든 차가 전기차가 될 수 없듯이 모든 업무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할 것인지 모든 분야에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기에 뇌과학자의 담담한 제언이 크게 와닿았다. 결국 인공지능이 못하고 우리는 할 수 있는 것.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깊게 통찰하고 진짜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고 스스로 자기 반성하면서 생각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길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전에 일단 그들이 흉내 낸 나부터 이해하고자 한다면 찾아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