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은 회사가 정하지만 어떻게 할지는 내가 정합니다.
벌써 20년 전에 프랑스 본사로 파견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대리 초년차로 한국에서는 매번 상사 지시를 받고 일을 하던 저는 난생처음 아무도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관여하지 않는 환경에서 일해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습니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더군요.
아침에 8시 즈음 출근하면 한국 시간으로 오후 3시 즈음됩니다. 메일 좀 보다가 한국에서 저녁에 시작하는 프로야구 문자 중계도 흠칫흠칫 숨어서 보면서 대충 오전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가 한국 시간으로 밤늦게 전달받은 요청들이 하나둘씩 오면 급하게 일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퇴근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현지 매니저와 하기로 한 일은 시작도 못했는데 내일 아침까지 한국으로 완료해서 보내야 하는 보고서가 밀려 남아서 야근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옆 부서에 저랑 같이 파견 나와 있던 선배님은 정반대였습니다. 늘 오후 다섯 시 되면 칼퇴근하셨죠. 일처리도 깔끔하고 항상 여유 넘치는 모습이 부러워서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하는 자리에서 비결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나도 처음에 파견 왔을 때 그랬어. 한국 회사에서는 지시를 받고 일하니까, 지시가 오면 바빠질 걸 알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어차피 나중에 바빠질 걸 대비해서 그전까지는 아이들링 (자동차가 달리기 전에 엔진만 켜서 Warm up 하는 단계) 하고 있는 거야. 어차피 근무 시간도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잖아. 일찍 퇴근하고 싶으면 기다리지 말고 네가 해야 하는 일을 미리 해 봐."
내가 다니는 회사가 업무 분장이 명확해서 오늘 해야 할 일이 딱 정해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통은 주로 맡은 업무가 정해져 있지만 갑작스럽게 상사로부터 내려오는 일도 많습니다. 특히 다른 부서와의 협업이 많은 자동차회사에서는 아침 일찍 임원 회의에서 긴급한 안건이 논의되고 나면 그 아래 실무 회의에서 이런저런 요청들이 오후에나 도착합니다. 거기에 품질 문제같이 갑작스러운 이슈가 나오면 당장 다음날 아침에 있을 높은 분들 회의에 보고하라는 불효령이 떨어지고 난감한 팀장님들은 급하게 도와줄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회사의 생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바빠질 걸 아니까 그전엔 휴식을 취하곤 합니다. 자기 일이 딱 정해져 있지 않을수록, 긴박한 요청이 많은 환경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커집니다. 문제는 급한 일 처리하느라 퇴근 시간 이후에도 야근을 꼭 해야 하는 분위기이거나, 남아서 이런 급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만 열심히 일한다고 인정받는 상황이면 곤란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정시 퇴근하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퇴근 시간과 긴급한 업무 지시가 계속 부딪쳐서 정시 퇴근할 때마다 눈치가 보인다면 본인이 하고 있는 업무를 한번 돌아봅시다. 지난 2주간 약 80여 시간 동안에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꾸준히 하면 되는 일과 갑작스러운 요청으로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비율을 얼마나 되는지 살펴봅니다.
만약 일상적인 업무가 60% 정도라면 오후에 올 긴급한 요청에 대비해서 오전에 미리 본인의 주요 업무를 마무리해 둡니다. 급박한 일은 아무래도 신입보다 선임들에게 몰리기 마련입니다. 선임들이 아침에 좀 쉬고 오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어수선한 분위기라도 나는 미리 내 몫을 해두고 빈자리를 마련해 두면 긴급한 지시가 와도 빨리 마무리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 수 있습니다.
긴급한 지시가 왔을 때는 빠른 대응이 필요한 만큼 정확히 상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시 사항을 들으면, 본인이 이해한 업무 지시 내용을 그대로 풀어서 다시 되물어서 확실히 답을 받아야 합니다. "네 부장님 알겠습니다. 그럼 2025년도 상반기에 발생한 고객 클레임 수를 조사해서 발표자료 10페이지에 있는 도표를 업데이트하라는 말씀이시죠?"와 같이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열심히 다해서 퇴근시간 맞춰서 보고 드렸는데 다시 해오라고 해서 서로 짜증 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받은 업무가 퇴근 전까지 하기가 어려운 정도의 양이라면 언제까지 필요한 것인지 명확히 물어봅시다. 그리고 솔직하게 퇴근 전까지는 어느 수준까지 가능하고, 전체 지시를 모두 완료는 언제까지 가능한지 (내일 오전까지, 금요일 퇴근 전까지...)를 미리 이야기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조정은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려 한다는 의지를 보여 줄 수 있으니까요.
해외와의 협업이나 업무 특성상 자연스럽게 오후 혹은 저녁 근무가 많다면 요즘은 보편화된 자율 근무제를 활용해서 늦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대신 개인적인 일들은 아침에 활용하는 거죠. 진짜 팀 전체가 급해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함께 야근하고 정당하게 대체 휴일이나 야근 수당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그리고 바쁜 지시는 언제든 오기 마련이죠. 시키는 일은 회사가 정하지만 받은 일을 어떻게 배분하고 시간 관리하느냐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시가 오길 기다리다 퇴근 시간 다 되어서 압박받지 않으려면 오후의 나에게 미안하지 않을 오전을 만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