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차와 페이스리프트 그 기초를 다지는 플랫폼

잘 만든 플랫폼을 공유해 개발 기간과 효율을 극대화한다.

by 이정원

새로운 자동차를 만드는 일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설렘과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막막함이 공존하는 과정이다. 수만 개의 부품이 얽혀 돌아가는 기계 장치를 무에서 유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상의 고차원적인 방정식을 푸는 일과 같다. 수조 원의 자본과 수천 명의 인력이 몇 년을 매달려야 하는 이 거대한 여정의 중심에는 플랫폼이라는 보이지 않는 뼈대가 있다. 집에 비유하면 수많은 새 집을 짓기 위해 먼저 다져놓은 가장 단단하고 중요한 기초 공사에 해당한다.


image.png 소나타의 세대 변화 - 8세대로 이어진 진화 과정 중에서 디자인과 성능 모두 진일보하였다. - 현대차 홈페이지 참조


우리가 도로에서 만나는 차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 1980년대부터 8세대에 걸쳐 진화한 현대 소나타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모델들도 늘 변신해야 살아남는다. 통상적으로 매년 미세한 사양을 조정하는 연신 변경에는 1년 내외의 기간이면 준비가 충분하지만, 4~5년 주기로 겉모습과 상품성을 다듬는 페이스리프트는 신차에 준하는 2년 정도의 개발 과정이 필요하다. 완전히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래 걸리는데 테슬라의 사이버트럭처럼 플랫폼까지 새로 짜야하는 경우에는 양산까지 4년 넘게 걸린 사례도 있다. 새로운 공법과 소재가 도입될수록 이 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간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품질을 상향 평준화하는 마법이 바로 플랫폼 공유다. 겉으로 보기엔 날렵한 세단인 아반떼와 덩치 큰 SUV인 투싼이 같은 뼈대를 쓰고 있다. 공통부분을 최대한 활용해서 개발비를 줄이고, 최소한의 투자로 혼류 생산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글로벌 강자들도 이 플랫폼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전 세계 1위 도요타는 TNGA(Toyota New Global Architecture)라는 혁신적인 플랫폼 전략을 통해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과거에는 차종마다 제각각이었던 설계를 통합하여 저중심 설계와 강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고, 이를 통해 모든 라인업의 주행 감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생산 효율을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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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의 TNGA 플랫폼과 지리의 CMA 플랫폼


중국의 지리 자동차 사례는 플랫폼이 어떻게 브랜드의 위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리는 인수한 볼보와 공동 개발한 CMA(Compact Modular Architecture) 플랫폼을 활용해 폴스타, 로터스, 링크앤코 등 산하의 수많은 브랜드에 이식했다. 덕분에 지리는 독자적인 기술력을 단숨에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신차 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며 시장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들에게 플랫폼은 단순히 부품을 공유하는 틀이 아니라, 브랜드의 DNA를 전파하는 핵심이다.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며 플랫폼은 더욱 영리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E-GMP는 배터리 용량과 모터 구동 방식을 레고 블록처럼 조합하는 모듈형 구조를 완성했다. 이 전용 플랫폼 하나를 기획하고 완성하는 데는 3년이 넘는 시간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지만, 일단 제대로 된 플랫폼이 구축되면 그 위에 아이오닉 5나 EV6 같은 새로운 신차를 얹어 출시하는 데는 2년이면 충분하다. 최근에는 기존의 플랫폼을 개조해서 상용차 전용 E-GMPS를 만들어 PV5라는 모델에 활용하고 있다. 긴 호흡을 가지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길러내는 전략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image.png 다목적 상용차인 PV5의 뼈대가 된 E-GMPS. 적재 공간을 늘리기 위한 후륜 구조가 눈에 띈다.


결국 자동차 기획자는 플랫폼이라는 견고한 설계도 위에서 예산과 기술, 그리고 고객의 욕망 사이를 조율하는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잘 만든 플랫폼은 회사의 수익성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개발이 지연되고, 품질 문제로 큰 손해를 가져오는 재앙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플랫폼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만큼 기본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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